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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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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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조140년제 삼년천일 연제활동에 대해서, 교조님으로부터 터전의 출장소로서 허락받고 있는 모든 교회에 대해서, 10년에 한 번인 본부순교로서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확대로 인하여 3년 만에 여러분과 뵙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터전에 돌아가고 싶으실 것입니다. 또한3년 동안 제한이 여러가지 있어서 고생도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이 코로나 감염 확대에도 어버이신님의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지금부터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서투른 한국말이지만 편안한 자세로 마지막까지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교조님 연제의 의의

교조님께서는 1838년에, 순각한의 도래와 함께 월일의 현신으로 정해지신 이래, 즐거운 삶을 향한 유일하고 절대적인 길을, 50년의 오랫동안의 걸쳐 몸소 걸어 주셨습니다. 50년의 발자취를 모본의 길이라 부릅니다. 모본의 길의 마지막 하루가 된 것이 1887년 음력 정월 26일이며, 그 하루를 우리는 교조님 연제의 으뜸하루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연제의 으뜸하루에 일러주신 모본의 길의 마지막 깨우침이란, 근행에 대한 진실을 살펴보시는 어버이마음이었습니다.  

교조님께서는 이제까지 자녀에게 주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미쳐 주지 못 했다.” 라고, 인간의 마음성인이 느리기 때문에, 어버이로서 주고 싶어도 주지 못 했던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그 원통함이란, 그 당시에는 공인되어 있지 않은 가르침이라서 자유롭게 전할 수는 없었다는 것. 게다가 허락 없이 무단으로 사람이 모였다는 것조차도 단속 대상이 되며, 1870년대 후반부터는, 재판 없이 경찰이 단독으로 벌칙을 줄 수 있는 법도 생기고, 그 모순이 이 길에 대한 박해로 이어져, 특히 근행을 충실히 올리는 것에 대해서는, 근행을 올렸다고 해서 고령이신 교조님을 감옥으로 열여덟번이나 연행해 갔습니다.  

사람들은 교조님의 몸을 걱정하는 나머지, 근행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 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진퇴양난 속에서,인간생각을 거듭하는 선인들에게 교조님께서는, 月日이 있어서 이 세계가 있고, 세계가 있어서 온갖 것이 있다. 온갖 것이 있어서 인간이 있고, 인간이 있어서 율()이 있다. 율이 있어도 마음작정이 제일이야.” 그리고 더 엄하게 율이 두려운가, 신이 두려운가.” 라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근행을 충실히 올려야 한다는 철저한 신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간의 형편이나 입장과, 세계구제를 위해 근행을 충실히 올리는 것을 촉구하시는 어버이의 의도 사이에 끼여, 난처하면서 거듭 생각하신 끝에, 1887년 음력 정월 26, 초대 진주님을 중심으로 선인 선생님들은, 제 몸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굳은 결심아래, 대낮에 당당히 12장 근행을 올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인간생각을 버리고 필사적으로 올리는 근행을, 교조님께서는 아주 만족스럽게 받아들이시고, 그것이 바로 월일의 현신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면서, 그때까지 이제까지 주고 싶은 것도 있었다.”라는 어버이마음 그대로, 세계구제를 위한 다음 준비로서, 25년 앞의 수명을 줄여서 현신을 감추시고, 박해나 탄압의 손길이 완전히 미치지 않는, 존명의 활동으로서, 시간적, 물리적 공간을 초월하고, 용재들의 진실한 마음에 듭시어, 세계구제에 나서게 되신 것입니다.

그 어버이마음이 교조 존명의 수호입니다. 선인들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현신을 감추신 사태에, 한번은 비탄에 잠겨 망연자실했습니다만,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지금까지와 똑같이 으뜸인 집터에 머무르면서, 이제부터 구제를 한다는 지도말씀을 순직하게 받아들여, 진실한 마음으로 신앙하는 사람이 한 사람, 더 한 사람, 마음을 다시 고쳐먹고, 근행을 충실히 올리고, 수훈의 리를 전하는 것으로 정성을 다해서 남을 구제하는 일에 힘쓰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지금까지는 교조님께만 보여 주시던 신기하고 진기한 수호를, 근행과 수훈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도 보여주신다는, 그러한 구제활동의 실천을 통해서, 교조 존명의 활동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신을 감추신 이듬해인 1888년에, 최초로 교조님년제를 집행할 때, 이 길에 대한 탄압은 계속해서 심한 것이었으므로, 연제 집행을 공공연히 세상에 알리지 않았는데, 교조 존명의 활동에 용솟음친 선인들은, 연제 당일에 어쩌면 3만 천명이나 되는 참배자로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마을 안에 있는 하나의 주택 크기의 터전, 밀려오는 사람들로 붐비는 상황에 이르러, 소란을 듣고 찾아온 오미와(大神)신사 신직자들이 트집을 잡아, 경찰까지 들이닥쳐서, 제전은 어쩔 수 없이 중지되고, 신자들은 억지로 집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터전에 돌아온 선인들은 또 다시 아주 큰 원통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교조님년제의 3년 전인 1889117일의 지도말씀에, 모본의 길을 걷지 않으면 모본은 필요 없다. 모본을 넣어두기만 해서는 아무것 도 안 된다. (중략) 말로 다 할 수 없고, 붓으로 다 적을 수 없는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천년이나 2천년을 걸은 것은 아니다. 불과 50. 50년 동안의 길을, 50년이나 30년 이나 걸으라 하면 안 될 테지. 20년이나 10년을 걸으라고도 안 한다. 그저 10 년 가운데 셋이야. 사흘 동안의 길을 걸으면 되는 거야. 기껏 천날의 길을 걸으라고 하는 거야. 천날의 길이 어려운 거야. 모본의 길밖에 길이 없는 거야. 아무리 서둘러도 서둘러도 안 되는 거야. (중략) 3년만 견디면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다. 고작 그것도 모른다. 그래서 모두들 하나하나 진실을 모아주도록. 불과 3년을 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이 나타난다. (중략) 3년만 이 길을 걸으면 궁핍해지려고 해도, 고생하려고 해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있습니다.

이 지도말씀에 담긴 크나큰 어버이마음을 생각해 보면, 1887년 연제의 으뜸하루에, 선인들이 필사적으로 충실히 근행을 올렸다는 진실에 대해서, 월일의 문을 열고 교조님께서 존명으로 활동하러 나가셨다는 각별한 어버이마음은, 연제의 으뜸하루에 한정된 수호가 아닙니다. 앞으로도 교조님연제를 향한 삼년천일에는, 각별한 구제의 순풍을 받는 구제의 시순으로써 어버이가 활동해 주십니다.

그래서 연제를 향한 삼년천일에는, 인간생각을 조금만 참고, 모본의 길을 실천해 달라. 그 진실을 어버이는 절대로 못 보고 넘기지는 않는다. 따라간 만큼의 진실은 궁핍해지려 해도, 고생하려 해도 못 하고, 운명의 씨앗으로서 받아들인다고 확실히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여담입니다만, 제철, 시순이란 무엇인가요?

어버이신님의 품속에서 삶을 부여 받고 있는,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생명을 지키고 생성하며, 발전해 나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로서, 제철에 맞춰서 산다는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철에 맞추는 행동이란, 결코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제철에 철저히 맞추는 것이 오히려 기쁨도 많고, 마음도 편하며, 보다 생명을 즐길 수 있는 필수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여름이 되면 옷을 얇게 입고, 추워지면 두껍게 입어서 따뜻하게 하지만, 그것은 몸에도 좋고 마음도 편하기 때문입니다.

사냥 채집 민족인지 농경민족인지 생활 기반에 차이는 있지만, 사계절의 변화에 맞춰 씨앗을 뿌리거나, 동물의 습성이나 초목의 모습을 보고 사냥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제철에 맞춰서 확실히 씨앗을 뿌리고, 시순에 해야 할 정성을 기울임으로써, 보다 많은 수확이나 식량을 얻을 수 있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혹한 자연 환경을 극복하여, 번영을 거듭하는 생물 중에 철새가 있습니다. 철새인 쇠재두루미는 8천 미터를 넘는 히말라야 산맥을 띄어 넘어, 생명을 이어나갑니다. 겉모습은 아주 가는 이 철새가, 후지(富士)산의 두 배나 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지상의 벽이라고도 불리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날아갑니다만, 이 철새에 그럴 만한 힘은 없습니다. 쇠재두루미는 그 시순, 그 순간에만 불어 올라가는, 상승 기류의 힘을 알고 있어서, 제철에 부는 바람을 타서 불어 올라가면, 다 같이 날개를 열어서 바람에 몸을 맡깁니다.

거기에 제 힘을 훨씬 넘는, 높은곳에 몸을 옮기면서, 거기서 종족의 번영을 거듭해 온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제철이 있다. 도리를 깨우치면 모두 시순이 있다. 시순을 놓치면 씨앗을 뿌려도 싹트는 것도 있고, 싹트지 않는 것도 있다. 시순을 놓치면 마음이 편하지 않는다. 어떠한 일이든 시순을 놓치면, 꽃 한송이만으로 떨어져 버리면 아무것도 안 된다. 시순이 다스려지면 영원하다고 깨우쳐 두마.” (1895512)

시순을 놓쳐서 뿌린 씨앗은, 열매를 맺을 리가 없다고 깨우쳐 주십니다. 우리들 이 길의 용재중에는, 어버이신님의 수호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 몸, 내 집의 인연을 닦고, 주위 사람들이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어버이신님께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어버이신님의, 구제한줄기의 어버이마음을 받드는 다시없는 시순이, 교조님의 연제이며, 그 시순에 뿌려야 할 씨앗을 뿌리고, 시순에 걸맞은 정성을, 삼년천일에 기울인다면, 각자의 덕이나 힘을 훨씬 넘는, 훌륭한 경지나 운명으로 반드시 이끌어 주시고, 영원히 그 진실은 효험을 나타낸다고 일러주십니다. 시순에는 반드시 시작이 있고, 그리고 끝이 오게 됩니다.

이제부터 3년 동안에 어떠한 씨앗을 뿌리겠습니까? 용솟음치시겠습니까? 제 몸 생각이나 불평불만의 씨앗을 뿌리겠습니까? 다음 시순까지의 10년 동안, 선택할 수 없는 하늘의 혜택, 운명이 정해집니다. 두번 다시없는 시순을, 단단히 마음을 작정하여 어버이마음에 충분히 보답해야겠습니다.

 [유달 제4]

이러한 10년에 한번인 시순에 발포하신 유달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바로 시순의 순풍을 받는 날개에 대해서 일러주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날개가 되는 첫째로서는, 유달 첫머리에 입교189(2026)년 교조님140년제를 맞이함에 즈음하여, 생각하는 바를 밝혀, 전교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자 한다.”라고, 전교의 한마음 한뜻이라는 의도가 적혀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 길에서는, 항상 터전에서 내려주시는 어버이의 목소리가 구제의 생명줄로서, 신앙하는 사람은 어버이의 목소리에 하나 되어, 리의 발걸음을 거듭하는 것입니다.  

교조님께서 직접 일러주신 말씀, 본석님을 통해서 받든 지도말씀, 그리고 현대에는 어버이신님께서 정하신 그대로, 교조님의 대리로서 진주님의 말씀을 구제의 생명줄로서 받들고 있습니다. 지도말씀에

되든 안 되든 확실히 진주가 직접 하는 말 듣지 않으면 안 된다.” (1891.11.1) 이 길의 진주, 말씀이 하나의 리.” (1893512일 밤)  본부라는 리가 있기 때문에, 곳곳에 교회의 리도 있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의 숨과 같은 것. 이 리를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하늘이 섭리할 수 없다.” (1906 1213) 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섭리, 시순의 리를 받들기 위한 마음의 날개는, 교회에 이어지는 모두가, 진주님의 말씀과 숨 하나가 되어, 걷는 것이 전제 조건이라고 명확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다시 여담입니다만, 한마음 한뜻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책임이나 책무가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작은 손목시계에는 300을 넘는 부품이 있고, 모두가 이어졌기 때문에 동작합니다. 눈에 안 보이는 작은 막대라서 하나쯤 빠져도 상관없다고 해서, 하나가 전체에서 떨어진 순간에 시계는 망가질 것입니다.

 

나 혼자쯤이야.’ 라는 생각은, 한마음 한뜻의 큰 폐가 됩니다. 뜻하지 않는 티끌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여, 시순의 발걸음을 내딛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