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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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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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

 

고생은 미래를 위한 씨앗

 

김연수(도성포교소)

 

하루는 박자목을 치고 신악가를 부르며 시내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11장쯤 하고 있을 때, 어떤 스님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늦은 오전 시간이었는데 술도 한잔하신 것 같은, 정식의 절차를 밟은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 스님이었습니다.

다짜고짜 , 그거 하지 마!” 하는 겁니다. “그거 공개적으로 이런 장소에서 하지 말란 말이야!” 하면서 몰아붙입니다. 그러면서 한 대 맞을래?” 합니다. 갑작스런 상황에 어떡하지?’ 속으로 망설이면서도 나도 모르게 !” 라고 대답했습니다. “진짜, 맞을래?” 하며 손을 치켜 올립니다. 제가 겁도 많고 커 오면서 크게 맞아 본 적도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은 그리 크게 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스님은 덩치도 큰데다 때리겠다고 치켜든 손은 솥뚜껑만 했습니다. 박자목 치지 말라고 재차 을러대더니 제 뺨을 쳤습니다.

순간, 체구가 작은 저는 덩치의 힘에 밀려 넘어질 뻔했습니다. 신호등 주변이어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수 십 명 모여 있었는데, 지켜보고 있었을 그 분들도 겁이 났던지, 흠칫 놀라는 것 같더니, 제 쪽을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좀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고, 대들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천리교라고 쓰여 진 전도용 옷을 입고 소동을 벌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 스님도 때리고 난 다음에 자기도 겁이 났던지,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아무 말도 없이 부랴부랴 자리를 뜹니다. 저는 자리를 피하는 그 스님 뒤통수에 대고 한 대 맞았느니, 이거 계속합니다!”하고 허락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12장을 마저 마쳤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옛날 선배 용재님들 얘기를 듣자면, 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분들도 계시다하고, 그날 저 같은 경우야 아주 작은 소동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느 종교의 전도를 하던지, 특히 길거리에서 전도하고 있는 모습은 그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날 스님과의 소동도 제가 만약 신앙하시는 분들이 많은 종교를 전도하다 같은 일을 당했다면, 주위에 같은 신앙을 하시는 분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편을 들어줬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 천리교도 그렇게 신자들이 많았으면 참으로 좋겠다하는 생각이 간절해지기도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이제 어버이신님께서 교조님을 통하여 가르침을 전파하시기 시작한 것은 불과 174년에 불과한데, 너무 큰 것을 바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교회장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커 가기 시작한 시순은 예수님께서 출직하신 후 500년 이상이 지날 무렵부터라고 합니다. 교조님께서도 재세시에 고생을 하시고 나서야 은신하신 이후에 터전에서 어버이신님의 뜻이 활짝 피기 시작했다고 하고, 다른 종교의 역사를 봐도 예수님이나 석가모니 이후에 수도 없이 많은 구도자들과 신자들의 고생, 심지어는 순교의 희생을 해가며 각 종교의 가르침을 세계에 펼쳐나가기 시작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가장 가까운 과거의 우리나라 안에서의 기독교나 천주교의 포교 역사만 봐도 온갖 박해와 절두산이라는 이름을 남기고 순교 성지화될 정도의 고생의 역사는 너무 잘 알려진 사실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그런 고생을 해 본적이 있는가? , 전혀 없습니다. 교조님의 가르침으로 풀이를 하자면, 지금 형편이 훨씬 나은 종교를 신앙하는 목사님들 신부님들 혹은 스님들의 경우 심지어는 천리교 내에서도 아무런 불편없이 교회나 포교소를 이끌어가고 계신 용재선생님들의 경우에는 그 분들의 전생에 각자의 믿음들에 대해 수도 없이 많은 고생을 했던 덕이 있어서 금생에 와서 그 종교를 신앙해 나가는 가운데 아무 불편없이 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도 어머님으로부터 배워서 신앙을 해오는 입장으로 커 가고 있는 자녀들을 보며, 나의 고생의 덕이 자녀들에게 더 나은 신앙의 덕으로 미칠 것이라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지금껏 제가 해왔던 천리교의 신앙보다는 훨씬 나은 환경 가운데에 신앙을 하고 더 커서는 포교소장도 하고 교회장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껏 또 앞으로 해 놓은 고생 없이 자녀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그저 공부도 하지 않고 시험성적만 잘 나오기를 바라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보니, 제가 그날 당했던 일은 고생도 아니고 더군다나 고초도 아닌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날 제가 전도를 하며 가졌던 마음가짐에 대해 마음의 진실을 담아 전도를 했는가 한번 더 반성해 보고, 좀 더 열심히 전도해 나아가야 한다는 어버이신님의 가르침을 그 스님을 통해 보여주심으로 여겨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조님의 가르침을 펴 나가는데 있어서 더 큰 용기를 가지고, 더 큰 고생도 고생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어버이신님의 보살핌 가운데에 수호받는 것임을 깨우쳐 항상 모든 일을 즐겁게 해 나가는 것만이 제가 지금껏 옳다고 생각하며 해 왔던 신앙에 대한 미래의 답을 찾고, 앞으로 이길을 이어갈 귀여운 자녀들에게 저 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신앙의 환경을 전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