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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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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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월차제 신전강화

 

신악가를 소중하게

 

 

김영진(진양교회장)

 

여러분 반갑습니다. 날씨가 무더운 가운데서도 월차제 근행을 즐겁게 올릴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조금 전에, 주방장님께서 오늘 점심 메뉴가 보리밥인데 보리밥을 하려면 많이 퍼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전강화를 조금 길게 하라고 합니다.

제가 오늘 신전강화에 지명을 받아 한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4)

 

신전강화 당번이 다가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이번에는 거의 두 달 전부터 무슨 말씀을 드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뜻 떠오르는 것이 신악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 629일에 전도청에서 용재연성회를 하는데, 이번에 다루는 주제가 손춤, 근행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교조 140년제의 한 가운데를 지나는 중인데 이런 때 천리교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근행’, 근행의 중심인 신악가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두 달 전에 든 생각은 그저 신악가에 관한 이야기로 신전강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신악가 중에는 우리가 감사하게 여겨야 할 말씀이 참 많습니다. 그런 감사한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전도청에서 신악가, 근행에 대한 주제로 연성회를 할 것이라고 하니 조금 놀랍기도 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참석하셔서 신악가, 근행에 대해 한 번 더 공부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교리 중심이라기보다는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고성교회에 온 지도 벌써 40년이 넘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지나온 이야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래전에 읽은 글에서 본부 강사들에게 강의하는 어느 선생님이 하신 말씀입니다만 강의 중에 학생(신자)들이 질문을 하면 신악가 위주로 대답하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제일 중요한 근행을 올릴 때는 원전, 준원전 중에서도 신악가만 필요하니까 신악가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전에 저희 교회에서 매월 월말에 떠나는 육좌근행이라고 해서 12장 근행 육좌근행을 보자고 작정을 해서 3년 정도 실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근행을 올려도 근행을 보면서 얼마나 신악가 구절의 내용을 되뇌는지에 대해서는 저도 의문이 많이 들었습니다. 손춤을 하고 신악가를 외고 하는 쪽에 치중을 하다 보니, 가장 중요하다 싶은 어버이신님께서 저희 인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신악가에 다 녹아있는데, 그 내용을 얼마나 되새기는지에 관한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가 부족한 인간이다 보니, 12장 근행을 한다고 해도 그 구절구절을 모두 새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12장 근행을 다 볼 때, 한 구절, 아니, 한 단어라도 가슴속에 되새기면서 근행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오늘 손춤을 올리면서 떠오른 구절이 있었습니다.

4

아홉에 여기는 이세상의 극락이라오

나역시 어서어서 가고싶어라

열로 이번에야 가슴속이

깨끗하게 씻어지니 감사하도다

하는 구절이 마음에 많이 와닿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생각해보니, 어제 저희 교회 월차제를 마치고 신자분들이 모두 가시고 혼자 신전에서 신전강화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데 이번에는 글이 잘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나름대로의 숙제가 수월하게 다 준비가 되었다 싶은가, 마음이 깨끗하게 되어 기분이 좋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악가는 제1악한 것을 제거하고...’, 2잠깐이야기’, 3‘...도움을 서두르니...’, 4절 팔수, 51~ 12장 등으로 구분됩니다.

저는 42년 전, 학력고사를 보고 난 후에 친구를 따라서 고성교회에 왔습니다. 처음에는 정문을 넘지 못하고 정문 앞에서 여기가 천리교구나.’ 하고 갔습니다. 한두 달 지나서 또 와서는 정문을 넘어 지금은 유치원 건물인 당시 신전 문 앞에까지 갔습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신전 배전을 밟았습니다.

그때 어느 분이, 제가 처음 왔다고 하니까 신악가 제1악한 것을... ’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분이 당시 태영포교소장님, 현재 지건회장님이십니다. 제가 어느 때 이 자리에서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신악가 제1절을 배웠던 그 순간이 제 신앙의 으뜸하루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 감동적인 순간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제가 20살 정도였는데, 마음에 무슨 맺힌 것이 있었겠습니까마는 당시에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이 기분이 좋았습니다. 가르쳐 주신 대로 가슴을 훑어 내리는 손짓을 하면서 마음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게 저는 지금도 저의 으뜸하루라고 당당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진양교회장으로서 월차제 근행 손춤 역할도 하는 등 많은 것을 하지만 언제나처럼 제가 손춤을 출 때는 지난 세월의 흔적들을 되새기고 생각을 합니다. , 어느 구절마다 나름대로 제 기억에 남아있는 순간들이 생각이 나곤 합니다.

그중에 제가 결혼하기 전의 이야기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경찰관으로 근무하시고 정년퇴직을 하신 후에 99년도에 출직을 하셨습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학교에 수업이 없으면 무조건 고성교회로 왔습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고성군 영오면 지서에 근무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를 뵈러 거기에 갔습니다. 거의 막차를 타고 갔던 것 같습니다. 갔는데 마침 아버지가 안 계신 겁니다. 그래서 그냥 있기도 멋쩍고 해서 고성읍에 집으로 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막차가 다 끊긴 상태였습니다. 일단 읍으로 가긴 해야 했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차가 많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작정 걸어서 가자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 길이 지금도 한적한 길이지만 그때는 더 그랬습니다. 대나무숲을 지나야 할 때도 있고, 숲속에서 나는 소리에 무섭기도 했습니다. 20살이 넘어서 다른 데서는 크게 무섭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혼자 가려니 무섭긴 하더라고요. 제가 크게 신앙심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신악가를 외우면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조전일화편에 보면 교조님께 가면서 신님을 외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저도 그런 상황이었지 싶습니다. 저희 집도 고성읍에 있긴 했지만, 거의 고성교회에서 잠을 자곤 했습니다. 그런 마음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신악가를 부르면서 갔습니다. 당시 신악가 책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외우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다 보니, 6장 아홉에 여기까지 신앙을 하여왔으니 한가지의 효과라도 보아야하지부분에서 기억이 전혀 안 나는 겁니다. 걸어오는 2,30분 내내 그 부분을 기억해내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느 작은 마을을 지나는 데 마침 공중전화가 보였습니다. 딱히 물어볼 데가 있습니까. 그 밤중에 고성교회 사무실에 전화했는데 누가 받았습니다. 다짜고짜 신악가 6장 아홉에가 어떤 구절인지 물어봤더니 처음에는 당황하더니 이내 가르쳐줬습니다. 그렇게 해결했습니다. 그때 그 신악가 구절을 전화로 알려줬던 사람이 지금의 진양교회 사모였습니다. 당시 진양교회 사모가 사무실에서 경리로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6장 아홉에 그 부분은 제가 진양교회장 취임봉고제 인사말씀을 드릴 때 인용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6장 아홉에의 구절은 제가 잊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또 하나는, 사감 선생님 전 부인께서 출직하셨을 때, 제가 고성교회에서 청년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도 마음이 많이 안 좋더라고요. 상리공원묘지 화장장에서 화장을 했습니다. 저도 따라서 화장장에 갔습니다. 화장하는 중에 영정사진을 놓고 예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화장하는 시간이 2~3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그 시간 동안 신악가를 불러드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도 신악가를 가져간다든지 준비를 해서 가지는 못했고 단지 머릿속의 기억으로 신악가를 불렀습니다. 그때는 이전보다 자신이 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듯이 손춤을 추면서 신악가를 외우면 좀 수월한데 손춤 없이 신악가를 외우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신악가를 외우다 보니 더듬기도 하고 했는데 마침 지금의 사천회장님이나, 저산소장님이 도와주시기도 해서 잘 해내기도 했습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손춤을 추면서 뿐만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서도 신악가를 제대로 외울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에 한 게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외우긴 했습니다만 이제는 어느 정도는 외운다고 생각이 들긴 합니다.

 

신악가 제5장 아홉에로 가면

여기는 이세상의 근본의터전

진기한 이곳이 나타났도다

입니다.

이 구절은 제가 고성교회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아침, 저녁 근행을 보러 집에서 다닐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2대 교회장님이셨던 이병석 회장님께서 근행시간 후에 한 말씀 하시는 중에 이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진기한의 손짓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지금도 그 부분의 손춤을 할 때는 이병석 회장님이 생각나곤 합니다.

, 7장 여섯에

무리로 어쩌라고 말하지 않아

그것은 사람마다 마음에 따라

이 노래를 부를 때는 출직하신 남영교회 전 회장이신 김대경 회장이 생각이 납니다. 고성교회에서 서서 손춤이야기를 하다가 제7장 여섯에의 손춤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웃으면서 그 부분에 관해 이야기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신악가 4절은 팔수입니다. 그중에

온시대 모든세계 인간들을 살펴보아도

신의뜻 아는자는 바이없도다

입니다.

이 구절은 십수 년 전에 스타렉스 승합차를 타고 다닐 때, ‘천리교 진양교회라고 써 붙이고, 이 팔수 구절을 차 뒷유리창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뒤에 오는 차가 보라고요. 이 구절이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본부 어느 유명한 선생님의 일화라고 전해 듣고 있습니다만, 일본 최고의 대학교인 동경대학교를 나온 어떤 분이 천리교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분이신데 어쩌다 이 구절을 보고 첫 마음에 천리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천리교에 왔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마음에 많이 와닿습니다. 저도 혹시 이 문구를 보고 어떤 분이 따라오실 분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5년을 그렇게 다녔는데 물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조금 전에 월차제 근행에서도 전반 손춤을 올라갔습니다. 손춤을 하다 보면 도는 동작이 많이 나옵니다. 각 장의 나무천리왕님이시여할 때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도는 동작을 할 때마다 배전에 계신 분들을 보곤 합니다. 누가 왔나 안 왔나를 보는 것이 아니고요. 배전에서 같이 신악가를 부르고 근행을 올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이나 기원하는 것들이 어버이신님의 말씀대로 각자의 마음에 다가가서 수호받기를 원하는 작은 마음을 갖고 그렇게 합니다.

 

제가 작년에 이 자리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그때 신전강화 앞머리에, 유달 제4호를 발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에 교조연제 동안은 감화가 따로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유달 제4호가 있으므로 유달말씀을 듣고, 읽고, 새겨서 교조140년제 동안에는 그 부분만 계속 되뇌어도 감화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납니다.

제가 항상 신전강화 준비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월차제 근행 볼 때 12장까지 손춤도 추면서 암송도 하고 따라 부르기도 합니다. 신악가는 신님의 말씀입니다. 그중에도 엑기스인 주옥같은 말씀만 뽑아놨습니다. 그런데 그런 신악가를 12장까지 부르고 났는데 다른 말씀이 뭐가 더 필요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저 같은 사람이 와서 이야기하는 것은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귓등으로 흘려들어도 됩니다. 그만큼 근행을 올릴 때 신악가에 대한 말씀을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신악가 해설책을 잠시 봤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첫 문장이 천리교 신자로서 하루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신악가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 이상 어떤 사족도 붙일 수 없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제가 신악가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교리적인 부분은 연성회에 참석하셔서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읽었던 책들에서 교조님께서 신악가를 집필하실 당시에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첫째 단계는,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길은 절하고 비는 곳이 아니라고 항상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신상, 사정에 부딪히게 되면 그렇게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절하고 비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신악가를 통해 깨우치시려고 했다는 겁니다.

두 번째 단계는, 대물차물의 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대물차물의 리를 깨닫게 되면 화가 날 수 없습니다. 누명을 쓰더라도 억울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제가 젊었을 때 자전거를 타고 집과 고성교회를 왕복하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오는데 고성초등학교 지나 고성군청 가는 가운데쯤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의 새길이 아니었을 때입니다. 그 길로 오는데 어떤 남자가 제 자전거를 세우더니 다짜고짜 제 뺨을 때렸습니다. 저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고성에서 고등학교까지 살면서도 전혀 일면식조차 없는 사람이 저의 뺨을 때렸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그때 고성교회에 참배를 오는 길이 아니었다면 다른 수를 썼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의 성격으로 보면 쭈그러져서 그냥 지나기도 하긴 했을 것 같긴 합니다만. 하여튼 고성교회에 가는 길이어서 그랬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정도로 대물차물의 리를 제대로 깨우치고 나면 억울할 일도, 화낼 일도 없게 되는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즐거운 삶을 실현하는 단계입니다. 히노끼싱, 남을 도우는 실천을 통해 즐거운 삶의 세계가 구현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잠시 떠오르는 것은, 현재 사회를 보면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현상이 팽배합니다. 뉴스와 같은 미디어를 통해서도 그런 사고방식이 공공연하게 정당화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혀 틀린 말도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괜히 길을 가다가 이유도 없이 얻어맞고 나서, 신앙적으로는 대물차물의 리다. 내가 이전에 지었던 일이다. 라고 할 수 있지만, 기분 나쁘다고 마음에 묻고 있으면 이렇게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것은 내 몸에, 내 혼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회에서는 그런 것을 풀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보면, 그렇게 억울하게 당한 일을 모든 사람이 다 풀어내게 되면 이 세상은 그야말로 혼돈의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나마도 천리교에, 여기에 계신 분들 덕분에 어버이신님의 가르침대로 모든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행동을 하지는 못할지언정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나도 그런 생각을 해야겠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어버이신님, 교조님께서 말씀하시는 즐거운 삶의 세계 건설을 위해서 여기 계신 분들이 하실 수 있는 하나의 작은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 용재들만이 할 수 있는 큰일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 된다, 못한다, 힘들다가 아니라 그런 중에 더욱 신악가를 가까이하여, “천리교 신자라면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되는 신악가를 통해 즐겁게 용솟음치는 용재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정도면 주방장님이 말씀하신 시간이 대충 맞아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시간이 길어져서 지루하셨을 텐데, 잘 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