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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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

 

영화 설국열차를 보고

 

정선일(산청교회장)

 

얼마 전에 상영되었던 설국열차를 보면서 너무 잔인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고 끔찍하고 슬펐지만, “아하! 이것은 인간들의 생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방향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세계 지도자들이 의논해서 공중에 CW-7을 뿌리게 됩니다. 예측과는 달리 전 세계는 빙하로 뒤덮이고, 사람들이 얼어서 죽게 됩니다. 윌 포드라는 사람에 의해 설국 열차가 만들어지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생존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열차 안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맨 뒤 칸에 있는 사람들은 먹을 것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으로 연명을 합니다. 반면 앞 칸에 있는 사람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17년 동안 최악의 상태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킵니다. 커터스를 중심으로 한 이들의 꿈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제일 앞 칸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많은 희생을 치르며 점령해 갑니다.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방향이었습니다.

반면 이 열차를 만든 윌 포드와 특권 계층들은 힘으로 이 질서를 유지시켜 나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하다는 논리를 펴면서 희생과 착취를 합니다. 윌 포드는 Will- Ford입니다. 자본주의의 지속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가는 방향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방향으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방향을 선택할 때 해결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내면의 방향입니다. 자기희생이라는 방법에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맨 뒤 칸에 탄 사람들이 한 동안 음식이 제공되지 않자 사람고기를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잡아먹는 것입니다. 이 때 길리엄이란 노지도자가 자기 팔을 자르고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자기 팔을 잘라 내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사람들이 자기들의 야만적인 행위를 멈추게 됩니다. 자기희생이 있을 때 사람과 사회가 변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조님께서는 남을 도움으로서 내 몸이 도움 받는다라고 하시며, 자기희생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50년 동안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수호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굳어진 마음이 조금씩 열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의 문제 해결도 사실은 나의 희생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는, 어버이신님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입니다. 신님을 향해 나아가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남궁민수(송강호역)와 그의 딸 요나는 열차의 바깥문을 폭발시키고 외부 세계로 나가게 됩니다. 어느 새 지구의 온도는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늘 열차라는 세계 안에 갇혀 그 속에서의 삶에만 고착되어 다른 길, 다른 차원의 세계를 보지 못했습니다. 문제 해결은 열차 속에 갇혀있는 생각의 틀을 깨고 밖의 세상을 볼 수 있었을 때 가능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닫혀 있는 내 안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향할 수 있는 마음은 오로지 어버이신님을 향해 나아갈 때 해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근행과 기원으로 신님 곁으로 나아갈 때 내가 아닌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된 마음을 수호 받아서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가 풀릴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셋째는, 미래의 방향입니다. , 다음 세대와 사람을 살리는 것에 소망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요나와 기차 밑바닥에서 일하던 어린 꼬마 토비만이 살아남아 기차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져서 어른으로 키우는 것, 즉 사람들을 키우는 것에 비전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학교 학생들, 청소년, 청년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후원, 그리고 교육을 하는 데 전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크게 느낀 점은 문제 해결을 위한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적인 길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신의 길을 선택하든지. 그러나 그 삶의 질과 내용의 결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역사적 평가가 달랐습니다.

지금까지 교회생활을 해 오면서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꼭 성숙한 태도를 취한 것만은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신님의 가르침 앞에 서기 보다 내 감정 앞에 설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왜 이런 사람, 이런 환경을 만나야만 하는 것입니까?”라는 마음이 올라올 때 고통스러웠고, 원망이 생겼으며, 힘들었습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를 더 들여다 볼 시간을 가졌고, 신님과 교조님께 다가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가르침과 모본에 따라 살려고 했을 때 신님께서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놀라운 수호를 해 주신 적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도 여러 가지 기원의 제목들이 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부모를 통하여 나에게 주어진 환경이든, 나의 잘못으로 생긴 환경이든,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주어진 처지든 간에 신님의 거시적 관점에서 이 모든 것을 보았으면 합니다. 주변에 어려운 사람과 환경, 일들이 있을 때 이것을 나를 바꾸고 훈련하기 위한 신님의 이끄심으로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그럴 때야말로 신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이럴 때 오히려 가르침 앞에 순종하며, 모본에 입각하여 나를 다듬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보통 우리들은 어려운 마디에 봉착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요? 어려움이 있으면 바로 신님께 의지하고, 교조님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우리들은 신님을 찾지 않고 고생, 고생을 하다가 그래도 안 되면 그때서야 신님을 찾을까요? 그 동안 우리들은 우리들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또한 어버이신님 앞에 나아가려니 자신들의 잘못과 연약함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에 도저히 자존심이 상해서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체면이 허락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면서도 신님을 찾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버이신님 앞에 나아갈 때는 자존심과 체면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방식도 안 되고, 자기 방식도 안 되자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택한 것이 무엇입니까? 신님 앞으로 나아가 매달리고 기원을 한 것입니다. 수호를 해달라고 기원을 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내려놓고 신님을 의지하고 가르침대로 기원을 할 때, 마음이 바뀌고, 환경이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들은 어떤 길을 선택함으로 해서 오늘의 부정적인 결과들을 경험하게 되어 지고, 후회를 하게 되는 일상을 반복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신앙도 결국 어느 길과 방향을 선택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가르침으로 나의 내면을 성인시키는 길, 기원의 길,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신님의 수호를 받는 길을 선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가을에 우리 삶의 방향을 바르게 선택하고 걸어가게 하옵소서. 세상 방식과 자기 생각에 의지하기보다 기원하게 하옵소서. 가르침을 지키고 모본을 따르며, 조석근행에 철저함으로 우리 인생과 삶의 영역에 신님의 수호가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