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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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

단노는 인연 자각에서부터

 

 

최인옥(산청포교소)

어버이신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녀들이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함께 즐기시려고 인간을 창조 하셨다고 인간 창조 목적을 밝혀 놓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반드시 즐겁게 살아야 할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우리가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버이신님께서 그러한 목적으로 우리를 만드셨다면 틀림없이 그 방법도 가르쳐 놓았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즐겁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두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아우성들이지만 정작 행복을 진정으로 느끼며 즐겁게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세상은 인간들이 살아가기에 너무도 편리하게 발전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가슴속은 더 복잡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사람들 가운데는 정말 누가 봐도 불행에 처해져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늘 불행하다고 하소연 하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끊임없이 더 가지고자하는 욕심 때문일 것이다.

 

어버이신님께서는 욕심 때문에 감사한 생활을 하지 못하는 자녀들을 염려하셨다. 그래서 이 길을 따라가는 우리들에게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교조 모본 50년이라는 길을 통해서 너무도 세심하게 자녀 사랑하는 어버이 마음으로 가르쳐 놓으신 것이다.

여덟 가지 티끌, 대물 차물의 리를 통해서 감사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 그러면서 이 길을 가는 자녀들은 반드시 즐겁게 살아야 하는데, 모든 조건이 좋을 때는 어버이신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도 즐겁게 살 수 있지만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아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너무나 불행할 때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하신다. 불행해서 죽을 것만 같은데 즐겁게 살라 하신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할 것이다. 어버이신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단노만 된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노를 잘하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이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어려운 것을 그냥 포기한다는 것은 어버이신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살겠다는 것 밖에 안 된다.

단노란 원래의 의미는 만족하다.’ ‘충분하다.’ ‘흡족하다.’ 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길에서는 충분히 만족스럽다든가 바라던 것이 성취되었을 때 단노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 반대로 어렵거나 역경에 처했을 때 단노합시다.’란 말을 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단노란 어떤 상황이던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의 모습에서 어버이마음을 깨닫고 되어져 오는 현실을 기쁨으로써 받아들이는 마음을 단노라고 가르치셨다.

지도말씀 가운데

이쪽이나 저쪽이나 사정이 겹치고 있는 가운데서 단노하라고 해도 하기 어렵겠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 잘 분간해 듣고 나날이 잘 지내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는 단노의 마음을 다스려라. 몸이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는 단노하라고 해도 하기 어렵겠지. 하지만 이 길의 이야기를 잘 분간해 듣는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까지 지나온 나날 가운데서 어버이 마음을 충분히 받아 온 사실을 생각하라. 신상, 사정의 괴로운 가운데, 단노하기 어려운 가운데 단노하는 것이 전생 인연의 참회다. 전생인연은 이 밖에 참회가 없다.”

는 말씀이 있다.

이러한 단노를 하기 위해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인연자각이다. 어떤 어려운 일이 나에게 닥쳐왔을 때 그 불행 앞에서 그냥 감사하다는 절대적으로 나올 수가 없다. 내 맘 속에서 감사함을 이끌어 내는 방법으로 인연 자각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내 인연이 이러이러한데라고 인연 자각이 되어졌을 때 그래도 이 정도는 감사하다.’라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겠는가. 이렇게 되어졌을 때 괴로움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상 부자유, 부자유스러워도 그것을 넘기면 앞날은 즐겁다. (……)

어떻든 마음 쓰러지지 않도록. 이만큼 부자유하지만 다른 일이면 어찌 되었을까 하고 단노. (1901. 7. 15)

이 길의 신앙은 단노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단노만 잘 할 수 있다면 어떤 일 앞에서도 감사를 느끼며 즐겁게 살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