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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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107

 

 

있는 것을 사랑하는 행복한 사람

 

 

박지수

 

엄마 방에서

얼마 전에 온 동생이 엄마 방에 티브이가 낮네. 좀 높여야겠다.”고 혼잣말처럼 하는 소릴 들었다. 노치원에 가시는 일 외는 주로 누워서 티브이를 보는 엄마다. 그렇게 누워서 티브이를 보니 티브이가 좀 낮아서 고개를 옆으로 조금 돌려서 보게 된다. 그런데 나는 티브이가 낮다는 생각을 전혀 못 했다. 동생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티브이가 매우 낮네. 엄마가 참 불편했구나싶어 놀랬다.

 

엄마가 오시고 나서 2년째 접어든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엄마 입장이 되어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그리 대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만고 내 착각이었구나. 엄마가 누워서 티브이를 보기에 몹시 불편한 데도 나는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네.’ 싶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어 얼굴이 붉어지기까지 한다.

동생 가족들이 떠나고, 남동생이 남긴 말을 들은 남편이

"역시 아들이네. 보는 눈이 달라. 그러니 보이는 것이 다르지. 그래서 아들이 엄마를 위해 더 좋게 해 드릴 수 있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닐까. 당신이 다 하면 아들은 무엇으로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겠어? 아들이 보는 것이 다르고, 딸이 보는 것이 다르니 얼마나 좋아? 아들 딸이 서로 엄마를 위해 잘할 수 있는 것이 다르니까 아들도 마음이 좋고, 딸도 마음이 좋고, 엄마도 마음이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지. 괜히 자괴감에 빠진다는 건 불행을 선택하는 것이고, 자책하는 어리석은 거야.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골고루 필요한 것이지."

, 정말 그렇네요. 나는 긍정과 행복을 늘 선택한다고 하면서 또 어느새 내가 못 한 것에 집중했네요.” 하면서 시중님한테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는 바로 적당한 받침대를 찾아서 티브이 높이를 높였다. 그 사진을 찍어서 남동생한테 보냈다.

빠른 민원 처리에 감사합니다.~^^ 벽걸이 브래킷을 사서 달까 생각했는데라고 남동생이 답을 보내왔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서로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고마움에 하늘의 혜택이

어느 분이 오늘은 좋은 일도 있었지만 안 좋은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 안 좋은 일 때문에 마음이 울적했다고 한다. 사연을 들어보니 멀리 사는 딸이 반찬을 만들어서 택배로 보냈단다. 그래서 좋긴 했는데 평소에 전화하면 잘 받지 않는다. 딸이 전화도 받으면 그 좋은 일이 100%인데 전화를 안 받으니 좋은 일이라 해도 별로 좋지가 않다. 오히려 이런 사정이 서글퍼서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 마음이 공감되긴 했지만, 마음의 방향을 돌리면 더 행복해질 것 같아서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3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지요. 첫 번째, 딸이 반찬도 안 보내고, 연락도 안 받는 것, 두 번째, 전화는 안 받지만, 아버지 생각해서 반찬을 만들어 보낸 것, 세 번째는 반찬도 보내고, 전화도 잘 받는 3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제일 안 좋은 상황일 테고, 그다음은 한 가지는 좋고, 한 가지는 안 좋은 경우, 세 번째는 둘 다 좋은 경우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2번째, 반은 좋고 반은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럴 땐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요? 신님은 어떻게 생각하길 바라실까요? 지도말씀에

 

마음으로 고마워하는 리를 받아들인다. 고마움에 하늘의 혜택이 있는 거야.

(1902.7.20)

라고 하셨습니다.

반찬을 해서 보내 주다니. 참 고맙다. 혼자 있는 내가 걱정되어 마음을 써 주었구나. 참 감사하다.’ 하고 그 딸의 마음을 고맙게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반찬을 해 주면 뭐 하나? 전화도 안 받는데... 그러려면 반찬도 보내지 말지. 반찬을 보내니 전화를 안 받는다는 사실이 생각나서 더 서글프다.” 하고 섭섭해하고, 침울해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버이신님은 마음 그대로 수호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섭섭하고 침울한 아버지 마음이 따님에게 비춰져서 반찬을 해 보내려는 마음조차도 없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애써 아버지한테 반찬 해서 보내면 뭐 하나? 보낸다고 아버지가 더 속상하고 서글퍼 하시는데.... 차라리 그냥 말자.’라고 마음먹게 되지 않을까요?

 

아버지를 생각하는 딸의 그 마음은 고맙게 받고, 또 전화를 안 받는 그 마음도 헤아려 주는 마음을 갖고 기원하고, 축원하다 보면 어느새 따님과도 충분히 소통되는 수호를 받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따님에게도 부모님께 효도라는 큰 덕이 쌓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따님이 전화를 안 받을 뿐만 아니라, 반찬을 만들어 보내는 일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아니었습니까? 이제, 어버이신님의 수호로 반찬을 만들어 보낼 정도로 마음이 열렸는데, 그 감사는 어디로 갖다 버리셨습니까? 지금 상황은 좋은 쪽으로 점점 수호를 받고 계신 모습이 아닌가요? 그런데 오히려, 전화를 안 받는다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겨, 불평 불만하며 침울해하시네요. 좋은 것을 나쁘게 만드는 이런 침울한 마음을 어버이신님께서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실까요?

행복한 사람은 있는 것을 사랑하고, 불행한 사람은 없는 것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그 침울한 마음은 없는 것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 마음을 바꿔서 있는 것을 사랑하는 행복한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잘 알았습니다. 마음을 밝게 가지고 행복을 선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둡던 얼굴이 밝아지며 힘 있는 목소리로 화답하신다.

 

행복이란 마음가짐에 따라

우리는 곧잘 행복을 선택한다고들 말하지만 없는 것에 집중하여 불행을 선택하는 일이 훨씬 많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게 길이 난 상태로 습관으로 굳어져 있기에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그리 돼 버린다. 그러면서 자신이 왜 불행한가? 왜 일이 풀리지 않는가? 원망한다.

행복이란 선택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불행할지, 행복할지는 상황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태도가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행복한 사람들이 있고, 남이 보기에도 애로가 없는 상황인데도 불행한 얼굴을 한 사람들도 많다. 그 차이는 단 하나, ‘내가 지금 가진 것을 사랑하느냐, 가지지 못한 것을 원하느냐이다.

행복의 크기는 내가 가진 것보다는 바라는 것의 크기에 좌우된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바라는 것이 더 많다면 불행하다. 아무리 가진 것이 적더라도 그것에 만족하고 바라는 것이 많지 않다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그래서 천리교 교전(敎典) 7장 대물차물에서는

사람의 행복은 그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인생의 고락은 외양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각자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결정된다.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여, 나날이 즐겁게 용솟음치며 사는 것이 신앙의 길이다. (69p)

라고 하신 것이다.

나날이 살아가는 삶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에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누리고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잘 할 수 있는 일인가, 못하는 일인가. 나는 과연 있는 것을 사랑하는 행복한 사람인가, 아니면 없는 것에 집착하는 불행한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