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본 사이트에는
천리교회본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른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
담길 수도 있습니다.




천리교 교회본부



cond="$

명경지수 116

 

너를 보고 나는 깨닫네

 

박지수

 

* 굴뚝 벽에 뿌리 내린 느티나무

 

단풍이 절정에 이르고 있던 지난가을, 지리산에 갔다. 가을이면 늘 지나는 길이나 근처 산에서 단풍을 보지만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단풍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이 온통 울긋불긋하게 단풍꽃이 피고, 불타올랐다. 어버이신님께서 그동안 수고 많았다. 보너스를 줄게.’ 하고 보여주시는 것 같은 느낌으로 흔감하게 단풍을 구경하며 단풍 속에서 지냈다.

아하, 이래서 사람들이 단풍 구경을 다니는구나. 이건 그냥 단풍이 아니네. 신세계구나.’ 싶었다. 어리석게도 내 나이 쉰이 넘어 비로소 단풍 구경에 나서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전에는 단풍이 그냥 단풍이지. 뭐 별 거 있어? 집 근처 산에도, 주변 어디에도 다 단풍, 단풍인데.’ 했다. 하지만 그렇게 보는 단풍과 절정기에 이른 지리산에서 보는 단풍은 매우 달랐다.

어버이신님이 보여주시는 절경에 그저 감탄, 감탄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렇게 절정의 단풍을 보여주시는 수호에 기뻐하며 황홀한 단풍을 그저 맘 깊이 받아들이는 것 외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원사에 들렀다. 대웅전을 지나서 뒤로 갔을 때 저 웅장한 굴뚝을 보았다. 그곳엔 오래되어 조금씩 틈이 생긴 굴뚝 벽 사이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세 개의 가지를 뻗어 힘차게 자라나고 있었다. 눈을 의심하게 하는 풍경에 걸음을 멈췄다. 가만히 녀석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녀석은 내 마음을 느끼는 듯, 내 시선을 즐기는 듯 활기차게 가지를 흔들어 댔다.

 

문득 머릿속에서 한때 자주 낭송하며 읊조리던 시 하나가 떠 오른다.

 

아름다운 관계

박남준

 

바위 위에 소나무가 저렇게 싱싱하다니

사람들은 모르지

처음엔 이끼들도 살 수 없었어

아무것도 키울 수 없던 불모의 바위였지

작은 풀씨들이 날아와 싹을 틔웠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말았어

돌도 늙어야 품 안이 너른 법

오랜 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

그래 아름다운 일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야

 

흐르고 흘렀던가

바람에 솔씨 하나 날아와 안겼지

이끼들과 마른 풀들의 틈으로

그 작은 것이 뿌리를 내리다니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

사랑이었지 가득 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

그리하여 소나무는 자라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바람을 타고 굽이치는 강물 소리 흐르게 하고

새들을 불러 모아 노랫소리 들려주고

 

뒤돌아본다

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삶의 어느 굽이에 나, 풀꽃 한 포기를 위해

몸의 한편 내어준 적 있었는가

피워본 적 있었던가


느티나무 씨앗이 어찌하여 저토록 척박한 굴뚝 벽에 뿌리를 내렸을까? 만약 굴뚝에 불을 땐다면 저 나무는 타 죽을 텐데. 다행히도 느티나무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굴뚝은 이제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렇다고 해도 느티나무의 삶이 간난신고로 너무나 팍팍하리라.

그냥 돌 틈도 아닌 굴뚝 벽이라니! 저 돌 틈 어디서 물을 구할 것인가?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비를 기다리겠지. 땅에서 한참을 올라간 저 절벽 같은 곳, 어렵게 딛고 선 한 줌도 안 되는 흙에서 어떻게 버티며 살아갈까.

저 녀석은 욕심 많고 불평 많은 인간에게 만족하며 살라고 한다. 이렇게 더 이상 힘든 상황이 없을 것 같은 환경에서 사는 나도 있는데 너희는 행복하지 않으냐고 말없이 들려주고 있는 게 아닐까. 저 나무를 보면 어느 사람이라도 자신의 불우한 삶, 도망가고픈 현실에 대해서 불평할 수 없을 것 같다.
굴뚝 벽에 피어난 느티나무도 한 생명인데. 한없는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에 감동과 생명력에 대한 경외감이 더해져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 화분 물구멍에 싹을 틔운 괭이밥

 

시중님(남편) 방에 있는 난 화분에 어떤 녀석이 싹을 틔웠다.

난 화분 아래쪽 물구멍에서 쏙~ 나타난 녀석.

넌 누구니?

어쩌자고 화분 위가 아닌 여기서 싹을 틔웠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씨앗이 난 화분 그 아래쪽 구멍을 찾아 내었네,

그 실낱같은 빛이 들어오는 구멍에 맞춰 싹을 틔우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니? 너는 또 얼마나 힘을 내고 또 내었니?

그렇게 견디고 버티고 힘들게 싹을 틔웠구나.

정말로 대단하구나. 정말로 장하다!!

쪼그만 녀석이 안쓰럽고 기특하고 애잔하다. 그 척박한 땅에 생명을 틔운 생명력에 감동하며 격려하듯이 한참을 바라본다.

 며칠 지나 다시 시중님 방 화분을 들여다본다. 난 화분 물구멍에서 싹을 틔운 그 녀석이 어떻게 자라고 있나 살펴본다. 녀석은 노란 꽃이 피는 작은 괭이밥이었다. 지난번에는 떡잎만 나서 누군질 몰랐는데, 오늘은 더 자라 잎들이 커지니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냥 보기에도 애가 타는 너무나 가늘고 여린 줄기와 잎이다.

 

'이런 곳에 싹 틔워서 어쩌자는 거니?

널 어떡하면 좋니? 어찌해야 할까?'

녀석이 너무 안쓰럽고 안타까워서 가슴앓이한다.

하지만 이젠 녀석을 아름답게 보게 되었다. 아래 교조님 말씀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고본천리교교조전일화편187 터전 하나에
18866, 모로이 구니사부로는 넷째 딸 히데()가 세 살에 출직했을 때, 너무 슬퍼 터전으로 돌아와서

"뭔가 틀린 점이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청하자, 교조님께서는
"자아 자아, 어린아이, 세 살도 한평생, 평생 세 살 아이와 같은 마음. 터전 하나에 마음을 기울여라. 터전 하나에 마음을 기울이면 사방으로 뿌리가 뻗는다.
사방에 뿌리가 뻗으면 한 쪽이 떠내려가도 세 쪽이 남는다. 두 쪽이 떠내려가도 두 쪽이 남는다. 굵은 싹이 트는 거야."
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아이의 출직에 대해 '세 살도 한평생'이라 하신 교조님 말씀을 떠올리니까 느티나무와 괭이밥에 대해 깊이 깨닫게 된다. 굴뚝 벽의 느티나무도, 난 화분의 괭이밥도 인간의 생각으로 보니 짧을 뿐이다.

세 살에 출직한 저 아이에겐 저것도 한평생, 온전한 삶이라는 것이다. 괭이밥이 물구멍에서 싹틔운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고 훌륭한 것이지. 굴뚝 벽에 어렵게 어렵게 싹을 틔워 저만큼 자라난 느티나무, 저것만으로도 너무나 훌륭하고 충분하다.

앞으로 더 힘들게 살아야 하고, 언젠가 가까운 날에 사그라들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위태로운 생명에 아리고 시리고 슬픈 마음은 좁은 인간의 시야로 보니 그렇고, 찰나만 보는 인간의 감정일 뿐이다. 느티나무도, 괭이밥도, 세 살에 출직한 아이도 충분히 만족하며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살았던 것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교조님의 말씀으로.

이제 괭이밥을 다른 눈으로 격려하며 사랑을 전한다.

"괭이밥, 넌 이미 매우 아름다워. 네 삶은 충분히 의미 있어. 네 생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축복해. 사랑해. 괭이밥~"

 

느티나무와 괭이밥을 보며 세 살도 한평생이란 교조님 말씀이 떠올라 깊이 깨달아서 감사하다. 사물을 보는 방식, 대하는 태도를 바르게 이끌어주시는 교조님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