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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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109

 

 

기약없는 수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수호

 

박지수

 

 

딱 필요한 만큼 수호

상급교회 월차제 전날 밤, 잠자리에 들었다가 ! 리금 챙겨야지!!’하는 생각이 나서 일어났다. 우리는 어쩌다가 돈이 생기면 리금 넣어두는 서랍 속 봉투에 일정액을 먼저 떼어 넣어 둔다. 그런데 이번 달에는 없네. 우짜노? ㅠㅠ

지갑을 뒤져봐도 천원 몇 장이 들어있는데, 이를 어쩐다? 리금도 필요하지만, 오늘 가시는 손님 차비도 드려야 한다. 근데 수중에 돈이 없다. 그때 떠오른 생각이 음덕함을 열어 봐야지, 음덕함에 혹시나 있지 않을까?’였다. 불안 반, 기대 반으로 두근두근하며 음덕함을 열었다.

봉투가 하나, 그리고 5만 원권 하나. ~!!!

신전 상단 신님 앞에 그것을 잠시 올렸다가 봉투를 열어 보니, 지금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딱 그 금액이 들어있다. 마음이 확 밝아진다.

어버이신님 보고 계셨던 거예요? 이렇게 세심히 보살펴 주시는군요! 어찌 이리 딱 맞춰 주십니까!!”

언제는 내가 맞춰 주지 않던?”

맞습니다. 늘 맞춰 주셨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님 수호에 감사하면서 편히 잘 자고 일어났는데 어젯밤 생각이 난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흐뭇하고 기쁘고 즐겁다.

 

포교사의 숙명

그러고 보니 포교사의 숙명이 이런 것이구나 싶다.

기약 없는 수호라고 할 수 있는 신님의 수호에 기대어 의지하며 살아간다. 신님의 수호란 것이 인간 생각이 스며들면 기약 없는 수호이고, 한없는 기다림이지 않은가. 얼마만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물론 때때로 신님의 메시지, 신호, 언질을 받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알기 어렵다. 그렇게 기약할 수 없는 수호에 기대어 포교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여간 굳센 마음이 아니면 견디기 참으로 어렵다. 막연한 믿음으로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교사들의 삶이, 일반인의 눈으로 볼 때는 굉장히 불안정하고, 불안하고, 속수무책의 기다림 연속이니 걱정이 많겠다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기약이 없으니까 지출 계획을 세울 수 없고, 정해진 날짜에 나가야 하는 전기, 수도, 전화세, 각종 공과금을 제때 낼 수 있을지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자녀가 있다면 그런 부담은 몇 배나 커진다. 나가야 할 세금들이나 생활비는 꼬박꼬박 정해진 날짜에 나가야 하는데, 신님의 수호는 정해진 날짜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수호가 나서 돈이 들어온다 해도 거의 일회성이지, 계속 연결해서 매달 들어오기는 쉽지 않다. 물론 인연이나 덕, 그릇에 따라서는 그런 수호도 있긴 하지만.... 나가야 할 지출은 일정하게 반복되는데, 수호는 일정하게 반복되지 않고, 그 실천이나 덕, 정성에 따라 들쑥날쑥하다. 그래서 때로는 다음은 없다!’ 하는 비장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일일생애라는 말이 그토록 실감 나기도 한다. 내일을 미리 걱정해서는 안 되며, 내일은 내일의 수호가 있음을 믿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신님께 매달린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으로 견딜 수 없어지니까. 그렇기에 포교사들의 삶이란 (인간 생각으로 볼 때) 한없이 불안정하고 불안한 바탕 위에 놓여 있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신님께서는 정문유운에서 신이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 성진실한 마음에 나타내 보여 주시는 신님의 수호, 효능이 신이다.’ 하셨다. 믿고 바치는 그 정성에 보여 주는 수호의 모습이 신이라고 하셨던가. 얼마나 애매모호한 표현인가. ‘네 마음에 따라 있다고 믿으면 있고, 없다고 믿으면 없다!’라니.... 이런 신님을 믿고 따르라고?

그러나 우리 포교사, 이 길의 용재들은 그것을 믿고 따라간다.

 

인간과 세상을 지켜주는 항상성

십전수호의리, 으뜸인 리를 읽어보면 어버이신님의 큰 수호인 항상성을 알게 된다. 그 항상성이야말로 우리 생명을 유지하는 기본 전제가 되고 이 세상이 유지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신의 섭리이다.

 

항상성이란 생물체가 내부 환경을 최적화 상태로 유지하는 자율적인 조절작용이다. 생명체가 여러 가지 환경 변화나 스트레스에 대응하여 내부를 일정하게 유지하려 하는 조절과정 또는 그 상태를 항상성이라고 한다.

항상성의 예로 체온 조절, 삼투압 조절, 혈당량 조절 등을 들 수 있는데, 생명체의 기능이 효율적으로 일어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체온, pH, 삼투압 등 생화학 성분을 포함해 다른 체내 환경이 항상 어떤 범위 안에서 유지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조절하는 과정이 항상성 유지이다. 만약 항상성이 깨지면 그 생명체는 병이 생기거나 죽음에 이르게 된다. -[다음 백과 항상성]

 

몸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섭리로 11초도 쉬지 않고 숨을 넣어 주고 내어주는 일과 대자연의 법칙에도 작용하여 변함없는 대자연의 섭리를 베풀어서 먹고사는 일에 지장이 없도록 수호해 주시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대자연에도 항상성을 바탕으로 계절이 바뀌어 다시 돌아오고, 만물들이 자란다. 그런 대자연의 섭리, 신님의 수호에 의해 우리들의 삶이 영위되고 유지되어 가고 지켜진다.

그것은 신앙한다고 지켜주시고, 신앙하지 않는다고 수호해 주지 않는다는 그런 쪼잔하고 속 좁은 신님이 아니다. 신님께서는 신앙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모든 사람 모두가 내 자녀라 하신다.

 

당장은 두려운 듯하나 두려운 가운데 좋은 일이 있다. 물이 든다. 산이 무너진다. 큰비야 큰비, 갈 곳은 없지만 뒤는 말끔해진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한다, 마음만 단단히 갖고 있으면 활동해 주마....

반대하는 사람도 귀여운 내 자녀, 신앙하는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신앙하는 사람도 지켜 행하지 않으면 반대하는 것과 같은 것... 결코 낙심할 것은 없다, 낙심하지 말고 마음을 이어라 이어라.... 어떠한 일도 지켜보고 있으니 지켜 보고 있으니... (1896. 4. 21)

 

모름지기 신이 그래야지, 신앙만 한다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며 천국으로 데려가고, 단지 그 종교를 신앙하지 않는다고 지옥으로 보낸다면 그건 신앙을 매개로 하여 사람을 홀리는 사기꾼이지 어디 신이겠는가.

 

무한한 어버이신님의 수호

이렇게 생각을 확장해 보면 신님의 수호란 얼마나 정확하고 엄정한 것인지 놀랍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볼 때마다 경이롭고, 감사하다. 새벽마다 밝아오는 아침이 경이롭고, 해가 동쪽 산에서 떠올라 서쪽 바다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 경이롭다. 물론 요즘은 하도 인간들이 신님의 몸인 대자연을 훼손하여 조금씩 문제가 생기고 있어 걱정이지만... 어버이신님의 수호, 대자연의 운행을 보면 저토록 정확하다 못해 엄정한 것을!!! 그러나 작은 인간의 시각으로 보면 얼마나 또 기약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참으로 놀랍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신님의 수호만큼 믿음직하고 정확한 것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 정확하고 믿음직한 것의 전제가 있다. 신의 뜻에 맞을 것! 그 신의 뜻이란 인간 창조의 목적에 맞닿아 있다. ‘서로 도와 모두가 즐겁게 살아갈 것!’이란 대명제 말이다. 그 뜻에 맞게 살아간다면 신님의 수호는 무한히 계속되며, 그 넓이와 깊이가 무한대이다. 신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풍요와 무한한 수호를 내려 주시지만, 우리 마음 그릇이 작거나 뒤엎어져 있다면 그것을 온전하게 받지 못하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과 머리를 세상을 향해 신님을 향해 활짝 열어놓는다면 일상으로 넘치는 수호 받지 못할 게 없다.

그것은 양자물리학에서 증명된 것이기도 하고, 정확한 팩트로써 사실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믿고 행할 만큼 수호의 경험이 축적되지 않았거나, 의심이 많기에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고, 믿을 수가 없기에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행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님께서 무한히 베풀어 주고 계시는 수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교조 모본대로 바르게 걷는가

그렇기에 결론은 늘 내가 교조 모본에 따라 용재로서 바르게 살아가는가, 신님의 가르침에 따라 용재의 사명을 다하는 것에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무한한 수호를 늘 받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중간에 신님의 신임을 얻는 기간, 마음을 만들고, 내 그릇을 만드는 시간과 용재로 사명을 다하기 위한 담금질, 훈련 기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까지 따라오라 수확량이 정하여졌다’(신악가 1장 아홉, )는 말씀처럼 신님께서 정해놓은 여기까지라는 그 기간들을 잘 견디어 내고, 나날이 맑히고 성장하여 마음성인을 이루어간다면 신님의 수호도 틀림없는 것 아닌가.

 

윌일의 현신이 되신 지 24~5

우리가 포교를 나온 지 만25년이 지났다. 이 정도 포교를 하고 나니 확실히 믿는 것이 있다. 어버이신님을 100% 믿고, 신의 뜻에 따르면 100% 수호를 받을 것이고, 50% 믿으면 50%의 수호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믿음만큼 수호를 받고, 의지하는 만큼 수호를 받는다. 이것은 당연한 우주의 이치고, 천리이자, 만고불변의 신의 이치라는 것이다.

교조 모본을 보면 교조님께서 월일이 현신이 되신 지 한참이 흐른 뒤 비로소 신자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고, 길이 열렸다. 그리고 간난신고의 삶에서 조금씩 서서히 벗어나게 된 시기가 24~5년이다. 우리의 포교 생활도 그쯤 흐르고 나니 마음이나 물질에 조금씩은 여유가 생기고 안정도 되어가는 듯하다.

교조 모본을 금과옥조로 믿고 따르는 포교사들, 용재들의 삶도 그 정도 세월을 견디고 버티어내어야 하나 보다. 울며불며 마지못해서 하는 게 아니라 기꺼이 견디고 버티어내면서 말이다. 그러는 사이에 자신의 악인연을 털고, 구제할 마음을 만든다. 그리고 어버이신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믿음과 자신을 맡기고 바치는 신에 의탁하는 마음을 깊게 새긴다. 그렇게 한 단계씩 마음성인을 이루는 용재로 거듭난다. 그리하여 차츰차츰, 조금 조금씩, 모든 사람의 즐거운 삶이 나의 즐거운 삶이 되고, 나의 즐거운 삶이 모든 사람의 즐거운 삶이 되게 한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자유자재한 삶, 자유자재한 수호가 아닌가.

어제도 그런 길을 걸어왔고, 오늘도 그 확실한 길을 걷고 있으며, 내일도 그 즐거운 삶을 향한 길을 걸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