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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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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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월차제 신전강화

 

교회장 사모의 자리

 

최영철(문산교회장)

 

반갑습니다. 방금 소개받은 문산교회장 최영철입니다.

따뜻한 날씨를 수호받아 오늘은 완전히 봄날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화창한 날씨 속에 다 함께 12장 근행을 정성껏 올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연제기간에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어제도 도보에 많은 분이 참석하셔서 끝까지 걸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중도에 하차했습니다. 지금까지 신앙하면서 중도에 하차한 적이 거의 없는데, 어제는 삼 분의 이쯤 와서 무릎에 이상이 왔습니다. 끝까지 완주를 하면 오늘 제전에 전례가 되어 있어서, 꿇어앉는데 무리가 올 것 같아서 차를 타고 왔습니다. 집에 와서 파스를 붙이고 찜질을 하고 해서 다행히 순조롭게 마쳤습니다.

제가 고관절 수술을 한 것은 전혀 이상이 없지만, 지금은 무릎이 좋지 않습니다. 전도를 간다든지 해서 한두 시간 걷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어제는 안 되더라고요. 제전 역할에 호자나 전례 역할을 맡게 되면 신경이 바짝 쓰입니다. 15분 정도 제 역할을 다할 때까지는 꿇어앉아 있어야 하니까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다행히 오늘은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어제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가서 오늘 월차제 제전역할표에 제가 신전강화로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죄송스럽게 오늘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왔습니다. 이것도 신님의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에는 신전강화에 교회장 사모를 많이 넣어주십니다. 그래서 광일 사모님이 신전강화를 한 후에 저희 문산 사모도 신전강화에 넣을 것 같았는데, 저희 사모가 절대로 안 된다.”고 해서 고성교회 사모님께 제가 저희 집사람 좀 빼달라고 사정을 좀 했습니다.

지금까지 오는 동안에, 문산교회 사모, 김은주라는 사람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얘기를 한 적은 있지만,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대략 아시는 분들도 있겠습니다. 제가 교회장직을 그만두기 전에는 사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번 할 기회가 있어야 되는데 하던 차에 다행히 어제 아무런 준비 없이 신전강화를 맡게 된 것이 신님의 뜻이 아닌가 싶어서 오늘 저희 사모에 대해서, 사모를 대신해서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자리에 올라오기 전에 사모에게 미리 얘기도 안 했습니다만. 말하면 하지 마라.”고 할 것 같아서 아무런 상의도 없이 갑작스럽게 저희 사모를 대신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왕좌왕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겪어서 아는 범위 안에서 사모를 대신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4)

 

교회를 이끌어 가는 데 있어서 사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저는 절실히 느낍니다. 혼자 하시는 교회나 포교소는 얼마나 힘이 들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처음에 문산 사모가 신앙을 시작하게 된 것은 14살 때였다고 합니다. 늑막염이라는 신상이 와서 신앙을 하게 되어 19살에 강습을 가서 신님에게 매달렸답니다. 그렇게 열심히 강습을 받는 도중에 늑막염 고름을 입으로 다 토해내고 수호를 받았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재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수호를 받고 저보다 더 진실한 신앙을 했습니다. 강습을 영도에서 받았고 저보다 강습 선배입니다. 저는 105기이고 사모는 90기랍니다.

그렇게 신앙을 하다 어떻게 알게 되어 저랑 결혼했습니다. 한 동네 살았는데도 그런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당시에 저는 서울에 있었습니다. 당시 선을 두세 번 보고 있었는데 아가씨가 괜찮다 한번 봐라.”고 형님이 서둘러서 선을 봤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형님하고 이미 선을 한번 봤답니다. 그 당시 친정아버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아 딸을 빨리 시집보내려고 했답니다. 19살 때 맞선을 보고 만나기로 했는데 도망을 갔답니다. 당시에 너무 어렸기 때문에 놀라서 그랬답니다. 그렇게 형님하고는 성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때 형님은 외항선을 타고 있었을 때라 결혼하고 또 배를 타러 나가려고 했고, 나이도 어린 데다 12년 차이가 나다 보니 겁이 많이 났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선을 보라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내려와서 선을 보고 올라갔다가 일주일 만에 성사가 됐습니다. 준비할 사이도 없이 결혼 날짜가 잡혔다고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따로 준비할 사이도 없이 각자 자기 옷을 하나씩 해 입고 47일 고성교회 구신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며칠 있다가 다시 서울로 갔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자취하고 있었던 터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사정을 얘기했더니 하루에 5천 원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얘기하니 그 정도면 나하고 같이 살 수가 있겠다 싶어서 결혼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결혼생활 8개월 만에 임신을 한 상태로 다시 시골로 내려오게 됐습니다. 말짱했는데 갑자기 허리도 아프고 신상이 왔습니다. 허리를 갑자기 못 쓰게 되어 디스크인 줄 알았는데 좌골신경통이라고 했습니다.

79년도에 사업을 벌려 사무실을 차렸는데, 불경기라 사업이 안 됐습니다. 결혼을 해서 데리고 갔는데 일거리가 없는 겁니다. 하루 가고 이틀 가는데, 결혼해서 사람을 데려다 놨는데 사람을 굶겨 죽이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니 10년을 넘게 산 서울이 싫어졌습니다. 시골에서도 내려오라고 하고 갑자기 사고도 나고 해서 보따리를 싸서 내려왔습니다. 신님의 뜻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고 나서 집사람이 강습을 가라고 권유해서 강습을 갔습니다. 집사람이 강습을 안 나왔더라면 그러지도 않았을 겁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3개월을 뺀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돈을 만지다 결혼을 했는데, 돈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러 가지 계산을 해봅니다. 다 마찬가지일 겁니다.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데 그래도 급하고, 결정을 해서 옷 보따리 하나 들고 내려와서 바로 강습을 갔습니다. 데리고 있던 동생이 고등학생이었는데 다 줘버리고 내려왔습니다.

시골 내려오자마자 고생길이 시작된 겁니다. 바로 강습을 가니까 첫아기 낳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강습 도중에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입니다. 처음에는 몸도 좋았는데, 강습을 마치고 오니까 홀쭉해서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습니다.

강습을 마치고 바로 상급에 가서 청년근무를 작정해서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후계자가 되면 청년근무를 해야 한다는 식의 말이 많았습니다. 제 위에는 형님이 두 분이나 있었기 때문에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인연이 되었는지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집사람이 저랑 내려왔다가 혼자 있으면서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한참 신혼인데 바로 강습을 갔죠. 강습을 마치고도 상급에 작정한다고 3년을 작정해서 갔습니다. 그렇게 신혼생활을 전혀 해보지 못한 겁니다. 3년을 작정했는데, 당시에는 상급에 역사가 많아서 4년을 있게 됐습니다.

저의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다시 들어온 어머님은 포교하시다 재혼하셔서 문산교회에 아버지랑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새어머니의 성격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격하십니다. 그런 가운데 집사람을 혼자 놔두고 저 혼자 바깥 생활을 했던 겁니다.

요즘 생각해 보면 당시 내가 왜 그리 어리석었는지 모릅니다. 요즘 같으면 상급에서 집에 못 가게 해도 밤에 도망을 가도 갈 겁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문산교회 제일에도 못 가게 합니다. 상급에 근무하는데 자기 교회는 안 가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순진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모처럼 집사람 얼굴 보는 날은 문산교회 제일 날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집에 가면, 자신은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니 저한테 하소연합니다. 저는 저대로 보고 싶어 와서 분위기가 좋기를 바라는데 집사람이 그러니 제가 그것을 다 받아주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게 티격태격할 때도 많았고 고생을 많이 시켰습니다.

 

 

그렇게 4년을 채우고 집에 가니 바로 문산교회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초대 회장님이 역사를 시작은 해놓으시고 건강이 안 좋으셔서 힘들었습니다. 총무님은 40평 정도 하면 안 되겠냐고 했습니다. 저는 30평 정도 해서 총무님이 반 내고, 신자님들이 반 내고 하면 안 되겠나 싶었습니다.

당시 총무님 동생이 서울에서 사업이 잘됐기 때문에 동네에 양로원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해서 제가 설계를 했는데 집이 너무 커져 버렸습니다. 2대 회장님이 40평 정도 하면 적당할 거라고 했는데 하다 보니 1~2112평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니, 총무님이 말은 해놨는데 안 할 수도 없고 해서 하다 보니 기초만 벌여놓고 손을 떼버렸습니다.

그 후로 17개월 동안, 집사람과 제가 어떻게든 해보자고 해서 애를 썼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회장이 아니라 청년회장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멱살도 잡히고 명절 때 되면 돈 빌려준 사람이 돈을 내놓으라고 독촉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친구들을 돌며 돈을 빌리기도 하면서 애도 먹었습니다.

그렇게 골조만 올라가 있는 데서 아버님이 합판을 하나 대 놓고 위층에서 주무셨습니다. 아래층에는 신님이 모셔져 있었고요. 그러던 어느 날, 자시 근행을 보고 거기서 주무셨는데, 갑작스레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려서 놀라서 가 보니, 숟가락으로 배를 긁어 드시다 그 배가 목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제가 놀라서 등을 한 번 쳤는데 그 목에 걸렸던 배가 튀어나오면서 목에서 피도 조금 났습니다. 그것도 신님이 그렇게 시키신 모양입니다. 사람이 누워계시면 왜 그러시느냐고 묻기나 하고 별 조치를 하지 않았을 텐데, 저도 어떻게 쳐서 배가 나왔는지 모르게 조치를 했던 겁니다. 그렇게 배를 뱉어서 살아나시긴 했는데 몸이 굉장히 안 좋아지셨습니다. 건물은 골조만 되어 있는 상태라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총무님도 신자님들도 다 떨어지고 조금씩 생기는 돈으로 역사를 이어갔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집사람과 작정해서 어쨌든 둘이서 해보자고 해서 노력하니,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주는 사람도 있고 나름대로 순조롭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7개월 정도 걸려서 거의 다 되어갈 즈음에 총무님을 찾아갔습니다. 총무님께 초대 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봉고제를 올리면 좋겠다고 하니까 그제야 자신이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안에 커튼도 달아주시고 선풍기도 설치해 주시고 해서 마무리를 잘했습니다.

 

역사가 끝나고 큰 마디가 또 나왔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가슴에 묻어두고 싶은 말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둘째 아이를 잃어버렸습니다. 아이가 생일에 친구들하고 논다고 갔다가 멱감다가 잃어버렸습니다.

그때는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얘기를 아버님에게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건강이 안 좋으신 상태여서 알릴 수가 없었던 겁니다. 아이를 자꾸 찾으시길래 형님한테 보냈다고 핑계를 대서 숨겼습니다. 사람들이 문병을 오면 저는 노심초사가 됐습니다. 혹시라도 아버지에게 아이 얘기가 전해질까 봐서요. 그런데 20일 정도 지났을 무렵, 아버님이 몸이 조금 좋아지셔서 동네에 다니러 나가셨다가 그 얘기를 들어버리신 겁니다. 그 충격에 초대 회장님도 그해에 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집사람이 촌에 살아서 참으로 순진한 편이었습니다. 서울에 살면서 내가 눈만 흘겨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큰 마디를 겪고 나서는 눈물이 더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집사람의 친정 아버님은 젊어서 좋은 학벌에도 불구하고 취직이 잘 안되어 술로 세월을 보내던 분이었습니다. 그 피를 이어받았는지 집사람도 본래 술도 좀 하긴 했는데, 그 일로 술을 자주 접하게 되고 눈물도 흘린 세월을 많이 보냈습니다.

그런 가운데, 거기서 헤어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마침 전도청에서 역사가 시작되었고, 상급에서도 신전 상단 공사를 해달라고 해서 전도청에 가게 됐습니다.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혼자가 되었습니다.

아버님이 출직하시고 2년 뒤에 제가 교회장직을 받았습니다. 물려받으면서 2,500만 원이라는 빚을 안고 교회장직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겁이 없었습니다. 리를 이어받아야 한다니까 그렇게 했습니다. 사실 저는 막내입니다. 위로 형님이 두 분이 계시지만, 안 하시려고 하고 그게 인연이라고 하니 제가 받았습니다.

교회를 물려받고 나니 빚을 갚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7, 8년을 떠돌이 생활을 합니다. 신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 사이 집사람 혼자서 시어머님을 모시고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 성격도 대단하신 시어머님을 모시면서 말이죠. 말로 어떻게 표현을 다 하겠습니까. 저는 아들한테 과자를 사줘 본 적이 없습니다. 요즘에도 아들이 군것질을 안 합니다. 한번은 왜 군것질을 안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아버지가 어려서부터 과자를 사준 적이 없어서 군것질할 줄 모른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그 정도로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시집와서 고생하면서 혼자서 애를 대학까지 키워냈습니다. 저는 교회장을 맡고부터 돈을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습니다. 전부 일임하고 오늘까지 문산교회의 돈에 관한 문제는 사모가 전부 책임을 지고 처리해 나가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밖으로만 돌았기 때문에 혼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저 대단하다고 마음으로만 알 뿐이지 잘 모릅니다. 어떨 때는 돈이 없어서 친구들 만나는 자리를 피하기도 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지내왔습니다.

밖에 다니면서 역사하는 데 도와주고 돈을 좀 만지기도 했지만, 그 당시도 연세 많으신 분들이 한 분씩 들어와서 거처를 했습니다. 나이 많은 분들이 잠을 못 자게 할 때도 많았습니다. 밤에 자고 있는데 효자손으로 문을 두드립니다. 자다 놀래서 가서 봐 드리고 하는 등의 생활을 수없이 많이 했습니다.

그런 생활 가운데 여러 마디를 많이 만났습니다. 저는 9, 10년마다 한 번씩 마디가 옵니다. 그 아이를 잃고 나서 10년 후에 제가 죽다 살아났지요. 10년 후에 고관절 수술 양쪽으로 다 했습니다. 집사람이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입니다. 제가 조금만 움직이면 신경을 많이 씁니다. 저는 쉬는 걸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에 좀 움직이려고 하면 몸 생각해라.” 하면서 어떨 때는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짜증도 날 때도 많이 있지만 나를 위해서 말린다는 생각이 드니까 감사할 따름입니다.

요즘에도 밥 먹는 식구가 다섯입니다. 교회에서 삼시세끼를 다 먹습니다. 연세 많은 분이 한 분 작년 겨울에 집에 계시다 주저앉아서, 엉덩이 골절이 나서 수술하고 3개월 정도 대소변을 다 받아내다가 사모를 너무 힘들게 한다고 하며, 그분 스스로 요양원에 가기로 요청해서 작년 겨울에 요양원에 들어가셨습니다. 같은 남자 같으면 제가 좀 거들기도 할 텐데, 대소변을 다 받아낸다는 것이 여간한 일이 아닙니다.

한 분은 심장 등 여러 가지로 안 좋으셔서 병원에 갔다가 다시 교회로 오고 싶다고 해서 교회에 계십니다. 요즘에는 그분이 정신이 없고, 기억을 못 하겠다고 해서 신경이 많이 쓰이는 중입니다.

 

집사람이 언젠가는 나도 꽃길을 걸을 날이 있지 않을까 하고 말합니다. 신님이 하나씩 정리를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젊어서는 연세 많은 사람을 모시고 시중을 들어도 수월하게 해냈는데 이제는 자기도 나이가 들어 60대 중반이 되니 한 번씩 불평을 합니다. 저도 미안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감사하게 잘 받아들이고, 내가 할 일이 이것 말고 다른 게 있겠냐고 스스로 말을 하니까 감사합니다. 언젠가는 신님께서 모두 정리해 주셔서 편안하게 갈 수 있게 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신앙을 해왔지만, 집사람의 진실한 마음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집사람의 어머님도 여자병에 걸려서 고생했지요. 할머니도 피부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답니다. 그 집안은 불당을 지어 올릴 정도로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천리교에 왔습니다. 삼촌 중 어떤 분들은 천리교 못 사는 데 시집간다고 결혼식 때 안 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그 부모들이 신앙으로 수호받고, 장모님도 문산교회 오셔서 2, 3년 계시다 출직을 하셨으니 자녀로서 해야 할 도리는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집사람이 신님께 하는 모습은 참 진실합니다.

제가 이번에 칠순 잔치를 한다고 아들이 케이크와 봉지 속에 돈이 줄줄 나오는 선물을 해줬습니다. 아들이 뭘 열어보라고 해서 열어보니 나이대로 돈이 줄줄 달려 나오더라고요.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돈 구경은 했는데, 집사람이 이것은 정월대제이니 상급에 올려야 된다고, 저는 돈 구경만 하고 만져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올렸습니다. 한편으로는 서운했지만 나를 위해서 정성을 써주는구나 하고 위안으로 삼았습니다. 그 정도로 누가 얼마를 줘서 돈이 생겨도 신님께 알리고 씁니다. 제가 비록 교회장이지만 그런 점은 본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제가 교회장이지만 저는 그렇게는 못 합니다. 단지 삼 분의 일이라도 떼어 놓고 올리든지 할 겁니다.

매달 제일 지내고 나서 저는 집사람에게서 판공비를 10만 원 받습니다. 그 돈도 참 감사합니다. 제가 따로 돈 쓸데도 없고, 손주들 용돈 좀 주고, 다니면서 교통비 하는 정도입니다. 10만 원의 행복도 너무 감사합니다.

저는 공무원처럼 나라에서 매달 75만 원을 받습니다. 집사람도 집에서 요양보호사 업무를 합니다. 아침 6시에 출근을 찍고 저녁 8시 반에 퇴근을 찍기 때문에 교회 일을 보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도 보태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교회 운영을 하고 계신 분들이 계시겠지만 교회 운영이 참 어렵습니다. 교회 성금만으로 교회를 운영한다고 하면, 일반 가게 같으면 벌써 문을 닫았어야 할 처지입니다. 제가 만져보지도 못하는 75만 원이지만 저도 나름대로 덕을 쌓고 있습니다.

제가 교회장이 된 지가 29년이 됐습니다. 제가 입교 158826일에 리를 받았습니다. 올해 826일이 만 29년 되는 날입니다. 이번 원단제 때 처음으로 신자분들 앞에서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한 번도 신자분들에게 돈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굴러가고 돈이 어디로 어떻게 쓰이는지에 관해서 얘기했습니다. “옛날에는 신자분들 눈치 본다고 옷 한 벌 사고, 뭐 하나 하는 것도 눈치를 봤지만, 저도 나름대로 덕을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제일이라고 5만 원도 하고, 10만 원도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우리 두 부부도 모두 자기 몫은 하고 있다. 여러분들도 알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얘기했습니다. 처음으로 교회 운영에 대해서 기름값, 교통비 등 지출에 대해서 밝혔습니다. 신자는 자꾸 줄어가고 교회 사정은 어려우니 서로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말했습니다. 그래도 감사하게 신자님들이 모두 수긍을 해주셨습니다. 저도 어렵지만, 저의 역할을 다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문산교회가 오기까지는 크게 이루지는 못하고, 초대 회장님이 해놓으신 것을 많이 까먹었지만, 그래도 돈 빌리러 다닐 일도 없습니다. 요즘에는 근행을 보고 바로 앞에 난 자전거도로를 걸으면서 항상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하고 노래를 합니다.

저는 식사 시간이 제일 즐겁습니다. 모든 교회의 식구들이 삼시세끼를 먹으면서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요즘에는 건강을 생각해서 건강식으로 신경을 써줍니다. 그런 사모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제가 보답을 다 못해도 어려운 부분은 제가 도우려고 많이 노력하는 중입니다.

어쨌든 문산교회가 오늘날 여기까지 온 데는 사모의 역할이 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의 사모들이 고생이 많다는 것을 저 자신이 느낍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해내니까 신님이 어떻든 굴러가도록 만들어주시는 겁니다.

 

여러분, “살겠다. 못 살겠다. 힘들다.” 하는 식의 말이 입 밖으로 말이 나오는 순간 그 말대로 되어져 오는 겁니다. 이 길은 말 대로 되어져 오는 길입니다. 늘 즐거운 마음으로 지내면 언젠가는 신님이 거기에 맞게 즐거움을 주시고 감사를 느끼게 해주신다고 확신합니다.

연제 기간에는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묵묵히 이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희 초대 회장님이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이 길은 끝이 있는 길이다. 틀림이 없다.”라고요. 그 말에 따라 저도 갑니다. 아무 생각 없이 교회장을 받아서 오늘날까지 왔지만 그런 시기를 못 견뎠으면 오늘이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때는 옛날에 여기 근무하면서 한 달에 한 번 집에 가는 것도 힘겨울 때는 상급 회장님이나 사모님 원망도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상급 회장님이 못 가게 해도 밤에 도망가서 마누라 보고 오겠죠. 그때는 왜 그리 순진했는지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모진 일을 참고 인내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신님이 살리어 주시고 묵묵히 갈 수 있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모두 힘들지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실망하시지 마시고 힘이 들더라도, 어떻든 즐거운 마음으로 이 길을 이어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두서없는 말씀이지만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