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본 사이트에는
천리교회본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른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
담길 수도 있습니다.




천리교 교회본부



cond="$

여는글

우찌 이리 예쁘노!

 

이영수(교회보 편집실장)

 

어머니는 올해 여든여덟살이다. 언제 이런 연세가 되셨는지 놀랍다. 환갑을 지나고 칠순이 지나고 여든이 지나는 동안에 어머니를 제대로 한번 모셔보지도 못했다. 그 많은 세월이 참으로 빨리 지나가 버렸다. 참으로 불효막심하다.

어머니 앞에 나는 늘 철없는 어린아이였다. 타향에 살다가 어머니 뵈러 가면 꼭 빠지지 않는 말이 , 언제 철들래, 사람 구실 언제 할래!”였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맞는 말씀이다. 이날 이때까지 용돈을 제대로 드려 봤나, 어디 구경을 시켜드려 봤나, 따뜻한 밥 한 그릇 제대로 사드리길 했나, 원하는 대로 천리굔가 만리교를 그만 두고 어머니 곁으로 갔나, 아니면 집안에 일어나는 대소사에 경제적으로 도움이라도 되었나.

 

언젠가부터 어머니 바람대로 철든 사람, 제 구실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즐겨 쓴 별칭이 시중(時中)이다. 시중이란 때 가운데. 달리 말하자면 철이 든다는 말이다. 나갈 때 나가고 들어올 때 들어오는 것, 할 때 하고 가만히 있어야 할 때 가만히 있는 것. 그 때를 알아 가장 알맞은 말이나 가장 알맞은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별칭이었다.

언젠가 어머니에게 왜 저희 집에는 지내려 안 오십니까?” 물은 적이 있었다. 아주 간단히 한 마디가 되돌아 왔다. “밥 굶을까 봐서 못 가겠다.”였다. 땟거리도 없는 너희 집에 얹혀 지내기 싫다는 말이었다. ‘저희들은 굶지 않는다, 양식은 얼마든지 있다고 항변했지만 어디 밥만 먹고 사나하시고는 뒷말이 더 이상 없으셨다.

그러시던 어머니가 이제 여든여덟. 일반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그리고 잠깐씩 형님 댁으로 오고 가기를 여러 차례 하며 한 두 해가 지났다. 이제는 기력도 많이 떨어지시고 의식도 간간히 오락가락 하셨지만 요양병원은 질색하며 가기 싫어하셨다.

그러던 차에 어머니에게 저 따라 가실랍니꺼? 이제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제가 모실께예!” 해 보았다. 선뜻 그러마.” 하신다. 그런데 정작 준비하고 이제 갑시다!”하면 고개를 내저었다. 나에게 진심이 없어서였을까.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한 뒤에, 따라 나서서 진해 강습소를 들어간 게 지난 923. 3개월은 강습소에서 함께 보내고 그 뒤는 우리 집으로 모시고 갈 마음 작정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던 시절, 최소한 3년은 품에 안고서 키웠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살아생전 마지막 3년은 모셔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설사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고 의식이 없더라도 말이다.

강습소 오신 날부터 아침 저녁에 근행보러 신전으로 가셨다. 어머니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들 뺏어간 천리교라고 그렇게도 싫어했던 종교, 천리교였는데. 낮이고 밤이고 때때로 주무시기만 하신 어머니가 근행보러 가자는 말에는 선뜻 일어나시곤 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따라 부르라고 놓은 신악가 책을 불편한 손으로 겨우 겨우 넘기면서도 12장 끝까지 흥얼거리며 읽으셨다는 점이다. 이때는 누가 와서 말을 걸어도 인사를 해도 본체만체 하셨고, 12장 마지막을 넘기고 나서야 고개를 들곤 하셨다.

 

아침 저녁근행 전에는 거동이 불편하신 어머니께 젖은 수건으로 얼굴, , 발을 닦아드렸다. 얼굴을 닦아드리며

우리 어머~! 참 예쁘다, 우찌 이리 예쁘노?” 하고 말씀을 드렸다.

뭐라 쌓노! 주굴탕 할망구가 뭐시 예쁘노?” 어머니는 무슨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한다고 나무라신다. 나는 진심이기에

진짜, 예쁘네예!” 했다. 정말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맑은 눈, 짙은 눈썹, 고운 살결, 넉넉한 뺨과 턱살, 주름살까지 다 예뻤다. 내 눈에는 정말 그랬다. 어머니 얼굴에는 평생을 살아온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귀염둥이, 멋 부리던 빛나던 시절, 새 신랑을 맞아 웃음치던 얼굴이며, 젊은 날 홀로 되신 후 6남매를 기르시며 온갖 애환에 묻혀 살던 세월도 서려 있고, 자기 말 안 듣는 아들 때문에 상심하며 고심하던 고뇌와 자식들이 손자 손녀를 데리고 올 때 반기던 마음까지 다 새겨져 있는 듯했다.

어머니 얼굴을 그토록 가까이, 그토록 긴 시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 뭉클한 감동이 절로 일어났다.

어머이 얼굴, 참 예쁘네예!” 하는 말이 또 한 번 그냥 흘러나왔다.

그래, 그래. 매일 한 번은 그 말 해라이!” “!!”

뒤에 아내에게 이 말을 전하니 까르르웃는다. 재미있다며 교회보에 써란다. 그러고는 내 흉내를 내면서 아이고, 우리 신랑, 멋지다~!! 우찌 이리 멋지노~!!”한다. 그러고는 당신은 하루에 몇 번이나 이 소리 듣고 싶어요?” 한다. “세 번!” 그러자 좋아, 세 번 해 줄게. 대신 나한테도 세 번 이쁘다 해 줘야 해요!”하고 웃는다. 덩달아서 나도 아이구, 내 색시! 우찌 이리 예쁘노, 참으로 예쁘제!!”

아내도 나도 기분이 아주 좋아지고 집안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다.

어머니는 하루 한번으로 족하다했는데 젊은 우리는 욕심이 많은 지 세 번은 해야 성이 차나 보다.

 

아쉽게도 어머니는 강습 3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어머니는 지금 인생에 어느 지점을 지나고 계실까. 내 정성과 진실이 부족하여 어머니를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해 못내 아쉽고 죄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