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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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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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조님의 모본의 길에 대해서, 세 가지 키워드를 일러주셨습니다. 그것은 물을 마시면 물맛이 난다.”, 마디에서 싹이 튼다.”, 남을 구제하면 제 몸 구제받는다.”의 세 가지입니다.

물을 맛이면 물맛이 난다.” 이 말씀은 1855년의 집터의 모습으로 교조전을 보면, “교조님 56 세부터 약 10 년 동안은, 참으로 어려운 고난의 길이었다. (중략) 60 고개를 넘으신 교조님께서는, 더욱 혹독하게 몰아치는 가난과 어려움 속 에서도, 구제의 여가를 틈타, 바느질과 물레질에 밤을 세우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달이 밝은 밤이면, “달님이 이렇게 밝게 비춰 주시고 있구나.”라고 하시며, 달빛을 의지하여, 가족 세 사람이 함께 물레질을 했다. (중략) 여름에는 지독한 모기떼에 시달리고, 겨울에는 가랑잎과 나뭇가지를 태워, 겨우 추위를 견디면서, 밤늦게까지 일에 골몰하셨다.

고칸이 어머님, 이제 쌀이 떨어졌습니다.”라고 말하자, 교조님께서는, “세상에는 머리맡에 먹을 것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도, 먹으려야 먹을 수 없고,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고맙잖아. 물을 마시면 물맛이 난다. 어버이신님께서 고맙게 보살펴 주고 계시는 거야.” 라고 타이르시고, ...라고 적혀 있습니다.

구제를 바라온 사람들에게는 잇달아 베푸시고, 극빈의 구렁텅이에 빠지신 나카야마 집안의 삶을 보여주고, 자녀들을 격려하고 용솟음치게 하신 일화입니다.

이 모본은, 몸에 받고 있는 어버이신님의 십전의 수호를 수호로서 느끼는 것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는 토대가 된다는 것을 일러 주신 모본입니다.

우선 명심해야 할 것은, 어버이신님의 수호는 항상 가득한 덕으로 수호를 베풀어 주십니다. 어버이신님은 어버이이시므로, 자녀인 인간이 바라지 않아도, 구하지 않아도, 각자의 혼에 새겨진 덕에 걸맞은 혜택을, 항상 그 덕에 가득히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길의 신앙이란, 처음부터 내 집의 안전이나 장사의 번창을 바라는, 자기 형편이나 더 많은 혜택을 원하는 절하고 비는가르침이 아닙니다.

구제하고 싶어서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수호해 주시는 어버이마음을 느끼며, 이미 덕에 가득히 베풀어 주신 하늘의 혜택에 감사를 드리는 태도에, 즐거운 삶의 기본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마음을 단노라고 가르쳐 주시고, “단노의 마음이야말로 전생인연의 참회가 되며, 나아가 지금 그대로를 기뻐하는 그 마음이 마음 그대로의 수호로서, 내일의 보다 나은 혜택으로 바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살면서 인연을 닦으며,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바꿔가기 위한 기본이, 지금을 기뻐하며, 지금을 만족하면서 사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에게만 마음의 자유를 주시고, 인간이 스스로 즐거운 삶을 누리도록 하라고 일러주셨듯이, 우리가 해야 할 마음의 노력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덕에 가득히 수호를 베풀어 주시는 어버이마음을 느끼기 위한 토대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눈이 보이는 것도 당연한 것, 자기 다리로 걸을 수 있는 것도 당연한 것, 맛있는 것을 맛있다고 맛볼 수 있는 것도 당연한 것, 자기 몸을 내 마음대로 써서 나쁠 게 뭐가 있냐고 생각하지만, 그 몸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자기 행복은 어버이신님께서 마음을 다해주시고, 끝까지 수호해 주시는 덕분에 있다고, 그 감사를 느낀다. 몸이 차물이라는 크나큰 은혜를 잊지 않고, 거기에 어떠한 어려움속에서도, 불평 불만을 능가하는 기쁨속에서 사는 토대가 있다는 것을, 교조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이 이 모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두 눈이 전혀 안 보이는 辻井伸行라는, 국제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피아노연주자가 일본에 계십니다만, 인터뷰에서 하루만 보인다면 뭐가 보고 싶냐?”는 터무니없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 대답이 부모님 얼굴을 보고 싶다. 친구 얼굴을 보고 싶다. 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보고 싶다. 불꽃을 보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으므로,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라고, 지금 있는 상황이 충분하다는 만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은, 얼마나 부자유스럽겠습니까

이 지금 있는 그대로가 충분하다는 만족은, 바로 구제한줄기의 어버이마음을 가르쳐 주시고, 지금 이미 덕이 가득한 혜택속에 삶을 부여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 길을 걷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목표로 해야 할 마음성인의 경지입니다.  

말을 할 수 있고, 매일 얼마만큼의 색깔에 둘러싸여 그것을 즐길 수 있는지, 거기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차 있는 건지, 아니면 저것도 모자라고, 이것도 부족하다는, 어버이마음을 무시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지 않은지 자문자답해야 할것입니다.

교조님의 모본의 길의 신봉자로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마음의 실천은, 몸이 차물이라는 것을 항상 기본으로 삼아, 여하튼 기분 좋게, 기뻐하면서, 즐겁게, 밝은 마음으로, 순직하고 겸손하게, 모든 일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생각이나 내 몸의 형편, 자기 정의감을 앞세워서, 약삭빠르고 교만하게 사는 것이, 가장 교조님의 모본과는 동떨어진 삶이라는 것을, 충분히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마디에서 싹이 튼다]

인생은 꼭 평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주어지는 마디는, 언뜻 보기에는 괴롭고 힘든 일입니다만, 단지 괴롭기만 하는 마디를 어버이신님께서는 결코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디에는 어떠한 신님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도말씀에, 

마디, 마디, 마음 하나 정하라. (중략) 차츰차츰 마디야. 마음작정의 리야, 마음 작정의 리야, 작정한 마음의 리야.” (1888.9.10)

마디가 없으면, 어떠한 일도 듣고도 흘려버린다. 하나의 마디가 없으면, 분간해 듣지 못 한다.” (1889.10.9)

괴로운 것이 마디, 마디에서 싹이 튼다. 이거 마디야, 마디야, 낙이야 하고, 큰 마음을 가져 다오.” (1894.3.5)라고 있습니다만,

마디란,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싹을 틔우기 위해서 불가결한 혜택이며, 마음을 하나로 모아, 다시 작정하는 것으로, 장래를 보다 고마운 운명으로 이끌어 주고 싶다는, 구제한줄기의 어버이마음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인도에 대해서 유달에서는 세상은 지금, 남에 대한 배려심보다, 자기주장이나, 한순간의 만족을 추구하는 행동이 넘쳐난 나머지,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자기중심적인 어두운 마음으로 헤매고 있다. 어버이신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잘못된 마음가짐을 깨닫게 하시려고, 신상이나 사정으로 표시를 나타내신다. 빈번한 자연재해나, 역병의 세계적인 유행 모두가, 우리들의 마음가짐을 바꿀 것을 촉구하시는, 자녀 귀여워하는 어버이마음의 표현이며, 인도인 것이다.”라고 지적해 주셨습니다.

구제하고 싶은 어버이마음이 가장 나타난 것이 마디라는 것은, 교조님 모본의 길을 통해서 명확히 보여 주셨습니다.

교조님께서 월일의 현신이 되신지 16년째, 교조님께서 57세 되시던 해, 1853년 남편 젠베님께서 출직하시고, 나카야마 집안의 안채를 헐어낸 해. 남편 젠베님께서는 1838년 이래, 친척이나 이웃에서부터 미키씨는 돌아버렸다, 신들렸다고 해서, 반대를 받고 멀어지는 가운데, 불안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유일하게 교조님을 지키신 분으로, 그 남편 젠베님께서 출직하셨습니다.

집의 안채란, 나카야마 집안 가족들이 유일하게 비와 이슬에서 몸을 지켜주는, 안심하고 몸을 둘 수 있는 장소를 헐게 하신 것입니다. 지켜주는 사람, 지켜주는 장소가 모두 없어진 것이 1853년입니다.

그 같은 해에, 교조님께서는 막내딸 고칸님을 나니와땅으로 신명을 전하러 나가게 하셨습니다. 그 이듬해, 가지모토 집안으로 시집가신 3녀 오하루님께 순산허락을 내리셨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의지할 남편이 출직하고, 안채까지 헐게 되면, 이제 끝장났다고 생각할 텐데, 거기에서 다시 구제의 첫걸음을 내디디신 것입니다.  

그 마디가 있었기 때문에, 순산허락을 통해 비로소 교조님의 말씀을 믿고, 터전으로 마음을 돌리는 사람이 하나둘씩 나타났습니다. 즉 마디일수록, 그 다음 단계로 발을 내딛는 시순이라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마디에서 싹이 트는 모습입니다.

그로부터 10년후인 교조님 66세 되시던 해, 1864년은 이 길을 신앙하는 사람도 모이기 시작하여, 이부리 이조 선생님이 부인 오사토님의 산후병을 구제받고 입신하신 해입니다.

그 보답으로 신각이라도 만들어 바치겠다고 하셔서, 처음으로 신전역사가 상량의 날을 맞이하여, 모두가 축하하는 가운데 보여주신 것이, 오야마토신사의 마디입니다. 이 마디로 인하여, 그때까지 이 길로 인도된 수많은 신자들은 잇달아 이 길을 떠나버리고, 남은 것은 이부리 이조 선생님 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오야마토신사의 마디가 있던 이듬해, 교조님 67세 되시던 해에, 교조님께서는 처음으로 악한것 제거 도와주소서의 근행을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고 생각하게 될 마디 가운데, 다음 단계로 이 길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또 다시 10년 후, 교조님 77세 되시던 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교조님께서는 나카타 기사부로, 마쓰오 이치베라는 두 분께 오야마토신사에 가서 어떠한 신이냐고 물어보고 오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선생님께서는 교조님 말씀대로 묻자, “우리 신사는 유서 깊은 대사(大社)이며, 모시는 신은 기기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다.”라고 대답하므로, “어떠한 수호를 하시는 신입니까?”라고 다시 묻자, 말문이 막혀서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함부로 하는 자는 쇼야시키 할머니겠지.”라고 해서, 나라현청 사사계가, 교조님을 야마무라고텐, 즉 엔쇼지 절에 호출하여, 취조를 받게 하고, 이 마디는 이어지는 탄압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집터로 돌아오시고 나서 처음으로 붉은 옷을 입으시고, 다음해에는 터전 결정을 하시고, “온세상 마음맑히는 감로대의 근행을 가르치시면서, 근행을 올리는 장소, 그리고 근행 전체를 가르치시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큰 마디를 만드시고, 근행 완성이라는 다음 단계로 이끌어 주셨던 것입니다.  

1887년의 연제의 으뜸하루도 마찬가지로, 또한, 우리의 초대들이 이 길에 인도를 받은 것도, 모두 신상에서 시작한 길이야.”라고 일러주시듯이, 역시 마디를 통한 인도를 산 마디로 삼으신 초대로부터, 이후에도 오늘날까지, 수많은 마디를 보여주시는 가운데, 마디에서 부러지지 않고, 마디에서 싹을 틔우고, 마음성인에 힘쓰신 부모들의, 우리는 그 자손입니다. 그 덕분으로 지금의 내 생명, 인생의 지주가 되어 있습니다.  

교조님연제의 시순이란, 이 길을 걷는, 우리의 성인을 고대하시는 큰 마디입니다. 140년제에도, 일부러 수많은 마디를 만드시고, 우리의 성인을 촉구하십니다. 이 마디를 극복하면, 틀림없이 뭔가 큰 리의 진전이라는 결과를 마련해 주시리라 생각 하는 것입니다.  

마디는 새싹이 트는 시순입니다만, 교조님께서는, 그 당시에 부러져 가는 것도 마디에서라고, 운명의 갈림길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디에서 싹이 트는지,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이 지경이 되어 버렸다고 해서, 마디에서 부러져 버리는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유달을 통해, 마디를 산 마디로 삼기 위한 큰 마음가짐에 대해, 진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터전을 그리워하며, 오로지 어버이신님의 의도에 의지하는 가운데, 과연 그렇구나 하는 날을, 반드시 나타내 보여 주신다. 50년에 걸친 교조님 모본이야말로, 즐거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라고, 지금은 용솟음칠 수 없다 해도, 반드시 앞날에, 과연 그 마디가 있었기 때문에, 구제한줄기의 어버이마음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구제한줄기의 어버이마음을 의심하지 말고, 끝까지 믿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지금 바로, 아주 어려운 신상 가운데 걸어가시는, 진주님께서 일러주신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서로 함께 격려를 하고, 용솟음치게 하면서,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마디를 살리는 마디로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좋고 나쁨의 판단기준이나, 인간생각을 버리고, 어버이마음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안에 있는 선과 악 등등의 마음의 자로, 나타난 사실을 재려고 합니다. 법은 반드시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을 나누어서, 그 결론을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