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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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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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102

 

교조님은 무료하실까?

 

박지수

 

얼마 전 어느 용재 선생이 말씀하셨다.

"지금은 터전 귀참을 못하니 교조님이 무료하시겠다~."

"그래요? 무료하실까요?“

"그렇게 많이 찾아가던 사람들이 못 가니 얼마나 무료하시겠어요?“

"정말 교조님이 무료하실까요? 존명의 교조님이?“

".....“

교조님께서 언제나처럼 우리 인간들을 구제하시고자 바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존명의 교조님은 우리처럼 인간 몸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시니 아무런 시간, 공간의 제약이 없으시죠. 그래서 어쩌면 더 바쁘시지 않을까요?

세계적 코로나 사태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원드리고, 매달리고 수훈을 전하며 교조님을 부르겠어요? 수훈이야말로 존명의 교조님께서 구제 활동해 주시는 모습이자 증거이지 않습니까? 지금 교조님은 자녀인 인간들이 너무나 안타깝고 걱정스러워서 구제를 위해 더 바쁘게 활동하실 것 같아요.

 

저도 매일 교조님을 뵈러 갑니다. 물론 마음으로요. 한번이 아니라 하루에도 여러 번, 수십 번 갈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으로 찾아오는 자녀들을 맞이하는 교조님께서 과연 무료하실 틈이 있을까요?

실제 몸으로 갈 수 없으니까 마음으로나마 더욱 간절히 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존명의 교조님은 그런 자녀들의 마음을 다 맞이하고 받아주시는 분이시니 어떻게 무료할 틈이 있겠어요. 인간이라면 사람들이 오지 않으니 무료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교조님은 인간이 아닙니다. 존명하신 교조님이시니까 언제 어디서든 교조님을 부르면 다 달려가시지 않을까요?

 

교조전일화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아마도 선생님처럼 교조님께서 무료하실 것 같이 생각하셨던 선배 선생님이 계셨나 봅니다.

 

<고본 천리교교조전일화편 76. 한창 핀 모란꽃>

이즈쓰 다네가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이즈쓰 우메지로는 교조님께서 언제나 단 위에 가만히 앉아 계시므로, 무료하실 것 같아서 어디든 모시고 갈 생각으로 무료하지 않으십니까?”라고 여쭙자, 교조님께서는

여기를 잠깐 들여다보렴.”

라며 당신의 한쪽 소매를 내미셨다. 그래서 우메지로가 그 소매 안을 들여다보자 온통 눈에 보이는 것은 한창 곱게 핀 모란꽃이었다. 마침 그때는 모란꽃이 피는 계절이었으므로, 우메지로는 교조님께서는 어디에 있는 것이라도 자유자재로 보실 수 있구나!’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본 천리교교조전일화편 88. 위험한 고비에서>

1881년 늦가을의 일이었다. 도사 우노스케(土佐卯之助)는 배가 오사카 항에 닻을 내린 그날, 홋카이도(北海道) 오쿠시리(奧尻) 섬 부근에서 조난의 위기로부터 구제받은 데 대해 사례를 드리러 터전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감로대에 참배하여 어버이신님께 사례를 드리면서 앞으로의 굳은 신앙을 맹세했다.

너무나 기뻐서 집터의 선배들에게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한 선배가 이야기를 가로막으며, “여보게, 그건 몇 월 며칠 몇 시쯤의 일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날을 계산해 보니, 바로 조난당한 그 시각이었다. 그 선배의 이야기는 그날 교조님께서는 거실의 북쪽 미닫이를 여시고, 근행의 부채를 펴들고 서서 북쪽을 향해, 한동안

-, -

하며 누군가를 부르고 계셨다네. 그래서 왜 저러실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야기를 들으니 과연 수긍이 가는구먼.”라고 하는 것이었다. 도사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감격해, 교조님께로 나아가 죽을 목숨을 구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이마가 닿도록 인사를 드렸다. 그 목소리는 떨리고 눈은 눈물에 가려 교조님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교조님께서는

위험한 고비에서 데려 온 거야.”

라고 인자로운 목소리로 위로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때 도사는 오랫동안의 선원생활을 청산하고, 마침내 구제한줄기로 나아갈 마음을 작정했던 것이다.

 

<고본 천리교교조전일화편 94. 때맞춰 차를>

어느 날, 다치바나 젠키치(立花善吉)는 그 당시엔 누구나가 그랬듯이 오사카에서 걸어서 터전으로 돌아왔다. 들을 지나 산을 넘고, 또 들을 지나 백 리 길을 걸어서 간신히 니카이도 마을까지 왔다. 이제 한고비만 넘기면 된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힘이 솟아, 걸으면서 장기인 민요 한가락을 스스로도 도취할 만큼 능숙하게 불렀다. 그리고 집터에 가까워지자 노래를 그치고 길을 재촉해 이내 도착했다. 그리하여 교조님을 뵙자, 교조님께서는 다치바나를 보시자마자

젠키치 씨, 좋은 목소리였어. 자네가 돌아오기에 때맞춰 차를 끓여 두었네.”

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다치바나는 몸에 소름이 끼칠 만큼 놀라는 한편, 고맙고도 기쁜 나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고본 천리교교조전일화편 97 담배밭>

어느 때 교조님께서는 이즈미 지방에서 온 무라카미 고자부로에게

환영(幻影)을 보여 줄까?”

라며 입고 계시던 붉은 옷의 소매 안을 보라고 하셨다. 고자부로는 분부대로 소매 안을 들여다봤더니, 거기에는 자기 집 담배밭에 푸르고 싱싱한 담뱃잎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고자부로는 집터에서 자기 마을로 돌아가자 곧 담배밭에 가 보았다. 그랬더니 담뱃잎은 교조님의 소매 안에서 본 것과 똑같이 싱싱하고 무성했다. 그것을 보고 고자부로는 안도와 감사의 마음이 복받쳐 무의식 중에 땅에 꿇어 엎드렸다.

생각건대 고자부로는 구제에 전념한 나머지 논밭 일은 전적으로 머슴한테 맡겨 두었다. 그 머슴은 열심히 담배 농사를 지어 무성하게 자란 모양을 한 번 봐 달라고 했지만, 고자부로는 구제에 정진하느라고 한 번도 보러 갈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관심이 없을 수는 없어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담배밭이 걱정이었다. 그런 가운데 터전에 돌아와 예의 환영을 본 것이었다. 고자부로는 어버이신님의 자유자재한 섭리와 자녀들을 귀여워해 주시는 어버이마음에 새삼 깊이 감격했다.

교조님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보면,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 터전에 나르는 발길이 뜸하면 당연히 무료하거나 심심할 거라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 예로 든 일화편처럼 교조님께서는 우리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까지 보고 들으시면서 언제나 구제의 손길을 뻗치고 계십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존명으로 계시기에 더욱더 시간과 공간을 다 초월하여 활동하고 계십니다. 세계 어디나 가시고, 언제나 계시는 것이지요.

이런 교조 존명의 리는 이길 신앙의 토대가 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에서는 교조전 옆에 교조 존명의 리라는 붓글씨를 걸어두기도 하는 것이겠죠.

인간을 창조한 이 어버이는

존명으로 있다 이것이 진실이야 8-37

우리가 교조님을 생각하며 부르는 바로 그 순간, 내 곁으로 오시는 교조님!

참 든든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