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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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111

 

울며불며 신앙을 지나

 

박지수

 

요즘 석 달째 인터넷 줌으로 공부하고 있다. 화상 강의, 화상 회의를 하는 방법을 인터넷 도구를 이용해서 배운다. 기초적인 것을 배운 뒤 실습으로 자신의 신앙을 인터넷 도구를 활용해 이야기하는 시간도 가진다. 그중의 하나로 일사천리이다. 일사천리란 한 사람의 사적인 천리교 이야기를 줄여서 붙인 이름인데, 즉 개인의 천리교사라고 할 수 있다.

 

지난주 일사천리는 내 순서여서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50 평생 전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새삼스레 전체를 되돌아보니, 그 순간순간에는 그 인연이나 사정에 휘말리고 빠져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다시 보였다. 신님의 뚜렷한 의도, 인도가....

 

내 신앙의 뿌리는 엄마이다. 엄마는 약 48년 전 폐결핵으로 입신하셔서 도움을 받았다. 그 후 사정도 도움받아 신앙생활을 쭉 이어 오셨다. 우리 형제들은 무난하게 잘 자랐다. 특별히 애먹이거나 속 썩이는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대학 졸업하던 해, 갑상선암으로 자식들 중에서는 최초로 수술하게 되었다. 수술 후 갑상선암은 재발이 잘 되는 병이라고,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의사한테 들었단다. 엄마는 병도 고칠 겸, 팔자를 고치는 곳이라며 진해에 있는 경남교의강습소에 보냈다. 나는 내 병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재발하면 죽으면 되는 거지, 그게 뭐 별거라고!’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엄마한테 효도한다는 마음으로 강습을 갔다. 그때 이야기되고 있던 취직자리는 3개월 후에 가면 되겠지 생각하며...

 

그렇게 강습을 가서 지금의 남편인 시중님을 만났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시중님과 결혼하고, 환경운동을 했다. 그 후 신념을 가지고 속세를 떠나 깊은 산 속으로 떠났다.

그렇게 산에서 단둘이 지낸 낙원 같은 생활 2, 그리고 신님의 손에 이끌려 울며불며 다시 돌아온 천리교, 이어지는 포교생활.

이 길에 인연이 있기에 운명의 쇠사슬이 나를 칭칭 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포교가 숙명임을 깨달았던 나는 억지로 마지못해 산에서 나왔다. 그랬지만 이 길은 내가 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갈 길이 아닐뿐더러,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천리교를 싫어했다. 정말로 내가 가고 싶은 길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신님께서 내가 필요하다고 잡아 이끄시니 할 수 없이 왔다. 신님의 거미줄에 걸리면 헤어날 것이 없다 하지 않은가.

 

그리고는 나름대로 신님께 작정했다. ‘앞으로 10년 동안 이 길에 헌신할 테니 그다음에는 내가 가고 싶어 하는 산으로 보내 달라.’고 일방적으로 신님께 말씀드리고, 10년 후면 떠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버티었다. 정말로 열심히 10년을 헌신, 희생하며 살았다. 그렇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헌신을 하면 가게 해 주실 거라고 믿었기에 최선에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참고 견디고, 헌신하였던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열심히 노력했다. 마침내 10년이 되어 떠날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주변 사람들과 작별인사도 다 나눴다. 떠나기 1년 전에 이미 갈 곳으로 주소지도 다 옮겨 놓았다. 인사도 다 끝났으니 이제 짐을 싸고 떠나면 되는 순간, 발목을 붙잡혔다.

어버이신님한테는 그 10년이 부족했던 것일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산에서 돌아올 때는 10년 후에 돌아간다는 그 희망 하나로 힘든 시간을 견디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 희망이 사라진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젠 무엇에 의지하고, 무엇을 희망으로 삼아 살아갈 것인가.

내 존재의 의미는 사라지고, 앞날도 전혀 보이질 않았다. 내 앞에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과 절망뿐이었다.

나를 지탱하고 있던 발밑에 땅이 순식간에 푹 꺼져버린 느낌이었다. 갑자기 나는 공중에 붕 떠 있었다. 그다음은 추락! ', 나는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살아갈 희망도 찾지 못했다. 나는 가야 할 길도, 희망도, 의지처도 모두 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어버이신님은 그렇게 천 길 낭떠러지에 선 나를 그냥 밀어 버리셨다.

 

아주 힘든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죽을 수도 없고, 살길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 배우고 새긴 가르침들이 있어서 어쨌든 내 마음을 추스를 방도를 찾아야 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모든 삶의 조각들, 의미들, 희망들을 끌어모아서 다시 내 존재의 의미, 삶의 가치들을 되찾아야 했다.

 

필사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 이곳저곳을 서성이고 찾아다니며 노력한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어느 정도 마음이 추슬러졌을 때, 교회장 자격 검정강습(후기)을 결심하여 교회본부로 갔다. 어느 정도 마음은 추슬러졌지만 앞날에 대한 희망, 이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 것인가를 다시 정립해야 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나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견디지 못하는 성향이라 그 상태로는 포교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터전에서 공부하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함석헌 선생이나 간디 선생 같은 분이

내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선한 일을 하려는데 네가 날 도와주지 않겠니?

같이 손잡고 세상을 위해 노력해 보지 않을래? 네가 필요한데 좀 도와줘.”

한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고 흥감하게 그 일을 하겠는가?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돕겠는가?

그런데, 나는 인간이 아닌 우리 인간을 창조한 어버이신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싫어요. 싫어요하면서 도망을 갔구나.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이렇게 기막힐 수가! 이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그러니까 나는 어버이신님을 제대로 믿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만드신 신님을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고 대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런 자신의 교만과 속마음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그랬구나, 내가.....'

터전에서 여러 날 어버이신님께 참회를 했다.

앞으로는 신님이 내밀어주신 손을 잡고, 기쁘고 흔감하게 영광스럽게 즐겁게 나아가리라 작정하게 되었다. 서로 도와 즐겁게 살아가는 감로대 세상을 위해 나를 쓰시겠다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가.

 

그것을 브랜드가 없는 종교라고 싫어하고, 무시하면서 그저 도망갈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터전에서 다시 마음을 세우고, 중심을 잡았다.

정말로 신님이 바라시는 용재, 자발적으로 신님의 일을 하고, 자율적으로 신님 일을 보는 용재가 되었다. 기꺼이 흔쾌하고 즐겁게, 그리고 감사하게, 제대로 이 길을 걷겠노라 작정하였다.

지난 십여 년의 포교는, 하기 싫어 울며불며하는 포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마지못해 포교’, 신님이 점찍어둔 인연이라 할 수 없어서 했던 억지 포교를 했던 것이다. 그 괴로운 포교생활을 벗어 던지고, 즐거운 신앙, 행복한 신앙, 기쁜 신앙으로 나아갔다.

나는 거듭났다.

죽을 만큼 괴롭고 고통스런 시간을 지나고 다시 제대로 된 용재, 즐겁고 기꺼이 하는 신앙으로, 신님이 바라시는 감로대 세상을 향해 기꺼이 열정을 바치는 용재가 된 것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이 울며불며 포교’ ‘마지못해 포교’ ‘억지로 포교를 하고 있다. ‘울며불며 신앙’, ‘마지 못해 신앙’ ‘할 수 없어서 억지로 하는 신앙을 이어가는 용재, 신자들이 많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그런 듯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진실로 즐거운 신앙, 마음성인하는 신앙, 행복한 신앙을 전하는 용재가 되고자 염원하며 걸어간다. 내 억지 포교의 경험을 나누며 신님이 바라시는 그런 즐거운 신앙으로 이끌고 싶어 노력하고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어버이신님께서는 내게 즐거운 신앙으로 이끌라는 사명을 주시려고 그렇게 낭떠러지에서 날 밀었나 보다. 죽을 것 같은 힘든 시간을 지나도록 단련시켰나 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다 어버이신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스케쥴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용재들, 그리고 세상 사람들 누구에게나 이런 신님의 이끄심, 즐거운 삶을 위한 스케쥴이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