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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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년08월] 마을의 신선 - 이호열

2023.07.27 17:36

편집실 조회 수:92

7월 월차제 신전강화

 

마을의 신선

 

 

 

이호열(성천교회장)

 

(4) 여러분 반갑습니다.

7월 월차제에 참배를 하고 즐겁게 12장 근행을 올리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교회장님으로부터 이달의 월차제 감화를 지명받았기 때문에 부족하나마 소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먼저 요 며칠 사이에 비가 많이 왔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데 교회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더라고요. “성천교회는 하천 주변인데 침수 안 되고 괜찮냐?”라고요. 요새는 하천 정비가 잘 되어서 침수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큰비가 와도 염려는 안 합니다만, 제가 어렸을 때는 비만 오면 짐 싸 들고 피난 가는 게 일이었습니다. 코로나 시국 이후로 안부를 묻는 전화를 받는 게 정말 오랜만이어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을 이 자리를 빌려 드립니다.

 

코로나가 바꿔놓은 세상

 

저도 코로나 때문에 거의 3년 정도 만에 이 자리에 서서 신전강화를 합니다. 코로나라는 복병을 만나서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었고 우리도 기존의 활동을 줄이거나 형태를 바꿔서 해야 했던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회단체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종교 단체라는 특징이 있고, 교회이기 때문에 더욱 당황스러웠던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교회는 다수의 사람이 신앙을 하고 모이는 장소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한꺼번에 감염병에 노출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상황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신경 써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가지 않고, 오지 않고, 오라고도 못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당연스럽게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과 몸도 거기에 적응될 즈음해서 코로나가 주춤해지고 거의 끝나게 됐습니다. 아직도 조금 남아있습니다만 우리는 이제 마스크도 안 쓰고 거리두기도 하지 않습니다. 서서히 일상생활,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에 진주님께서 교조 140년제를 올린다고 말씀하시고 그에 따른 마음가짐과 행동 방침을 유달을 통해서 밝혀 주셨습니다.

여기에 맞춰 생각하는 바를 말씀드리고 조언을 구하고자 합니다.

 

저는 3년 동안 제 주변뿐만 아니라 저 스스로도 고민을 많이 하는 가운데 생각과 행동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교회장의 입장이 있습니다. 또한, 한 사람의 천리교 용재이기도 합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고 남편이고 아이들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교회장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라는 집터를 지키고, 유지하고, 소속된 구성원들을 살피고, 신앙적인 성장을 이끌어가면서 즐거운 삶의 도장으로서의 교회의 본보기를 보여야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오는 것도 서로에게 짐이 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근행을 올리고 수훈을 전하는 우리의 근본적인 구제 활동조차 제약을 받는 시간이 계속되면서 교회라는 집터를 지키고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는데 여러분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명칭의 리를 배대 받았을 때 사람들은 어버이신님, 교조님께 약속했던, 가장 기본적인, 근행 장소를 유지하고 근행을 통한 구제 장소의 도장이 되겠다는 약속이 어쩌면 나의 대에 깨질 수도 있다. 라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허울뿐인 교회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이 기존에 우리가 당연히 해오던 것을 강제적으로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혼란스러운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물론, TV 등 언론을 통해 타 종교와 관련된 뉴스를 보면 잘못하면 우리도 지탄의 대상이 되겠다. 안 그래도 위태로운 한국에서의 천리교의 위상이 더 위험해지겠다. 라는 생각 때문에 오라는 얘기도 못 하고, 저 또한 가지 못했던 겁니다. 삼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만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근행도 각자 알아서 보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고, 교회 월차제 참배도 각자 마음에 따라서 하라고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습니다. 특히나 기존의 월차제 제전 형식도 줄이고 때로는 근행도 줄이면서까지 감염병 확산이 안 되게끔 힘을 기울였다고 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예전의 우리라면 근행 제전을 약식화 하고 근행을 줄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었습니까. 근행이 첫째라고 했는데, 근행을 줄이고 근행에도 오지 말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특히, 저 같은 경우는 교회장입니다. 상급, 최상급, 교구, 전도청 등 매달 몇 번의 월차제를 올리기 위해 쫓아다니면서 그것을 해야만 비로소 내 일을 다 했구나 하고 안심을 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것을 안 하니까. 아무것도 안 하는 내가 이거 되겠나. 하는 생각이 굉장히 많이 들었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그런 근행을 줄인다는 발칙한 생각을 스스로 하면서도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근행에 대한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나?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라는 생각조차도 자연스럽게 사회 흐름에 맞춰서 흘러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용재로서 생각해보면, 신한줄기로써 전도, 포교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런 활동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활동의 대상을 만나지도 못합니다. 굳이 밖에 나가서 전도를 하지 않거나 수훈을 적게 전해도 별로 죄송스러운 마음이 많이 들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활동을 많이 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그렇게 하지 못해도 세상이 그러니까. 상황이 그러니까.’ 하고 미룰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왜일까요. 예전의 우리였다면 교회장도 아니다.”라고 했을 겁니다. 상급에도, 교구에도, 전도청에도 참배하지 않으니 교회장도 용재도 아니었던 겁니다. 서로 대놓고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서로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도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입으로 어버이신님의 가르침을 이야기하고 교조님을 따르자며 연제의 마음가짐, 연제를 실천해 나가지만 코로나 시국 3년 동안 그런 것들이 모두 헛된 외침이었습니다. 물론 그 속에서도 꿋꿋하게 용재로서의 활동을 해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보고, 들어가며 존경심을 가지고 지켜봤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어버이신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올바르게 행동하지 못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면, 지금 여기서 근행을 보면서 의자에 앉아 계십니다. 의자에 앉아서 악기를 치고 좌근을 올리는 곳도 많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어디 꿇어앉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근행을 올립니까. 옛날 같았으면 다리가 아파서 펴지 못하는 사람도 신님 쪽으로는 다리도 못 뻗게 하고 꿇어앉아서 근행을 봤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의자에 앉아서 근행을 봅니다. 처음에 할 때는 그렇게 해서 되겠나.’ 하는 저항감이 있었지만 앉아 보니 편합니다. 앉아서 해도 근행이 됩니다. 앉아서 한다고 신님과 멀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아닙니다. 이런 것으로 생각합니다. 의자에 앉아서 하든 꿇어앉아서 하든 내 마음이 신님과 가까이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 형태의 차이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 것도 각자의 마음 나름일 겁니다. 그에 비추어 제가 스스로 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신악가에

오래오래 신앙을 하였더라도

즐거움 만으로서 가득해야지 (5-5)

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은 즐거움입니다. 어버이신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도 즐거운 놀이를 보고 싶은 까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행복은 상당히 자기 주관적인 겁니다. 돈이 많아야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서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찬물에 밥을 말아 먹어도 즐겁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나는 정말 좋은 걸 먹어야 행복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라고 단정 지어서 이야기할 수 없는 겁니다. 각자 마음 나름입니다. 어버이신님께서 이야기하는 즐거움만으로서 가득해야지하는 즐거움은 조금 달리 생각해봐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즐거움은, 항상 기뻐하고, 만사에 감사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언제나 기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나아가 세상을 빛내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목표를 정해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항상 기뻐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덜 내야 합니다. 욕심을 가지고는 항상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만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겸허한 자세가 중요합니다. 겸손해야 뭐든지 감사하게 여겨집니다. 세 번째, 언제나 기원하는 마음으로 남을 구제하는 자세와 태도를 갖춘다고 하는 것은, 용재가 남을 구제하면 제 몸 구제받는다.’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이 길을 신앙하는 사람만이 구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특정 다수, 세계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내가 기존에 알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르는 사람, 어제 TV에 나왔던 사람도 기원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기원하는 바를 당사자가 몰라도 됩니다. 대신에 내가 기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항상 그 사람의 안녕을,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모로 세상사가 복잡하게 돌아갑니다. 개개인의 삶이 세상의 거울 같아서 자신이 보지 못하고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들이 여지없이 신님의 거울로써 보여지고 그렇게 섭리 되어 가는 것에, 이 길을 가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많은 반성참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온 세상을 구제하는 길에 쓰이는 용재라면 형태에 치우치지 말고 한 사람, 아니면 불특정 다수를 위해서 항상 기원하고 도움받을 수 있도록 근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일하는 용재가 돼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저의 근황

 

여기서 잠시 요즘 저의 근황에 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요즘 고성에 소재한 노인요양시설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자면, 저희 전 회장님이 출직하시기 전에, 당시도 코로나 시국이었습니다. 코로나 시국이라 다른 게 할 게 없어서 고성군 홈페이지를 보니, 무료로 교육해주는 프로그램이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 보니 제빵사, 요리 등,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요양보호사가 있었습니다. 다른 것에 비해 기간도 짧고 배우기도 수월할 것 같아서 요양보호사를 배워서 자격증을 땄습니다. 그 후 불과 한 달 후에 저희 초대회장님이 앓아누웠습니다. 치매 판정을 받아서 가족 요양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 겁니다. 그렇게 집에서 제가 모셨습니다. 멋도 모르고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것이, 비록 부모자식의 관계이지만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교회장으로 그렇게 열심히 신앙을 한 사람이 왜 치매에 걸렸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병입니다. 제가 부대끼면서, 치매라는 것이 병이라고 인식을 하는 데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리고 마음속의 저항감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6개월 정도를 모시다 출직하셨습니다. 출직하실 때는 돌아가셨는지 어쨌는지 실감도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사실, 뇌졸중 신상을 가지고 고생을 하셨던 것, 그 불편한 몸을 이끌고 월차제마다 박자목을 쳐주셨던 것 등을 생각하면 짠하기도 합니다. 만약, 그런 상태가 1년 이상 2, 3, 10년 이렇게 길어졌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하지만, 짧게 6개월 정도 고생하시다 가셨기 때문에 서운한 마음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길어졌더라면 그런 마음이 남아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큰일을 치르고 나니까 제가 우울증 비슷하게 왔습니다. 옆에서 집사람이 보고 안 되겠는가. “밖에 나가서 일을 좀 해보세요.” 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이용해서 일을 하려고 찾는데 남자를 구하는 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일하고 있는 데서 남자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해서 정장을 차려입고 갔습니다. 갔는데 담당자가 대뜸 하는 말이 요양보호사 면접 보러 오는데 정장 입고 오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합니다. 제가 직장을 따로 다녀 본 적도 없고 하니 알 수가 없었던 겁니다. 정장 입고, 넥타이 매고, 구두 신고 갔습니다. 다음 날부터 출근하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가서 일을 해보니 노가다도 이런 노가다가 없습니다. 그동안 저는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일하러 갈 때 두 사람이 같이 갔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은 그다음 날 안 나오더라고요. 물어보니 그만뒀다고 합니다. 제가 이번 9월이 되면 만 2년이 됩니다. 제가 일하면서 15명 정도가 얼마 못하고 그만뒀습니다. 보통, 하루 왔다가 그다음 날 안 오는 경우도 많고 조금 버티는 사람이 한 달 정도 지나서 그만둡니다.

일이 너무 힘듭니다. 힘들고 더럽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돌보면서 단련이 조금 됐음에도 사람의 오물 냄새, 땀 냄새 등 참을 수 없는 게 많았습니다. 항상 내일 그만둘까, 모레 그만둔다고 얘기할까.’ 하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낮에 일하고 저녁에 교회로 와서 근행을 보고 누우면 아침 근행 시간에 눈이 떠집니다. 근행 보고 밥 먹고 나가서 일하다 오후 네 시쯤 되면 서서 자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저 스스로도 놀랄 정도입니다.

교회장을 하면서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정말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교회장 일하는 것에 비하면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몸도 힘듭니다. 그렇게 꾸역꾸역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나는 천리교 용재다.’ 하는 생각을 다집니다.

제가 있는 곳에서 최고령이신 환자분이 104세입니다. 최연소는 55세입니다. 치매도 종류가 여러 가지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치매가 오시는 분들도 있지만, 젊은 나이에 알코올성 치매이신 분도 계십니다. 제가 있는 시설은 다른 데서 어렵다고 받지 않는 사람도 다 받아줍니다. 다른 데서는 요양보호사들 힘들다고 안 받아줍니다.

중증 행동장애 등 여러 가지 증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오십니다. 낮에는 잠을 주무시고 밤에는 눈이 초롱초롱해져서 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그런 분들을 관찰하고, 밥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안 해도 되는데 굳이 이걸 여기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한 이후로 다른 데서 소문으로 성천교회장이 마음이 바뀌어서 사회 일을 하고 있다더라.” 개중에는 성천교회장이 아파서 뇌졸중이 걸려서 집에 틀어박혀 있다.”는 등의 소문이 나기도 합니다. 전도청, 교구에 가지를 않으니 그럴 수밖에요. 이런 소문도 감수해야 하니 마음 한편으로는 굉장히 무거웠습니다. 마음속으로 괴롭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눈의 신상

 

그런 가운데 작년 97, 고성교회 부인회 근행에 참배를 했습니다. 그날이 추계영제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머리가 조금 아팠습니다. 옆에 있는 다른 교회장님에게 내가 지금 머리가 조금 심하게 아프다. 머리가 쪼이는 느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두통약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두통이 전혀 가시지 않았습니다. 몸이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 하고 두통약을 또 먹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전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시 자고 일어났는데 머리는 깨질 것같이 아프고 구역질도 나고 앞이 잘 안 보이더라고요. 제가 눈 충혈이 원래 좀 잘 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막내 딸아이가 학교에 다녀와서 제 눈을 보더니 아빠, 눈이 핏빛이다. 피가 흐른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때까지 제가 거울을 안 보고 있었는데 거울의 제 눈을 보니 완전히 피가 흐르는 것처럼 핏빛이었습니다. 앞은 거의 안 보이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타이레놀(진통제)를 하나 더 먹었습니다. 눈이 빠질 듯이 아픈 안통이 온 겁니다. 저녁에 집사람이 왔습니다. 그런데 병원 진료 시간은 모두 끝났습니다. 응급실이 있는 병원에 가보니 안과에 관한 질환은 응급실에서 치료가 안 된다고 합니다. 안과를 취급하는 병원에 가라도 합니다. 대학병원에 연결을 시켜줬습니다. 대학병원마다 그날 밤에는 진료가 불가하고 어차피 아침까지 기다렸다 진료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눈은 너무 아파 죽겠는 겁니다. 제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통증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눈을 뽑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눈이 없으면 안 아플 테니까요. 그 정도까지 통증이 극심했습니다. 울면서 신전에서 신님 욕도 좀 했습니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신전에서 짐승 소리를 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너무 아파서 저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났던 겁니다.

오지 말라고 하니까 응급실에 갈 데도 없었습니다. 부산대학병원까지 연락을 해봤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담당 교수들이 스케줄이 이미 다 잡혀 있어서 와도 다음 날 아침 진료 시간 시작해야 진료를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픈 상태로 참았습니다.

아침에 고성에 있는 안과에 가서 진료 시작하자마자 의사를 만났습니다. 보더니 안압에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검사 기계의 한계치가 넘어서 측정이 불가한 상태였습니다. 안압을 낮추는 약을 넣고 주사제를 투여했습니다. 그러니까 안압 수치가 80 정도가 나오게 됐습니다. 정상 수치가 9에서 13 사이인데 낮아졌다고 해도 80이면 상당히 높은 수치입니다. 계속 약을 넣으니까 몸에서 물이 빠져나왔습니다. 화장실에 계속 가서 물을 뺐습니다. 그러니까 걷지 못할 지경이 됐습니다.

그 정도가 되니 둘째 아이가 그날 학교를 결석하고 저를 데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응급으로 그렇게 조처를 하고 경상대병원에 갔습니다. 가서 보니 안압이 높아서 그렇다는 같은 소견을 얘기했습니다. 급속하게 안압을 낮추는 조처를 하니까 제 몸무게가 7kg이 빠질 정도였습니다. 갑자기 몸무게가 그렇게 줄어드니 앉아있지를 못하고 옆으로 쓰러질 정도였습니다. 다행히 안압은 40 정도까지 낮아졌습니다. 그런데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아직도 안압이 높아서 그렇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다행히 통증은 가라앉았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나서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검사를 했습니다. 류머티즘에서 오는 것인지, 가족력에 의해 유전적으로 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감염에 의한 것인지를 찾아내기 위해서요. 그 검사를 위해서 채혈을 했는데 느낌상으로, 거짓말 조금 보태서 1리터 정도의 피를 뽑은 것 같았습니다. 검사를 의뢰하기 위해서 큰 병에 일곱 병을 채혈에서 서울의 큰 병원에 보냈습니다. 사진도 이렇게 저렇게 여러 각도로 엄청나게 많이 찍었습니다. 그 후 결과는 어떤 원인에도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해봤습니다. 눈은 월덕수기의리 아닙니까.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진흙물이 들어가면 탁해지게 됩니다. 제가 요양사 일을 하면서도 사실은 마음 한 켠에는 안 해도 되는데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마음에는 내가 용재인데 다른 사람과 다른 마음으로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몸은 무리를 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저항했던 겁니다. 단노하지 못했다는 거죠. 이런 생각에까지 미치게 됐습니다.

이왕 할 것 같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했는데 한 편으로는 용재니까.’라고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겁니다.

제가 처음에 일하러 가서 면접을 볼 때,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에서 일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분들이 무슨 교회인지는 몰라도 제가 교회에서 일했다고 했으니 남들보다는 잘해야 하는 겁니다. 다른 분들보다 모범스럽게 뭔가 달라야 했던 겁니다. 즐겁게 일을 해야 하지만 제가 적응이 안 돼서, 하면서도 왜 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항상 즐겁지 못했던 겁니다.

 

다시 병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렇게 해서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담당 교수가 얼마나 친절했는지 모릅니다.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수술실로 이동하는데 그 교수님이 괜찮습니다.”, “이리로 오십시오. 제가 안 아프게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희 동료들이 모두 잘할 겁니다.”, “안 보이시죠. 조심하십시오.”. 수술대에 오른 후에도 안심하십시오. 금방 끝납니다.”, “제가 안 아프게, 보이게 해드리겠습니다.”, “추우시죠. 담요를 덮어드리겠습니다.” 하고 제가 긴장하지 않도록 클래식 음악도 틀어줬습니다.

제가 그런 수술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수술방에 10명 정도의 인원이 있었습니다. 가슴부터 손가락 발가락에 센서를 끼웠습니다. 그렇게 1차 수술을 했습니다. 안압이 높으니까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눈알이 안에서 흔들려서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그렇게 하고 가만히 있으면 흔들리는 기분이 좀 가라앉아서 보이고 또 움직이면 흔들리고 했습니다. 그걸 씻어내는 수술을 했던 겁니다. 앞으로도 두 번 정도 수술이 더 남았습니다.

 

빌려 받은 몸

 

그래서 저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어버이신님에게 빌려 쓰고 있는 이 몸을 똑바로 알고 있는가. 차물인 몸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돌려 드릴 때는 빌려 받았을 때처럼 돌려 드려야 하는데, 내 마음대로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마음대로 쓰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그런 경우가 많죠 나는 건강하다. 나는 용재니까 신님이 알아서 해주실 거다. 신님 일만 하면 아무 문제 없다.’ 하고 말이죠.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잘 알고 잘 살피고 내 몸을 잘 살펴서 신님으로부터 빌려 쓰고 있는 이 몸에 누가 되지 않게끔 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닌가.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똑바로 깨닫지 못하고 애먼 짓을 하니까 그렇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10년 전에 신앙을 할 때나 20년 전에 제가 교회장에 취임할 때나, 터전에 다녀와서 처음 교성교회에 왔을 때나 마음가짐은 변함없이 똑같습니다. 오히려 이 일을 하면서 지금 더 그 현장에서 용재라고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이 길의 용재구나. 이 길의 용재이기 때문에 신님이 허락한 몸을 가지고 신님의 일을 정당하게 하는 것이 맞다. 즐겁게 해라.’ 물론 정석으로 전도, 포교에 매진하고 이 길에 FM대로 하면 좋겠죠. 한편으로는 그런 죄송한 마음도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좀 더 다른 방향으로 형태가 변해도 신앙심은 시대가 변한다고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하는 마음이 변해서 형태가 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가 변해서 형태가 약간 달라졌을 뿐입니다. 가르침은 그대로입니다. 그 가르침을 지키고 신한줄기 구제한줄기의 마음으로 임한다면 용재가 있는 곳 그곳이 교회이고 용재가 구제의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이 근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날이 마음 다하여 뿌린 씨앗은 반드시 싹튼다. 라고 어버이신님께서 가르쳐주신 원칙은 천연자연의 리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열리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것이 천연자연의 이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을 하면서도 콩을 심어놓고도 수박이 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콩을 심어서 콩이 나는데 그게 반갑지 않고 고맙게 생각되지 않는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콩을 심었으면 콩이 난다고 알려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뭔가 콩을 심으면 수박이 열리겠지. 열심히 하면 뭔가 굉장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지 하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 만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신님의 이치이고 순리입니다.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단노입니다. 신님의 가르침대로 용재로서, 교회장으로서 활동하는 모든 것이 최상입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활동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조님께서는 산골의 신선이 아닌 마을의 신선이 돼라.”고 하셨습니다. 마을의 신선은 활동의 주체 영역으로서 생활 속에서 신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물론 정석으로 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 목수장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저의 소망이라면 앞으로 2, 3년 내까지는 이 일을 계속할 것 같습니다. 물론, 신님의 뜻에 따라 못 하게 되는 다른 이치가 나오면 그에 따라야 하겠죠. 열심히 정석대로 하시는 용재님들을 위해서 뭔가 조그마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으면 그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며칠 전에 고성교회장님께서 순교를 오신 길에 여러 가지 말씀을 나눴습니다만 제가 지금 53세입니다. 앞으로 저의 올바른 정신과 건강한 몸을 가지고 활동을 할 수 있는 게 앞으로 20년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10년씩 나눠서 하고 싶은 것을 해서 후대에 따라오는 저의 아이들이나 교회에 이어지는 다른 신자분들의 자녀들도 고정된 신앙의 모습이 아니라 이런 형태로 신앙을 해도 충분히 즐겁게 신앙을 이어갈 수 있겠구나 하는 본보기를 보이고 싶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정말 사람들을 구제하고 싶으면 구제할 수 있도록 뭐가 됐든 한 가지 분야에 전문가가 되어라. 그렇게 이 길을 걸어가라 이 길은 정말 좋은 길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됐으면 좋겠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할 작정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여러 가지 오해도 있었을 테고 제가 부족한 면도 있었을 겁니다. 앞서 조언을 구한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그게 아니다.”라든가 아니면 다른 충고도 달게 받을 생각입니다.

하여튼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이 길을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저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