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본 사이트에는
천리교회본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른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
담길 수도 있습니다.




천리교 교회본부



cond="$

[180년05월]병 속에 새 - 남상우

2017.05.11 09:48

편집실 조회 수:83

병 속에 새

 

남상우(구만교회장)

 

2014년 4월 6일, 여든이 다 되신 노모(老母)에게 교회를 맡긴 채 부부 함께 마산으로 단독포교를 나섰다. 처음 얼마간은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절박(切迫)하고 절실(切實)했던 포교발악(布敎發惡) 덕택에 ‘작은도서관과 가정위탁’이라는 포교를 수호받았다. 매일같이 어른들의 고함소리와 아이들의 울음보와 웃음꽃에 파묻혀 행복한 아우성을 내지르고 있다. 하지만 주인을 잃은 교복과 썩어문드러진 근행악기에는 여전히 먼지가 수북하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우리의 눈과 귀, 손마저 한 여성(?)에게만 쏠려있던 지난해 12월. 인구 천만 명을 대상으로 한 표본인구주택 총조사 종교 부문 결과 발표가 있었다. 개신교(기독교) 인구는 지난 1995년 19.4%, 2005년 18.2%, 2015년 19.7%로 2005년에 잠시 주춤하더니 다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10년 전보다 120여만 명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가톨릭(천주교) 인구는 1995년 6.6%, 2005년 10.8%, 2015년 7.9%로 소폭 감소했다. 불교 인구는 지난 1995년 23.2%에서 2005년 22.8%, 2015년 15.5%로 계속해서 감소 추세에 있다. 10년 전보다 300만 명 정도가 많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천리교는 기타 종교(SGI, 대순진리회 등등)에 포함되어 있었다. 기타 종교의 인구수는 전체 인구의 0.3%로 고작 139,000명에 불과하다. 도대체 천리교 신자 수는 그중 얼마나 될까? 이번 조사에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개신교(기독교계) 인구가 960만 명으로 불교를 앞질러 인구조사 처음으로 최대종교로 등극했다는 점이다.

 

종교계는 저마다 종교인구 통계의 숨은 뜻을 파악하느라 분주하다. 불교계는 개신교에 1위 자리를 내주고서 충격과 향후 여파에 대해 고심하고 있다. 개신(기독)교계는 교회 현장에서는 신도가 줄고 있는데도 도리어 종교인구가 증가했다는 발표에 대해 이단의 기독교계 신자 수가 많이 증가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천주교는 2014년에 교황이 방한해 상당한 선교 효과가 있었음에도 천주교인이 줄었다는 것에 대해 관련 언급을 자제하고 있는 분위기다. 반색하면서도 의아해하고(기독교), 충격 속에서 반성하고 있으며(불교), 담담한 듯 고심하는(천주교) 종교계 표정이 제각각 복잡 미묘하다. 그러면 이 길은 어떤가? 포교대책 마련은 고사하고, 다들 잿밥에만 맘이 있어 엉터리 통계라며 애써 눈길조차 두지 않는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또 다른 한 가지 특징은 무종교인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 인구 비율은 전체의 56.1%로, ‘종교가 있다’고 답한 비율(43.9%)보다 12% 이상이나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종교가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을 추월한 것은 통계청이 종교 유무를 조사하기 시작한 1985년 이후로 처음이라고 한다. 2005년 2,182만 6,000명에서 2,749만 9,000명으로 9%나 급증했다. 나이별로는 20대가 64.9%로 가장 높았고, 이어 10대(62%), 30대(61.6%), 40대(56.8%) 순이었다. 특히 20대에서 무종교인이 가장 많다는 것은 취업이 어려워졌고, 삶의 여건이 어느 때보다 팍팍한 그들에게 종교는 이미 설득력을 잃었다.

 

젊은이의 탈종교화에서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로는 ‘관심이 없어서’가 45%로 가장 많았다. 특별히 실망했거나, 반대한다기보다는 관심이나 기대 자체가 아예 없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인이 오히려 있는 자들 옆에서 떨어진 콩고물을 줍고 있는 모습은 종교인의 자화상이 된 지 오래다. 한 사람의 종교인으로 참으로 뼈아픈 부분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길의 전도방식을 문제 삼을 의도는 손톱만큼도 없지만, 현대와 같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단언하건대 자신이 속한 종교공동체의 우월함만을 일방적으로 전도(傳道)·주장(主張)하는 것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그보다는 자신들이 선택한 종교가 가르친 바대로 의미 있게 살아가는 모습, 즉 즐거운 삶의 구체적인 모습(포교)을 보여주는 것이 젊은 그들에게 감성 어필할 수 있으며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자식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배움의 장 ‘학생 신앙수련회’는 시사(示唆)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 고성교회 학생 신앙수련회의 첫 시작은 1978년으로 이미 불혹(不惑)의 나이인 마흔이 되었다. 염려할 바는 아니지만, 40이 되었으니 조촐한 생일상이라도 마련하는 게 어떨까 싶다. 1980년 여름 수련회 참가자 수가 700명이 넘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 이후부터 참가자 수가 서서히 하향곡선을 긋더니 최근은 1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저출산 비율을 고려하더라도 만족하기에는 당황스러운 수치이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포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모두 쉽게 이야기하지만, 실제적인 포교지원책이나 포교 방법론에 대한 물음에는 전도청, 교단, 교구, 교회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개교회(個敎會)에 책임과 답변을 떠넘기다시피 하는 게 이 길의 포교 현실이다. 단독포교 3년간의 안거(安居)를 끝마친 지금, 난 다시 병 속에 새를 가두고 세상 속 만행(萬行)에 들어간다.

 

자아 자아, 인간의 진실한 마음이 남을 구제하는 거야. 자아 자아, 남을 돕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이 내 몸까지 구제받게 하는 거야. 모두 모두 각자 이 리를 진심으로 깨달아야 내 몸이 구제받는 거야. (1888년 8월 9일 교조님의 지도말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