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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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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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월차제 신전강화

 

신임 전도청장 인사

 

 

전도청장

 

반갑습니다.

오늘 고성교회 8월 월차제의 축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먼저 인사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726일 교조님 앞에서 한국전도청장의 허락을 받은 요시카와 마스히코라고 합니다. 15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 여기 저의 집사람을 소개합니다. 요시카와 야스코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18일 한국전도청 월차제에서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저희 부부는 20005월에 결혼했습니다. 결혼하고 약 3개월 후인 826일에 한국전도청 서기로 발령받아, 당시 서울에 있던 전도청에 부부가 함께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전도청은 서울의 한 아파트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2, 김해로 이전해서 5, 합하여 7년을 근무하게 됐습니다. 당시 집사람은 한국어는 물론 해외에 나간 일이 없어서 여권을 취득한 적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서울로 가서 2년간, 그리고 김해 전도청에 가서 5년을 함께 고생을 해주었습니다. 20094월에 일본으로 귀국한 후, 15년 만에 다시 한국에 오게 된 것입니다.

현재는 여러분들 덕분에 한국전도청장에 근무하게 된 것에 대해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많은 협조를 받아서 하게 된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고성교회장님 내외분, 전교회장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와서 가능한 한 빨리 고성교회에 참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초대 회장님 산소도 가고 싶었고, 고성교회로 이어지는 여러분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빨리 만나 뵙게 될 줄 몰랐는데,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다시 한번 사례 말씀을 드림과 동시에 여기서 배웠던 것을 중심으로 오늘의 말씀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경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4)

 

제가 처음으로 고성교회에 참배했던 것은 약 30년 전입니다. 그때는 학생이었습니다. 전석에서 고성교회장님께서 소개해 주셨듯이, 당시 대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였습니다. 고성교회에서는 그때 어린이 터전귀참을 향해서 고적대를 결성해서 그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회장님의 여동생분이신 은주 씨가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연습을 도와드리기 위해서 이곳에 처음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김포에서 사천공항으로 오는 국내선 비행기를 처음 탔습니다. 그 당시 고적대는 50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은주 씨도 열심히 지도했고 아이들도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렸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 중 하나는 식사가 아주 맛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제가 당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하숙집에서는 아침과 저녁만 줍니다. 일주일에 한 번 돼지고기 반찬, 계란 후라이가 나왔습니다. 고성교회에서는 처음 보는 한국 음식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갈비찜. 계란찜도 있었습니다. 생선도 많았습니다. 김치도 다양하게 있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김치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이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눈 추억입니다. 아이들은 열심히 연습을 했습니다. 놀 때도 열심히 놀았습니다. 휴식 시간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연습할 때는 열심히 연습을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뭔가 단순하게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뭔가 부모에서 자식으로 신앙을 이어받고 신앙하는 가운데 하나의 활동으로써 고적대 연습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터전귀참을 하는 것도 그저 일본에 간다.’ 하는 느낌이 아니라 , 터전에 가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연습을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역시 터전을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감명받았습니다.

어떤 아이에게 물어봤습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나요?” 하고요. 그 아이는 저희 아버지는요. 포교하고 있습니다. 포교하면서 유명합니다.” 하고 자랑을 하는 겁니다. 아버지가 포교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독포교라고 하면 아주 고생하는 시절 아니겠습니까. 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고생하는 시기입니다. 그 초등학생 아이가 그런 아버지를 자랑하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등학교라 하면 주변 친구들과 비교를 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포교하고 있다고 하면 틀림없이 고생을 하고 있었을 텐데 그것을 자랑하고 있었던 겁니다. 시종일관 웃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신앙의 근본을 배웠던 겁니다.

나중에 전도청 서기로 근무할 때 그 아이의 아버지를 알게 됐습니다. 그 아버님과 만나게 됐습니다. 그 말씀을 전해드렸더니, 그 당시가 특히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아주 힘들었던 시절인데 그 아이가 그렇게 웃으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 부모의 모습, 그 마음 하나를 보고 아이들이 느끼고 있던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도 저희 할아버지는 포교하고 있어요.”, “저희 할머니도 포교하고 있어요.” 하고 얘기를 했습니다.

저도 한국에서의 학생 시절에 서울, 마산, 진주 등 여기저기서 박자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신앙하는 모습을 보면서 직접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게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저는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 역사를 연구했습니다. 저의 전공은 개화 일제시대입니다. 장래에 한국 천리교의 교량적인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입장에서, 한국 천리교를 하시는 분과 터전을 이을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한국을 더 잘 알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원을 다녔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한일관계의 역사 흐름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배우면 배울수록, 한국에서 천리교 신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됐습니다.

저는 그때 박융자 전교회장님께 여쭤봤습니다. “한국에서 일본종교인 천리교를 신앙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하고요. 전회장님께서 그런 걱정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고성교회 인근의 사람들은 천리교에 대해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반감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지역 사람들에게 기쁨을 드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히노끼싱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에 히노끼싱의 본질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히노끼싱을 누구에게 해준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쁨을 드리는 것.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 못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말로는 간단한 것이지만 계속 이어서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실한 마음이 없어서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학생 시절에 크게 느꼈던 부분입니다. 얼마나 큰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이번에 한국에 15년 만에 왔습니다만, 전혀 변함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전도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와서 참배하고 12장 근행을 올리고 가는 분, 웃으면서 히노끼싱을 열심히 하시는 분 등은 옛날과 전혀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고성교회 여러분들께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변함없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신앙을 하고 계십니다. 고성교회의 기본방침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터전신앙이 근본에 배어있다는 것입니다. 서기 시절에 고등학생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프로그램에 인생 곡선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살아오면서 좋았던 일, 힘들었던 일을 곡선으로 그리고 소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연히 한 방에 들어갔는데 어느 여학생이 발표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인생에서 좋았던 일은 두 번 있습니다.” 하고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는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입니다. 고성교회 고적대에서 처음으로 터전에 갔을 때입니다. 두 번째는 중학교 3학년 때입니다. 중학생 히노끼싱대에서 터전에 갔을 때입니다.” 살아오면서 2번의 좋았던 때가 터전 귀참했을 때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당시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감명받았습니다. 가족 신앙이 잘 되어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소년회 활동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터전 귀참의 중요함도 느꼈습니다. 16년 전, 2008년에 한국단 고적대를 결성했고, 고성 고적대도 함께 터전 귀참을 하였습니다. 터전으로 돌아가서 처음으로 오야사토 퍼레이드에 참가했습니다. 그때 고적대를 심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대단히 열심히 했습니다. 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잘했습니다. 그때 아슬아슬하게 은상이었는데, 다음 해에는 금상을 타서 대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고적대 출신자 중에서 중학생 히노끼싱대, 고등학생 오야사토 세미나에 참가하는 사람이 많았고, TLI 그리고 오야사토 후세코미 과정까지 마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년회 활동이 아주 중요하고 교조님께서 마음의 표시를 해주시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TLI, 오야사토 후세코미 과정을 못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못 가는 학생도 역시 30대에 터전 귀참을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사람마다 신앙의 기점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못가기 때문에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이 되든 안 되든, 그것은 신님, 교조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진주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신앙 육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육성하는 것이 아니다. 육성하는 것은 끝까지 어버이신님, 교조님의 역할이다.”라고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버이신님, 교조님 곁으로 인도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말씀이 유달 제4호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손자에게 이어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의 착실한 발걸음이 장래 영원히 이어지는 길이 된다.”라고요.

이런 것들은 한국의 고성교회가 모범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소년회, 학생회, 오야사토 세미나, TLI 등에 참가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으로 말을 건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포기하지 마시고 말만이라도 이어줬으면 합니다. 어떤 TLI에 참가한 학생이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TLI, 오야사토 후세코미가 뭔지 몰랐다. 가기 싫었다. 하지만, 가서 체험해보고 터전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라고요.

별석을 받을 때 만났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처음에는 TLI가 무엇인지 몰라서 가기 싫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가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를 하고 있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터전이라는 곳에 대해서, 터전 신앙이 중요하고 앞으로도 계속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야기를 조금 바꿔 우리 가족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전도청이 김해로 처음 이사했을 때가 2002년이었습니다. 9월에 이사했는데, 7월에 저희 딸 마쓰미가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김해 전도청과 함께 자랐습니다. 큰아이 마쓰미, 둘째 도쿠에도 같이 고적대에 참가했습니다. 마쓰미는 현재 대학교 4학년입니다. 둘째 도쿠에는 대학교 1학년입니다. 셋째 딸, 아야노는 현재 중학교 1학년입니다. 첫째 마쓰미가 맡아준 덕분에 제가 한국에 올 수 있게 됐습니다. 현재 마쓰미, 도쿠에는 한국에 오고 싶어 합니다. 저희 부부를 부러워합니다. 왜냐하면, 한국 유치원을 다녔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배웠던 것을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딩동댕 유치원, 방귀대장 뿡뿡이, 뽀로로 등 여러 가지를 보고 재미있었던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고성교회 유치원도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와서 같이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의 여러분들에게 많은 관심과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949일에 일본에 귀국했는데, 그게 엊그제 같이 생각됩니다. 그리웠던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고 따뜻하게 맞이해준 데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도 지금도 변함없는 교회장님 내외분, 전교회장님 그리고 고성교회로 이어지는 교회장님들, 사모님들, 신자분들께 정말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는 매일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습니다. 아주 맛있습니다. 매일 무슨 음식이 나올까 기대하면서 식사하고 있습니다. , 식당이 아주 밝습니다. 전등 때문이 아니라 아주 밝은 분위기입니다. 거기에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주방장님이 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계신 교우님들의 진실한 모습이 저희 부부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를 매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는 특히 전도청에서는 근행과 수훈에 최선을 다해서 무엇보다 밝은 마음으로 터전의 리를 조금이나마 나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앞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익숙해질 때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앞으로도 고성교회에 이어지는 여러분들에게 많은 힘을 얻어서 열심히 노력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말씀드릴 부분은, 2개월 후인 109일에 전도청장 취임봉고제가 있습니다. 그날은 고성교회장님께서 앞서 말씀해 주신 바와 같이, 진주님 대신에 진주님 사모님, 진주님 후계 예정자이신 나카야마 다이스케님이 한국에 오십니다. 다이스케님께서는 처음으로 전도청에 참배하러 오십니다. 오시면서 진주님의 취임 축하 메시지를 대독해주십니다.

그에 앞서 한국 부인회 총회가 있습니다. 929일입니다. 진주님 사모님의 메시지를 받을 예정입니다. 부인회 총회, 봉고제에 대해 많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에게 진주님의 말씀이 제일 중요합니다. 부인회에서는 진주님 사모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나간다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우선 교조140년제를 향한 시순에 진주님, 진주님 사모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서 함께 용솟음치면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을 강력히 부탁드리면서 저의 인사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