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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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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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회 기초교리강좌 입교175.12.19

 

 

교조님의 숨결 1

-일화편을 중심으로

 

박용매(저산포교소)

 

여러분은 교조님의 숨결이라는 이 제목을 보면서 맨 먼저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강의를 준비하면서 일화편을 심층 분석하면서 3번을 읽었고, 관련 자료들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교조 일화편, 교조전, 혹은 선인들의 이야기, 고설선집, 본석님의 생애같은 여러자료를 읽으면서 느끼지는 교조님의 숨결에선 시종일관 따스하고 자애롭고 밝은 어버이마음이 느껴집니다. 교조님은 어느 한구석에서도 우릴 나무라거나 혼내키시는 곳이 없습니다. 오히려 무안할까봐 말씀을 안 하시는 편이지요. 어느 분은 천리교는 어른이 되게 만드는 종교라고 하더군요. 저는 어버이 마음이 되는 걸 가르치는 종교라고 하고 싶습니다. 기독교에서 사랑을 불교에서 자비를 말하듯 이길에서는 어버이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교조님, 나의 어버이.

교조님은 천리교를 여신 분이시고, 우리 모두의 교조님이지만 바르게 깨닫고 걸어가기 위해서는 나의 교조님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교조님은 특별한 혼의 인연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모본의 길을 가실 수 있었지만, 범인인 우리들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도 더러 계십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이길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다. 교조님은 나의 교조님, 내 부모님, 어버이, 이런 실감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교조일화편을 읽고 있으면 교조님이 정말로 어버이구나. 인자하고 따뜻한 내 어버이구나.’하는 실감이 납니다. 그래서 일화편의 내용들이 교조님이 나에게 직접 지금 일러주시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겁니다. 그래서 ‘104. 신님에 대한 신앙은 말이지, 신님을 육친의 부모처럼 대해야 해요. 그렇게 하면 진짜 신앙이 되는 거예요.’라고 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일화편 197일할 손은에도 그런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집터에 있는 사람도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밤낮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하며 신경을 쓴다. 자신의 일이라 생각해서 하기 때문에 자신의 일이 된다. 이곳을 제집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일이라 여기면서 하면 제 집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강의나 감화를 듣던지 그래, 저건 내 이야기야,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하고 마음에 새길 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고, 자신의 깨달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조님을 육친의 부모처럼 대하지 않고 특별히 거룩하고 신성한 존재로만 대하는 것은 교조모본을 내가 가까이하기엔 너무 힘든 것, 즉 나와 별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조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을까를 먼저 걸어서 보여 주신 분입니다. 이길이라면 곧 교조님 모본으로 통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이세상과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즐기시려는 어버이신님의 가르침을 믿고 있으니, 당연히 가르침대로 먼저 보여주신 교조님 모본을 따라 가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이 100% 교조님처럼 걸을 수는 없음을 생각하셨는지 열 가운데 두 셋만 걸으면 나머지는 어버이신님께서 받아들여 주신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지요. 모본을 그대로 따라 걸을 자신이 없는데 안 걸을 수도 없고 할 때 이런 말씀은 구세주인 거지요.

 

2. 교조님의 모본- 내가 가야할 길

제가 나름대로 인연을 자각하고 16년 전에 이길을 걷겠다고 작정을 하고 돌아와서 별석을 받을 때 이야깁니다. 오후 2시 직전에 들은 별석말씀엔 친필 145수부터 50수까지가 나옵니다.

그 내용이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고 많이 인용하시는 구절들입니다.

모든 시대 온 세상을 살펴보면 인간이 가는 길도 가지각색이야 1-45

앞으로는 길에 비유해서 말한다 누구 일이라고 새삼 말하지 않아 1-46

산언덕 가시밭 낭떠러지 비탈길도 칼날 같은 험한 길도 헤쳐 나가면 1-47

아직도 보이는 불속 깊은 물속을 그것을 지나가면 좁은 길이 보이느니 1-48

좁은 길을 차츰차츰 넘어가면 큰길이야 이것이 확실한 본길이니라 1-49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구절은

이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닌 만큼 신한줄기로서 이것은 자신의 일이야 1-50

45수가 나오면 눈물이 나기 시작하여 50수에 이르면 마구 눈물이 넘쳐 흘렀습니다.

마침 그 부분이 끝나면 교조님 은신하신 시간, 해금으로 연주하는 팔수의 애잔한 선율이 흘러나오곤 했습니다. 그 팔수를 들으며 눈물을 훔치곤 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이 분명히 보았던 것이지요. 신한줄기로서 걷고자 한다면 원하던 원치 않던 내가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 내 앞길이라 확 다가오니 눈물이 났던 거 같습니다.

 

 

3. 모본의 종류

- 따라야 할 모본, 따라서는 안 되는 모본

* 교조님의 입장 3가지 다 아시죠?

월일의 현신으로서 리를 밝히신 모본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굉장히 엄격하고 냉정한 느낌입니다. 리를 세우고 밝히는 것이므로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리와 정을 이야기할 때 리를 차갑고, 냉정하고, 원리원칙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리와 정의 조화, 리를 세우는 모본... 리를 세우는 데 있어서 엄격함, 자기에게 적용할 때 엄격함입니다. 월일의 현신은 교조님이지만 우리는 신이 아니다. 신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가끔씩 혹은 어떤 분은 자주 신같은 행동이 하시는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보는 신같이 다른 사람이나 신자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태도는 우리 모두가 정말로 삼가야 할 것이다. 이부분은 나중에 다시 설명합니다.

모본의 어버이로서 교조님의 모본이 있습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교조모본을 따른다고 하고, 교조님의 어버이마음을 따른다고 할 때 이 모본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조 일화편에 대부분이 이런 모본의 이야기입니다.

존명의 교조님입니다. 존명으로 활동하시는 교조님의 모본은 주로 은신 후에 수훈의 효능으로 나타나고, 이길이 발전해 나가는 양상으로 보여집니다. 교조일화편에도 -도사 우노스케선생님의 이야기인 위험한 고비에서 같은 부분-물론 존명의 교조님 활동이라 할 만한 이야기들이 나오긴 해도 약간 다른 이야기라고 느껴집니다. 존명의 교조님은 우리가 믿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신념에 문제입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이 세 가지를 모두 다 교조님 모본이라고 합니다. 교조일화편이나 교조전이나 여러 가지 교리나 교의서에는 이 3가지 입장들이 뒤섞여서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분간해야 할 것은 그런 가운데 우리가 따라야 할 모본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혹은 따라서는 안 되는 모본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분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이길을 애초의 어버이신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제대로 밝게 걸어갈 수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이중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본은 2번 모본의 어버이입니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월일의 현신도, 존명의 교조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교조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구요. 리는 내가 신님쪽으로 세우는 것, 정은 내가 주변이나 상대를 나누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것을 구별해야 되듯이 모본에서도 자녀로서 따라야 할 모본도 있고 신의 현신으로 보여주신 모본도 있습니다.

교조님이 입으로 붓으로 모본으로 걸어가야 할 모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이렇게 지내라고 보여주신 모본이 남아있지요. 또 한편으로는 어버이신님 입장에서 엄연한 리의 세계를 보여주시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도 모본으로서의 일화로 남아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두 종류의 일화를 혼돈하지 않아야 합니다. 더 간단히,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본이란 그대로 따라하지 않으면 안되는 모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본에 그런 구별이 있는 가? 모본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오셨다면 의아하시겠지만..

구체적으로는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138 물건을 소중히

이 일화가 시사하는 것은 내다버릴 물건이라도 최후에 최후까지 살려 쓰는 중요함입니다.

이 모본은 현대인이라면 특히 따라야 할 모본입니다. 어버이신님으로부터 혜택을 받은 감사함을 살려서 쓰는 참고의 예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용재로서 당연히 그래야 할 자세를 가르쳐 주신 일화라고 생각합니다.

129. 진옴의 구제. 이마가와 세이지로의 장녀 야쓰 진옴에 걸렸다. 진옴이라서 고름이 있었다. 정말로 신기로운 신님이야, 교조님께서 그 더러운 고름이 나는 진옴을 손에 침을 발라 쓰다듬어 주셨다. 야쓰는 이러한 교조님의 어버이마음에 감격해서 용재로서 열심히 구제활동을 했습니다. 160. 감고르기 같은 일화입니다. 이것들은 문장 그대로 나오는 것처럼 용재로서 일을 하게 된 참고로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버이마음 넘치는 본받아야 할 모본이죠.

 

그런데 다음 일화를 봅시다.

8. 정성어린 헌공 이 일화는 교회보에 얼마전에 연재한 교동화에도 나옵니다. 이 일화는 우리가 모방해야 할 교조님 일화일까요? 만약 그렇게 해석한다면 조금 터무니없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가령 신자들이 가져온 헌공물을 교만한 마음으로 가져왔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회장이나 사모, 혹은 용재가 가 , 그래,’ 하고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게 받아도 될까요? 이 신자는 당장 부족을 살 것입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된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을 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교조님은 다음 사람이 가져온 헌공물은 곧 어버이신님께 올려라고 매우 기뻐하시면서 받습니다. 이런 태도의 차이를 가져도 될까요? 이것을 처음의 그 사람의 입장으로 본다면 편애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어떤 사람이라도 우리들은 신님께로 이끌고 연결해야 하는 것이 용재입니다. 하물며 교만한 마음이지만 헌공물을 가져온 사람이라도 절대로 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맡겨진 신자는 어버이신님이 내 인연에 맞춰서 보내준 사람임이 틀림없지 않습니까? 이러한 티끌의 마음을 쓰기 쉬운 사람을 어버이신님은 일부러 우리 교회에 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도 영혼 말대로 이어가면서 조금씩 본래의 진실이 깨어날 수 있도록 이끄는 그 교회에 이어진 용재의 임무일 것입니다. 언젠가 마음의 진실을 낼 수 있도록, 성인될 수 있도록 큰 마음으로 안아서 지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우리는 남의 정성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라는 게 아닌 것이죠. 물론 교조님은 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신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월일의 현신으로 교조님께서는 어버이신님께 헌공할 때는 이와 같이 성진실한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점을 우리들이 깨우쳐 주셨다고 생각하는 게 바른 깨달음이 아닐까 합니다.

다른 일화 148. 깨끗한 곳에서 에서는 어떤가요?-

신이 잘랐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어떤 악인이라도, 죽어버린 사람에 대해서 우리들이 신이 잘라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린 흔히 어떤 사람의 신상이나 출직에 대해서, 마디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기가 십상입니다.

이 두 가지 일화는 따를 수 없는 모본의 예를 보여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두가지는 어버이신님의 엄격한 의지와 엄한 리를 이해시키려고 보여주시는 예로서 남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화를 보고 우리도 남이 수호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면 어떻게 될까요? 저 집은 저런 마음을 써서 수호를 못받았다. 출직했다. 교만하니 저렇게 신상이 왔다, 마디가 왔다, 사정이 왔다, 하는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 교조님은 이 일화에서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일까요? 우리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험담입니다. 주제넘는 짓이지요. 그런 것은 신님만이 아시는 일이지 않습니까?

다달이 한번, 서로 마음고치기와 이야기 나누기(1897.6.3.)’ 라는 지도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지내고 있고 어떤 실천을 하여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그래서 다시 마음을 고쳐서 나아간다는 의미이지, 남의 이야기를 한다던지 해선 안 됩니다. 자신이 어려운 점을 이야기해서 마음의 주름을 펴기도 하는 것이지요. ‘숨어서 하는 이야기는 옳은 것 없다, 누구누구 할 것 없이 그대로 당장 깨우쳐 주어라, 숨어서 하는 이야기는 티끌을 쌓는 토대라고 깨우쳐 준다. 1893.12.6.지도말씀에서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의 모본을 통해서 우리들은 물질이나 돈이 아니라 마음을 신님은 받아들여주시는 것이라고 배울 수 있고, 신님의 길을 멈추게 하는 것에 대한 이런 정도의 엄한 유감을 가지신다는 것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해서 읽지 않으면 메시지가 왜곡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알게 모르는 가운데 수호받지 못하는 것은 저 사람이 그러한 마음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을 합니다. 구제하는 사람으로서 진실이 모자람을 선반위에 올려놓고 구제 상대를 꾸짖는 마음을 쓰는 경우가 있다. 저 사람은 교만하기 때문에 수호가 없어,. 저 사람은 신님으로부터 보면 유감한 사람이기에 수호를 받지 못해, 교조일화편에도 있잖아? 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부분을 분간하지 못한 증거이다. 수호를 받을 때 상대의 진실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에, 그리고 수호를 받지 못했을 때는 자신의 진실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도움받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가져야 할 마음이다. 그런데 수호는 자신의 공, 구제받지 못하는 것은 상대탓, 이런 사람은 주위에 얼마나 많을까요? 이것에 대해 교조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6. 자녀의 성인

교조님께서는 자녀가 모르는 것이 아니야. 어버이의 가르침이 미치지 못한 거야. 어버이의 가르침이 구석구석까지 미친다면 올바르게 성인된 자녀의 모습을 보게 되겠지. 라고 되풀이하여 들려 주셨다. 덕택으로 알지 못한 사람도 알게 되고, 구제받기 힘든 사람도 구제받게 되며, 고생하는 사람도 고생하지 않게 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교조일화편에는 힘겨루기내용이 10편 나오는데 힘겨루기 부분은 월일의 현신이라는 리를 형태로 보여주신 예여서 우리가 따라할 수도 없고, 따라해서도 안 되는 모본이지요. 한편 환영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것 역시 우리가 따라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잠깐 여담을 하자면

천리교를 왜 싫어하는지를 조사했답니다. 그 내용을 보자면...

뭐든지 신의 뜻이라고 갖다 붙히면서 말하는 태도, 신님 의도라며 마음대로 자기뜻을 강요하며 몰아붙이는 것-자기가 신인가?

덕이 없니, 인연이 지중하다며 꾸짖고 책망하는 소리.

무조건 위만 맞추라.-끊임없이 이바지하라. 이 세 가지가 신앙의 바탕이자 중요한 실천이지만 충분히 납득을 시키고 이해를 시키지 못해서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앞서 읽어드린 일화처럼 부모의 가르침이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못해서 이런 일들이 생기죠. 억지로 마구잡이로 몰아서 시키는 데 누군들 싫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좋은 거면 엄마나 해라, 하겠죠?

 

 

4. 일화편에서 배우는 신앙자세

1) 밝게 깨닫기

-단노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

일화편 21. 좋아좋아. 야마나카 추시치에게.

자아자아, 좋아 좋아, 바다 밑바닥까지 떠내려갔으니 장차는 좋을 거야. 신앙을 하고 있는데 왜 전답도 산도 떠내려가느냐고 생각하겠지만, 단노하라, 단노하라, 장차는 두고두고 좋을 거야.

일화편 133. 앞을 길게, 야마나카 다메조오에게

앞을 짧게 생각하면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앞을 길게 생각하면 서두를 필요가 없다. 빠른 것이 빠른 게 아니다. 늦은 것이 늦은 게 아니다. 단노는 정성

일화편 144. 하늘에 닿는 리

아무리 괴로운 일이나 싫은 일이라도 고맙게 여기면서 하면 하늘에 닿는 리가 된다.또 신님이 받아주시는 리는 고맙게 되돌아 온다. 그러나 아무리 고달픈 일. 힘든 일을 하더라도 아. 괴롭다. . 싫다 라고 불평을 해서는 하늘에 닿는 리도 불평으로 되는 거야일화편 184. 깨닫는 방법, 우메타니 시로베, 둘째 딸 미치에가 죽었다고 하자, 교조님 말씀 그것은 고마운 일이구나.’ ‘큰애가 아니어서 다행이구나.’ 대난은 소난이 되었다는 의미

일화편 187. 터전 하나에.

모로이 구니사브로 선생님이 넷째 딸을 세 살 때 잃고 너무 슬퍼하면서 교조님께 뭔가 틀린 점이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여쭈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아자아, 어린아이, 세 살도 한평생, 평생 세 살 아이와 같은 마음, 터전 하나에 마음을 기울여라. 터전 하나에 마음을 기울이면 사방으로 뿌리가 뻗는다. 사방에 뿌리가 뻗으면 한쪽이 떠내려가도 세 쪽이 남는다. 두 쪽이 떠내려가도 두 쪽이 남는다. 굵은 싹이 트는 거야.’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일화편 199. 한 살이야. 혼다 세이선생님 이야기입니다. 6좌 근행, 33야기원근행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라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세이씨, 당신 그런 배를 안고 있으면 괴롭겠지. 그러나 금생에서 쌓은 티끌이 아니야. 전전생에서부터 지고 나온 거야. 신님께서 반드시 구제해 주실 거야. 마음이 변해서는 안 돼.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결코 이 끈을 놓아서는 안 돼. 전전생 일은 아무것도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기원하면서 신님께 사례를 드리면 되는 거야.’

그리고 교조전에 나오는 세상에는 머리맡에 먹을 것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도 먹으려야 먹을 수 없고,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고맙잖아. 물을 마시면 물맛이 난다. 어버이신님께서 고맙게 보살펴 주고 계시는 거야.”

라고 타이르시고, 또 야마무라고뗑 마디 때에도 출두를 하다가

교조님께서는 도중에 다베(田部) 마을의 구루마가에시(車返)란 곳에서 갑자기 발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아랫입술을 다치셨습니다. 그때 그것을 보고 불안해하는 일행들에게, 교조님께서는 밑에서 위로 오르는 조짐이야.”라고 하시며,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은신하시던 해 188711(음력 128) 저녁 무렵, 교조님께서는 목욕탕에서 나오다가 갑자기 몸을 비틀거리셨습니다. 즉시 여쭈어 본즉,

이것은 세계가 움직이는 징조야.”라고 하셨습니다.

 

교조님 재세시에 말씀하신 내용을 모아둔 교조님 말씀에 보면

단노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나옵니다.

1. 1875.11.20.

이길은 남에게 시키는 길이 아니야, 각자 각자 한 사람 한사람이 스스로 움직여 해 나가는 길이기 때문에 남이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사람은 자기가 뭔가를 하면 남에게도 시키고 싶어 하지만 아무리 남에게 시키려고 생각해서 시켜보아도 아무것도 안 된다. 본인 스스로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되도록 해 다오.

2. 1875.11.23.

사람은 싫은 것을 보면 곧장 싫다고 생각하고 싫은 얘기를 들으면 싫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안 된다. 그때의 마음 씀씀이가 중요한 것이다. 싫은 것을 보고 싫은 일을 당하였을 때, 싫다고 생각하기 전에 아, 보여서 다행이다, 장님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감사하다. 좋다 고 생각하며 지내는 거야. 싫은 얘기를 들었을 때에도 마찬가지, 언제 어느 때든 이와 같은 마음으로 지내다오. 그런 마음 씀씀이가 자유자재의 수호를 받는 길이 되는 거야. 어려운 것은 없어. 신상 사정으로 고민하고 괴로워할 때, 빌려 받은 것이라는 것을 당장 마음에 떠올리지 않으면 안돼. 빌린 것이라는 리, 마음에 새긴다면 어떠한 가운데서도 도와주신다. 빌린 것이라는 것은 항상 빌려 쓰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하루하루를 감사하다, 좋다하고 생각하며 지내는 거야. 그 마음이라면 어떤 위태로운 가운데서도 대난은 소난, 소난은 무난으로 지내게 해 주신다.

3. 1877.7.5.저녁 무렵

신님이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이 양기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함게 즐기려는 의도에서 인간세계를 창조하셨던 거야. 그러므로 인간은 하루하루를 지내는 데 신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으면 안돼. 신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하는 것은 말이지, 우선 빌려 쓰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잘 새기는 거야. 그래서 진실한 마음이 되어서 부모의 마음에 맞춰 행하는 거야. 그것이 신님이 제일 기뻐해 주시는 길인 거야. 그 마음으로 나날이 지내다오.

1880.9.12.

진실한 마음으로 빌린 것이라는 것을 단단히 마음에 새겨 감사하다. 좋다고 생각해서 밝은 마음으로 지내다오, 신님이 반드시 수호해 주신다.

 

 

2) 용솟음치는 마음으로 이길을 걷는다.-마음을 살려서 걷는다.

-- 지도말씀과 친필에서

지도말씀에서는 

자아자아 모두 모여서, 나날이 마음이 용솟음치면 신도 용솟음친다.(1888.9.30)

사람이 용솟음치면 신도 용솟음친다고 한다. 1889.3.17

이길을 진심으로 용솟음친다면 신도 용솟음친다. 1899.10.18

 인간이 용솟음치는 마음이 신을 용솟음치게 한다고 깨우치셨다.

무엇 때문에 용솟음치는 가에 대해서는

즐겁게 해야만 신이 용솟음친다.1890.6.17

 라고 가르쳐 주셨다.

용솟음치는 인간의 마음은 신을 용솟음치게 하고, 이것이

천연자연 마음 용솟음친다면 몸도 용솟음친다고 한다.1890.9.29

  라며 차물인 몸에도

용솟음치며 시작하면 신도 용솟음친다.

신이 용솟음치면 어디까지나 세계 용솟음치게 한다.1907.5.30

 라며 세계까지 미친다고 깨우치시고, 나아가

만사 만사 순서 용솟음치면 용솟음치는 리가 돌아온다. 1898.11.27

 라며 용솟음치는 것이 순환되어 증폭된다고 가르쳐 주셨다.

일화편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중 76

 

친필에서

* 용솟음친다(친필- 49)

* 즐거움(친필)

 

어떻게 하면 용솟음칠 수 있을까?

교조님께서 일화편에 일러주신 이야기를 보면 마음이 방향, 생각의 방향을 바꾸라고 하신 것입니다. 단노하라는 것이지요.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밝게 깨달아라 는 것입니다. 보고 진실(만족), 듣고 진실(만족 혹은 단노), 참으로 진실(만족), 본진실(만족)으로 마음을 쓸 것인가? 보고 부족, 듣고 부족, 생각해서부족이란 쪽으로 마음을 쓰고 깨달을 것인가?

2. 우리들의 어버이이신 신님의 의도를 깨닫고 그것에 맞추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앞의 이야기와도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고설선집에서 이 분이 어느 교회에 순교를 갔는데 교회분위기가 영 침울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어버이신님이 안 계신다.”고 단언하셨답니다. 왜냐하면 용솟음치지 않고 침울하기 때문입니다. 어버이신님이 계신다면 용솟음칠 수 밖에 없고, 신님 뜻에 맞게 걷고 있다면 용솟음치지 않을 수 없지요. 그 용솟음치는 마음이 결국 온갖 자유자재한 수호를 받는 바탕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그런 침울한 분위기라는 것은 결국 신님이 떠나시고 안 계신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교회, 포교소에 신님이 계실지? 안 계실지!

 

보충설명을 하자면 고설선집 제 5134-136p 

 

1. 인간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어버이신님의 마음과 다르기 때문이다

2. 그 마음이 용솟음치게 되면 용솟음치는 만큼 어버이신님의 마음에 맞춘 증거가 된다.  따라서 참회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서 저절로 용솟음치 솟아나올 때까지  

3. 부모, 즉 어버이신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해서라도,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저절로 마음이 용솟음치게 된다.

3. 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 의심하는 것이 섭섭하고 노여워하신다.

 

이길을 걷는 사람은 어버이신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면 그것이 설령 인간의 입장에 비추어 무리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무리라 생각지 말고 말씀대로 움직여

어버이신님께서 즐거워하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시시비비를 떠나 어버이신님의 말씀대로 나아갔을 때, 어버이신님께서 용솟음쳐 주시고, 또 자신도 용솟음치며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잠시 여담..^^

부처는 원래 깨달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깨달았다면 뭘 깨달은 걸까요? 신의뜻, 우주, 대자연의 섭리, 세상의 이치 이런 것을 깨달은 자라는 의미이죠. 예수님은 자신을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죠. 신의 아들,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하셨습니다. 교조님은요? 신의 현신이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만약 집안에 하인이 주인의 뜻을 깨달아서 아는 것, 집안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과 마음을 아는 것, 아버지 자신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아는 것... 과연 누가 아버지의 뜻을 마음을 가장 잘 알까요? 그야 당연히 아버지, 자신이겠죠.

우리의 신앙은 그렇게 신님, 자신이 직접 내신 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의 가르침은 없다, 구극의 가르침이고 하신 것입니다.

 

* 단노하는 방법

1. 액땜(전생빚) 갚았다.

2. 행복한 미래를 위해 좋은 인연을 만드는 저축

3. 그 시간, 노력, 혹은 돈으로 나쁜 인연을 짓지 않는 것

 

결론

배움에는 3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1단계; 읽거나 듣는다.-거의 잊어버립니다. 2단계: 읽고 듣은 것을 쓰거나 말한다.-기억한다고 합니다. 3단계: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 본다.-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교조모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역시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읽거나 듣고, 그것을 수시로 생각하고 말하여 들려주고,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여 많이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준비하였습니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이렇게 좋고, 훌륭한 가르침을 왜 사람들은 깊이 뿌리 파헤쳐 공부할 생각을 안하는 지 정말 안타까왔습니다. 친필에 뿌리 파헤칠 준비 왜 아니하나?라고 안타까와 하신 뜻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들도 더 많이 이길의 뿌리를 파헤쳐서, 정말로 훌륭한 이길의 가르침이 더 널리 퍼져서 세상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 간절합니다.

좌충우돌, 횡설수설이 많았는데 잘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참고자료:

1. 교조전일화편

2. 고본 천리교 교조전

3. 고설선집 5권

4. 일화편에서 배운다

6. 양기

7. 선구자가 간다.

8.선인들의 이야기

9.본석님의 생애

10.교조님 말씀

11.지도말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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