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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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년08월][101회]몸살 예찬

2020.07.31 17:11

편집실 조회 수:117

명경지수 101

 

몸살 예찬

 

박지수

 

온몸이 아프지 않은 데 없이 쑤시고 아프면서 가라앉고 방바닥이 자꾸 부르는 증상, 몸살이 왔다. 감기 기운도 조금 있는 듯하다. 여름이 다가오니 툭하면 더워서 땀이 주르르 흐르고, 선풍기를 켜면 오히려 추워지고, 끄면 더워서 켜고를 반복한다.

, 내 몸! 도대체 어쩌라고~!!!”

이렇게 예전보다 잦아진 몸살을 느끼고, 몸이 아파오는 내 나이는 50대 중반, 완경기를 지나고 있다. 이 시기에는 그전보다 체력이 50% 이상 떨어진다고 들었다. 주변에 비슷한 연배 사람들도 자주 아프고, 몸이 무겁고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자신을 원망해야 할 것이니라

몸살이 나면 자신에게 무심코 뭐 했다고 몸살이야?’ 하고 툭 던지게 된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나 상대방에게 잘 던지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 놓고는 나는 자신에게 사과한다.

아냐, 미안하다. 몸살 나도록 실컷 부려먹고는 구박해서 미안해. 공연히 아무 일 없는 데 몸살 하진 않지. 뭐라도 열심히 했으니 몸살 나는 거지, 몸살 나도록 몸을 끌고 다녀놓고 몸을 나무라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내 몸, 수고했어. 이제 쉬라고 몸살이 나는 거야. 그래, 애썼어. 토닥토닥.”

소리 내어 자신에게 위로한다.

그런데 전날 뭐 했더라? 요즘 뭐하고 지냈지? 뭐 힘든 일이 있었나? 스트레스 받는 일이나 특별히 신경 쓴 일이 있었던가? 혹시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었나?’

남 일처럼 물으면서 차근차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신악가 10장 일곱에 고생을 하는 것도 마음속에서 자신을 원망해야 할 것이니라고 노래한다. 신상 사정으로 고생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잘못 썼기 때문이니 자신에게 그 원인을 찾고, 남 탓을 하지 말고, 자신을 원망하라는 것이다.

이 부분을 노래할 때는 그래, 당연해, 자신을 원망해야지. 내 잘못이야, 누굴 원망하겠어?’ 하며 자신을 원망하다가도 슬며시 억울한 생각도 한 번씩 든다. 자신을 원망하다 보니 우울해져서 마음이 더욱 가라앉기도 한다.

아니야, 신님께서 자녀들이 침울해지라고 이 구절을 일러 주신 게 아닐 텐데. 그럼 뭘까?’ 혼자 생각해 본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자세

과거를 되돌아보는 자세에는 2가지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부정, 비관적으로 과거를 되돌아보는 관점이다. 후회와 원망, 자책과 죄책감으로 보는 것이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마음으로 결론은 자기비하나 자기연민, 혹은 자신을 구박하고 무시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그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잘못했구나. 내 탓이야. 나는 왜 그 모양일까. 나는 왜 그렇게밖에 못했을까. 정말 나는 구제 불능이야, 못난이구나. 등신 같네. 에이그, 이 바보 같은 인간아. 그래서 뭘 해 먹고 살겠어? 정말 한심하다. 내가 하는 짓이라곤 늘 그렇지. 잘하는 거라곤 도무지 없네. 용재가 이래서 되겠어? 부끄럽다.’ 대충 이런 식이다.

두 번째는 반성은 하되 후회나 자책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자세이다. 미래에 더 중점을 두고 미래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관점이다. 후회로 과거를 바꿀 수 없고, 비난으로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참회했다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해 노력하는 자세이다. ‘그런 것이 잘못되었구나.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지? 비싼 수업료를 치렀네. 다음부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구나.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 결과로 이어질까? 잘못할 수 있는 게 인간이지, 그렇게 배우는 거니까 괜찮아. 앞으로 그 실수에서 배웠으니 똑같은 실수는 안 하도록 해야지.’ 이렇게 자신을 격려하고 실수한 자신에게서 배우며 앞으로 나아간다.

 

많은 경우 첫 번째 태도에서 머물러 자신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일이 많다. 나 역시 그렇게 해서 울적하던 시간이 많았다. 특히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신악가 10일곱에를 부르면, 확인사살처럼 자책으로 더욱 침울해지는 자신을 보았다.

이건 아닌데. 신님의 의도는 네 잘못이야, 그러니까 넌 우울해야 돼. 이건 아니잖아. 그럼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신님의 참 의도는 무엇일까?’

깊이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런 숙고 끝에 깨달음처럼 두 번째 받아들이는 태도를 알게 되었다. ‘반성은 하되, 후회는 하지 않는다. 되돌아보되, 자책은 하지 않는다. 잘못은 사과하고 그것을 내려놓는다. 그 실수나 잘못한 경험에서 배우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였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많이들 하고 많이 듣지만 딱 그런 상황에 부딪혔을 때 자신에게 적용해 나가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실수에서 배우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실천을 거듭하다 보면, 어느새 훌쩍 성장하고 성인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마음도 용솟음치게 된다.

이것이 10장 일곱에가 뜻하는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님은 말씀이 없으시고, 용재인 우리는 교조님께서 가르쳐 주신 근행과 가르침의 실천을 통해 깊이 생각하고 깊이 깨우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몸살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한다

몸살은 이렇게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한다. 마음으로 욕심내어 내달려 몸을 무리하게 부린 것은 아닌지, 단노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은 것은 없는지 마음을 살피게 만든다.

몸살이란 몸이 살기 위해 일어나는 현상, 몸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신님께 빌려 받은 차물인 몸이, 유일한 내 것인 마음을 잘못 쓰고 있다고 알려주면서 스스로 바로 잡아가려는 정화작용이 몸살이다.

그렇다면 몸살은 어버이신님의 자애로운 손길이고 수호의 모습인 것이다. 몸살이 없다면 사람들은 끝없는 욕심으로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달릴 게 뻔하다. 그렇게 달리다가 과로사하기 십상이지 않는가.

 

몸살은 과속 벌금스티커

어느 때, 교구 가면서 월차제 근행시간을 맞추느라 평소보다 급하게 달렸다. 곳곳에 과속단속 카메라가 있으니 마음이 불안하다. “이러다 과속 벌금 스티커 받겠는데?” 말하다가 문득 몸살이 속도를 위반하여 받게 되는 과속스티커 같구나 싶었다. ‘몸살은 신님이 몸을 통해 보여주시는 과속 위반 스티커,’ , 속도위반을 단속하는 수단이 몸살이라는 것이다. 과속스티커도 몸살도 따져 보면 속도를 조절하라, 규정 속도를 지켜라.’는 것 아닌가. 규정 속도로 안전하게 자동차를 몰아가듯이 일상의 일들과 삶에서도 주변을 살피며 마음의 속도를 조절하라는 것이다.

그러니 (감기)몸살은 신님이 주시는 과속스티커! 마음의 속도를 너무 빼지 말라, 지나친 욕심을 내어 위험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허용하는 속도만큼 안전하게 살라는 것이지.

더 잘하고 싶고, 더 이루고 싶고, 더 빨리하고 싶다. 그래서 인정받고, 칭찬받고, 존중받고 싶지만, 그 욕심을 내려놓고 속도를 조절하라! 삶이라는 도로에서 말 그대로 과속하지 말고, 적정한 속도를 유지하라! 이것이 몸살이다. 이 경고를 무시하지 말라.

감기몸살과 과속스티커는 나타나는 모습은 전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몸살은 역량을 키우는 기회

한편 몸살은 평소에 하지 않던 일, 안 썼던 근육을 썼을 때 몸살이 오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체력이나 역량 위에 조금 더한 결과로써 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내게 10이라는 힘이 있는데 11이나 12의 힘을 써야 하는 상황이 하루가 아니라 이틀, 사흘 계속되면 몸살이 나게 된다. 무리가 되기 때문에 적응하거나 조절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몸살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요가 교실을 할 때 늘 하는 이야기가 요가 몸살이다. 안 하던 운동을 시작하면 얼마 가지 않아 대부분은 몸살이 난다. 그동안 전혀 쓰지 않았던 근육을 사용하면서 생기는 몸의 반응들이다. 굳은 곳이 풀려 부드러워지고 좋아지려고 몸살이 나는 것은 호전 반응 중 하나인 셈이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몸살을 통해 체력, 역량을 키워 더 건강해지는 기회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 몸의 근력을 붙이는 운동을 할 때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에서 조금 더해야 그때부터 근력이 키워진다고 한다. 적당히 살살하면 근력이 키워지지 않는 것이다. 11이나 12의 힘을 내는 일을 시도하여 몸살을 하다 보면 서서히 몸이 적응하고 어느새 11이나 12의 일은 일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몸에 근력이 붙은 것이다.

마음의 역량이나 그릇 역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커지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몸살은 성장의 필연적 과정인 셈이다.

그래서 교조님께서는 일한 위에 조금 더 조금 더 하면서 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정성이야.”라고 하셨을까. 물론 기쁘게 히노끼싱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한다면 몸살은 없겠지. 하지만 우리네 일상은 그렇지 못할 때가 훨씬 많다. 그래서 찾아오는 게 몸살이다.

 

몸살을 하면서 아프고 괴롭기는 하지만 수훈을 받고 몸과 마음을 되돌아보고 보살피다 보면 몸살을 예찬하게 된다. 조금씩 마음이 밝아지고, 어느새 몸살이 물러간다.

이번 몸살은 교회보 원고 글감 만들어 주려고 온 것인가?

아이고, 몸살~ 감사합니다.

몸살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