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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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회 기초교리 강좌 175.6.19

 

왜 지구상에는 아직까지도 악한 것이 살아남아 있을까?

 

남상우(구만교회장)

 

제목이 조금은 생뚱맞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기초교리강좌 강의주제는 왜 지구상에는 아직까지도 악한 것이 살아남아 있는 것일까?”입니다. 수많은 종교가 악의 종식을 부르짖으며 앞 다투어 기도 기원을 드리고 있음에도 지구별에는 왜 아직도 악한 것이 사라지고 있지 않는 것일까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는 세 살 아이들도 다 아는 세상이라지만, 한 가지 사실을 놓고서도 선과 악에 대해 정작 사람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져 국가간의 전쟁으로까지 확대되기도 합니다. 이에 저의 기초교리 강좌의 첫 주제를 ()’으로 정했습니다. 아무쪼록 즐겁게 들어주었으면 합니다.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강의를 우스갯소리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주제인 악과 어쩌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식인종이야기입니다.

점심 때가 되자, 아빠 식인종이 아들식인종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들아, 밥 때가 됐는데 뭐하고 있노?” 하는 이야기에 효자 아들 식인종은 두말도 안하고 쏜살처럼 나가더니 아빠의 점심식사거리로 쭈~욱 빠진 여자를 잡아왔습니다. 식사거리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더니 아버지 식인종은 아들 식인종에게 , 너무 말라서 먹을 게 별로 없을 것 같으니 다른 여잘 없니?”하고 다시 시켰습니다. 아들은 두 말도 안하고 하며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새로운 여자를 사냥해 왔습니다. 잡아온 여자를 보니 조금 전 하고는 너무나 다른 뚱뚱보였습니다. 그걸 본 아버지 왈 지방이 너무 많아서 건강에 나쁘니 다시 다른 여자를 잡아오너라.”라고 다시 시켰습니다.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 식인종은 이번에도 역시 빛의 속도로 달려 나가서는 금새 또 다른 여자를 잡아왔습니다. 나가더니 이번에야말로 쭉쭉 빵빵, 한마디로 죽이는 여자를 잡아왔습니다. 아버지 왈 잠시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주위를 한번 빙 둘러보고서는 아들을 불러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아들아, 이 여자를 우리집에 데려다놓고 너희 엄마를 잡아먹는 게 어떻겠니?”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엄숙한 기초교리강좌시간에 왜 식인종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했는가 하면 아무리 식인종이라지만 사람이 살기 위한 수단으로 만일 사람을 먹었다고 한다면 그것도 과연 악이 될까요?”하는 의문에서입니다. 여러분 과연 사람을 주식으로 한다는 식인종은 악일까요? 헷갈린다고요. 머리 꽤나 복잡할 겁니다. 그럼 이 이야기는 또 어떻습니까?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45명의 승객을 태운 비행기가 안데스 산맥근처에서 강한 폭풍을 만나 추락을 했는데, 45명의 승객 중 12명이 바로 그 자리에서 즉사를 했습니다. 조난사실을 알고서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공군비행기가 생존자 주위에 나타나긴 했지만,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33명의 생존자들은 영하 30도를 웃도는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어 내며 언제 올지도 모르는 구조대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차츰 먹을거리는 동이 나고 그들은 여기서 그냥 굶어 죽든지, 아니면 집단 자살을 하든지, 아니면 살기 위해서 죽은 동료들의 시체라도 먹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그들은 모여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삼일 굶으면 담 뛰어넘지 않는 놈 없다고 우여곡절 끝에 시체를 먹기로 모두들 합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들 머뭇거렸지만, 그 중 용감한 한 사람이 모범(?)을 보이자 모두들 시체의 넓적다리에서 살을 뜯어내 불에다 굽기 시작했습니다.

시체는 매일 쌓여 갔으므로 먹을 것은 충분했습니다만, 그렇다고 마냥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세 명이 선발되어 구원요청을 위해 안데스 산을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한지 꼬박 72일 만에 10여일을 걸어 내려간 선발대 덕분에 45명 중 겨우 16명이 구조되었습니다. 16명의 생존자들은 영웅대접을 받았지만, 생존자들은 구조된 후에도 하나같이 사람을 먹었다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사람을 먹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세상사람들로부터 무차별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때 생존자 중 한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또 내게 사람을 먹어야 하는 극한상황이 오더라도 지금과 같은 대응을 할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실화는 나중에 얼라이브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인육을 먹는다는 것에 대한 여러분들의 선악의 판정은 어떻습니까? 인육을 먹는 식인종은 악이지만 똑같은 인육을 먹는다 하지만 문명인에게는 선이라는 선악의 이중 잣대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럼 당신의 선악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서 다를 수 있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언제든지 선이 악이 되기도 하고 악이 선이 되기도 하는 아주 애매모호한 것입니까?

 

그럼 조금 더 쉬운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선과 악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늑대와 양이야기입니다. 알다시피 늑대는 양을 먹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늑대 동네에서는 양을 죽이는 것이 훌륭하고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요. 늑대부부도 먹고 살아야 하고, 새끼들도 잘 키워야 하니까요. 그러나 양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죽고 싶지 않습니다. 반대로 양의 동네에서는 늑대가 하는 짓이 늑대를 갈아 마셔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만큼의 아주 나쁜 일이지요. 왜냐? 부모와 형제자매를 죽인 원수일 뿐만 아니라, 양에게도 처자식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도 당연히 살고 싶으니까요.

하루는 늑대가 양에게 달달한 이야기를 합니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어? 너희들은 천국으로 갈 거야. 넌 죽어서도 정말 좋은 일을 하는 거야. 극락왕생할 거야. 아마도 다음 생에는 늑대로 태어날 테니 우리를 원망 마.” 하지만 양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늑대에게 속삭입니다. “자기들 배불리기 위해 다른 동물을 죽이는 건 나쁜 짓이야. 자기가 힘이 세다고 힘 약한 우리들에게 그 힘을 쓰는 건 정말 힘센 자가 해서는 안 되는 아주 악한 짓이야.”라고.

 

이처럼 늑대에게는 좋은 일, 즉 선이 양에게는 나쁜 일, 즉 악일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야기가 이쯤 되면 선과 악이 마구 뒤섞여 헷갈리기 시작할 겁니다. 그럼 또 이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타인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나쁜 일, 즉 악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만, 고대 스파르타시대 때는 용기와 용맹을 키우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에 도둑질을 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미대륙을 호령했던 인디언들도 마찬가집니다. 인디언 부모들은 자식이 이웃부족에게서 훔쳐온 활과 화살을 보고서는 대견해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도둑질에 성공했다며 주위친척들을 불러모아놓고는 잔치를 벌이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어떻습니까? 부모님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질 수 있는 아주 싸가지 없는 짓이지요. 더구나 사회체제에 따라서도 선악의 기준이 달랐습니다. 자본주의체제에서는 부잣집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만, 어떤 사회주의국가에서는 부자 집에 태어난 인간은 그것만으로도 악이라며 인민재판에 회부되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또 어떻습니까? 사내아이들에게 어릴 적 꿈 한 가지씩 적어내라고 하면 반드시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투명인간입니다. 투명인간이 되면 보통 때라면 틀림없이 못할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고, 때로는 나쁜 짓이라 여겼던 일들도 서슴없이 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건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쁜 일을 못하는 것이란 뜻이겠지요. 다른 사람들이 보니까요. 내가 나쁜 짓을 하는 걸 안다면 남들이 나를 나쁘다고 흉볼 테고 고발할 수도 있고 심한 경우는 벌까지도 줄 수 있지요. 그리고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따돌릴 수도 있구요. 그럼 우리는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면 언제나 나쁜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본래부터 나쁜 일을 저지르고 싶어 하는 걸까요?

 

19691017일 오전 8시부터 캐나다 경찰이 총파업을 했습니다. 파업 시작 3시간 여 만에 은행 강도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파업 4시간 만에 약탈 때문에 중심가의 상점들 대부분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택시운전사들이 공항손님들을 놓고 경쟁하던 공항 리무진버스 업체의 주차장을 불태웠으며, 폭도들이 호텔과 레스토랑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은행 여섯 곳이 더 털렸습니다. 시내 열 두 곳에서 방화가 일어났으며, 유명 백화점의 쇼윈도가 박살났습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경찰 집계 300만 달러 상당의 재산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우리에게 악한 것이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다람쥐의 쳇바퀴 같은 걸까요?

 

우리들은 대체로 신악가로 하루를 시작해서 마칠 때도 신악가로 끝을 맺습니다. 더구나 신악가의 첫 노래구절인 악한 것을 제거하고에서 악한 것1절에서만 21번 반복합니다. 그리고 2절에서도 그릇된 말은 아닐 것이니에서 1, 그러다가 다시 3절에서 악한 것9번을 반복합니다. 조석으로 수십 차례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보아서는 악한 것의 정체는 그렇다 하더라도 털어내기는 생각만큼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는 사실에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악한 것을 본교에서만 이야기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타 다른 종교에서도 악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각 종교에서 말하는 악한 것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불교입니다. 불가에서는 탐욕()과 증오()와 미망()이라는 세 가지 번뇌의 마음을 악의 근본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세 가지 번뇌의 마음의 소멸, 즉 깨달음을 선의 근본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탈(解脫)을 신앙의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기독교입니다. 최초의 선조가 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것이 악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신의 존재조건으로 악의 존재를 설정합니다. 선의 절대자를 긍정하려면 부정해야 할 존재로서의 악을 필요로 합니다. 종교가 선과 정의를 자처하는 한 선과 정의가 쳐부수고 승리하고 멸망시켜야 하는 어떤 악적 대상을 설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세에는 이슬람, 과학자들(코페니쿠스, 갈릴레오, 브루노 등), 이교도가 악이었고, 근대에 오면서 하늘나라에서의 행복보다는 이생에서의 행복, 즉 현실적 인간적 행복을 찾으려는 마르크스적 신념과 그 신봉자, 즉 공산주의자내지는 사회주의와 그 제도까지도 악의 축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적 원리에 따르면 악이 없는 인류사회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만일 악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내야 하는 것이 바로 악입니다. 종교 스스로가 마치 줄 끊어진 연처럼 되기 싫은 겁니다. 종교태생이 선이 아니라, 바로 악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이슬람교입니다. 이슬람교에서는 경건하지 못한 것이 악이라 합니다. 알라신을 경시해 계율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가 바로 악입니다.

 

다음은 이 길에서 말씀하는 악한 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수많은 종교의 교조들의 말씀은 긴 시간을 지나는 동안 화려하게 변질 부패 왜곡되어 왔습니다만, 교조님께서 손으로 직접 적으셨다는 친필은 아직까지는 그 신선도만을 따지고 볼 때, 다른 종교들의 수많은 경전과 비교해볼 때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본교는 결과로서 나타난 행위의 선악보다는, 그 행위를 낳게 한 동기나 의지가 되는 마음의 선악을 더 중요시합니다. 따라서 이 길에서는 선을 덕의 개념으로 풀어서 설명하려 애를 씁니다. 따라서 삼원전을 아무리 훑어보아도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의 말씀보다는 덕을 쌓아라!’는 말씀의 빈도수가 훨씬 더 많습니다. 아마도 인간은 악에서 완전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교리출발을 그렇게 하지 않았나 하는 나름의 조심스러운 교리해석을 해봅니다.

 

그리고 천리교 신앙은 교조님을 신의 현신이라 하고 있고 거기서부터 가르침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점에서는 예수를 신의 아들이라고 보는 기독교와 아주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뒤부터가 많이 다릅니다. 신의 현신이므로 교조님께서 말씀하신 것, 적으신 것은 천에 하나도 틀린 것이 없으므로 그것을 실천하면 모두가 구제받을 수 있다는 것이 다릅니다. 그 실행의 핵심이 바로 악한 것을 제거, 악한 것을 터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교에서는 속죄론이 없습니다. 게다가 원죄 같은 근본악도 없습니다. 대신 있다고 한다면 으뜸인 인연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라도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인류공통의 좋은 인연을 말합니다. 하지만 본교에서는 으뜸인 인연에서 어떻게 해서 티끌이 생겨났는지 등의 악의 기원의 문제에서는 매우 허술합니다. 한줄기마음이라는 으뜸인 인연은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퇴색되어 나갔는지 하는 악인연의 과정을 일반적인 설명내지는 추론으로 때우고 있는 실정입니다. 원전과 고오끼이야기 어디에도 정확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몇 번이나 환생을 거듭하는 속에서 자연적으로 틀린 마음을 쓴 것이 그렇게 되었다는 일반론적인 설명이 고작입니다. 이것만으로는 이론구성상 대단히 약한 구석이 있습니다. 연구개발이 시급한 교리분야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신악가의 손짓을 통해 악한 것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1절의 노랫말에서 악한 것의 손짓은 두 손을 모으는 합장손입니다. 합장손 자체가 악한 것을 뜻한다고는 생각하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왜냐하면 신악가의 각 장의 각 구절의 시작을 대체로 합장손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노랫말과 결부 짓기 보다는 합장손을 하나의 흐름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고 많은 교학자들이 주장합니다. 따라서 합장손은 신과 마주 대할 때 우리들이 행하는 최초의 행위이며, 그것은 대체로 기원의 형태를 취합니다. 따라서 합장손은 악한 것을에 해당하는 손짓이지만, 기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해석과는 조금은 달리합니다. 기원을 할 때 여느 종교를 보더라도 통일되게 합장손을 합니다. 따라서 합장손 손짓에서 생각해볼 때 인간의 바라는 마음이 바로 악한 것은 아닐까라는 깨달음을 최근 들어 해봅니다. 따라서 자신을 위한 바람을 마음에서 하루속히 지우는 자만이 이생에서 극락, 바로 자유자재의 즐거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봅니다.

 

이 강의를 준비하는 내내 저는 몇 가지 딜레마에 빠져 살았습니다. 먼저 절대선이란 진짜 있는 것일까?’ ‘그리고 진정 종교는 선을 지키는 파수꾼인가?’ 그리고 악의 종말이 곧 선의 완승을 뜻하는가?’ ‘인간은 악에서 완전 해방될 수 있는가?’ 하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그 해답을 저는 얼토당토않게 이웃에 사는 동수아버님과의 몇 마디 대화에서 구했습니다. 구만교회는 아시다시피 한적한 시골교회라 근처에 마트도 없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손님이 들이닥치면 집사람이 제일 곤란합니다. 그래서 소일거리 삼아 교회 뒤에 조그마한 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채소를 가꾸어 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교회 옆집의 동수아버님이 농사에 있어서만은 큰 선생님입니다. 하루는 땀을 뻘뻘 흘리며 농사초년병인 제가 텃밭을 가꾸고 있는데, 동수아버님께서 옆에 다가와서는 푸념 섞인 목소리로 저에게 물었습니다.

회장님, 쑥쑥 자라라고 매번 물주고 비료주고 거름하는 채소는 자라지 않고, 물도 주지도 않고 매번 농약 쳐서 죽이려고 애쓰는 잡초는 색깔별 종류별로 이렇게 무성하니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인간의 욕심 때문이 아닐까요?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탐욕 때문이죠. 잡초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밭 크기 안에서만 자라나니까요. 자기 밭의 경계를 넘어서 자라나는 잡초는 그냥 풀이고 자연이니까요. 우리는 그 누구도 그것을 잡초라 말하지 않습니다.”

 

조금은 생뚱맞은 답변이었을까요? 한동안 불편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악한 것은 나()라는 밭 안에서만 존재하는 잡초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를 벗어나 일어나는 악한 것은 자연내지는 자연의 일부일거라고 감히 단정 지어 봅니다. 따라서 내 것이 하나도 없는 자, 그리고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자만이 진정으로 악한 것에서 해방될 수 있고, 조금이나마 이생에서 악한 것을 털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주장해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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