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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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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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47

잡은 손을 결코 놓지 않으리라

 

박지수

 

어느 봄날 아침이었다.

어느 분에게 카카오톡을 보내 안부 인사를 여쭸더니 전화를 하셨다.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그건 신님의 테스트인 줄 아시죠? 신님께서는 선생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가? 마음이 밝고 맑은가?’를 시험해 보시는 것이지 않을까요?”

맞아요. 그래요.”

밉고 화나게 하는 상대방을 위해 기원 드리면 마음이 많이 편안해 지지요. 미움, 화라는 티끌에 휩싸이지 않고, 오히려 이 기회에 그런 티끌을 털어버릴 수 있는 테스트에 합격하시길 빌어요.”

이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희망이 되어, 길이 되어

그분의 고민은 우리에게는 왜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어른이 안 계실까? 불교나 기독교처럼... 불교만 해도 지금 현재 정토회 법륜스님의 법문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듣고 있는가 말이다. 인터넷으로 늘 즐겨듣는다는 말씀을 하시며 부러워하셨다. 나 역시 같은 고민으로 오랫동안 마음이 힘들었던 터라 충분히 공감한다.

이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정토회에 대해 눈여겨보면서 법문을 들었던 터라 출가를 한다면 그 쪽으로 가는 게 어떨까까지 생각하였다. 이길에 이끌려오기 전에 심각하게 비구니 스님이 되려고 출가를 고민한 적이 있었다. 워낙 내 성향이 불교와 잘 맞는데다 세상보다는 구도에, 출세보다는 마음공부, 수행에 관심이 많아 그쪽 공부를 깊이 하고 싶었다.

한데 신님은 내 길을 다르게 열어주셨다. 그쪽이 내 길이 아니라고. 내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몸으로 나타내어 이 길로 강하게 끌어 당기셨다. 출가하려던 결정적인 순간에 반전을 일으켜 신님의 발길에 채이고 손목을 잡혀 여기까지 이끌려온 것이다.

이길에 들어와서 늘 아쉽고 목말랐던 것은 존경할 만한 어른, 내가 정말로 따라 걷고 싶은 어른을 만나지 못한 것이었다. 내 자기사명서에는 얼굴만 보거나 모습만 보아도 따르고 싶은 사람, 마음이 편안해 지는 사람이 되리라는 소망이 있다. 하지만 이길 안에서 그런 분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많은 분들이 존경스러웠지만 그것을 무색하게 만드는 단점이 역시 바로 보였다. 그런 것은 내가 교만한 탓이고, 이길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교직자나 선인들이 적은 수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다른 이유도 역시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존경할 만한 분들은 내 눈에 띄지 않게 다 숨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다행이 세월이 많이 흐른 뒤 터전 교회본부에서 교회장 자격 검정강습 후기를 받을 때 비로소 내가 본받고 싶은 얼굴들 두 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저런 분이라면 따라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행복해 했던 기억이 새롭다.

전화 하신 그 분이 그런 아쉬움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렇죠. 저도 오랫동안 갈망해 왔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제가 마음을 작정한 것이 있습니다. 존경할만한 분을 만날 수 없는 이유가 어떤 것이든 우선 제쳐 두고 저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노신의 시 어제는 없었던 길에 이런 게 있지요.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희망을 이야기하고 바램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위의 시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우리 눈앞에 그렇게 훌륭한 인물이 있어서 우리 모두가 그분만 따르게 되면 좋겠다고 원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생각하는 답은 이렇습니다.

[내가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이다. 내가 희망이 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을 갈망하는 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다면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신님은 그러면 네가 그런 마음 성인이 되라고 하시지 않겠는가.] 그렇게 저는 답을 찾아서 노력중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훌륭하시니 이 말의 의미를 충분히 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패배에 젖어 이길은 안된다고 어렵다고 말하기 전에 나 자신이 희망이 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신님 뜻에 맞다고 믿습니다. 내가 먼저 희망이 되어 보려는 작정과 실천을 다하는 것이 우선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어둔 동굴에 초 한 자루 밝히는 사람

또 그런 말씀을 하셨다.

이길의 선배선생님들이라 할 지금 생존하시는 초대들이 너무나 영혼이 어둡고 배우지 못해 하는 행동도 정말 수준 이하인 사람이 많다. 종교인이라고 보기에도 너무나 챙피하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못 미친다. 서로 험담하고 부정적이고 나쁜 말들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이런 수준 낮은 사람들 속에 끼이고 싶지 않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고 외롭다.”

 

그렇다. 이길이 좋아 입신한 특별히 신상 사정없이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사람들, 2, 3대 용재나 교회장들은 특히나 고민하는 내용들이라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것으로 생각된다. 나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많은 회의와 의문과 절망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기에 너무나 공감한다.

저 역시 그 말씀에 100% 공감합니다. 우리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지금 선생님이 수준 이상의 삶을 사시고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으신 것은 참으로 고마운 신님의 수호이겠지요? 그런 선생님을 이길로 이끄신 신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렇게 많은 수호를 받으신 선생님을 이렇게 수준 낮은 분들 속으로 보내신 이유가 뭘까요? 그게 선생님을 괴롭히고 고생시키기 위해서일까요? 마음을 암담하게 어둡게 가지고 절망하라고 보낸 것일까요? 아니겠지요?

저는 이길의 가르침에서 느끼는 매력 중 하나는 밝게 깨닫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신상, 사정에서도 밝게 깨닫기를 신님은 늘 촉구하신다고 믿습니다. 밝게 깨달아서 마음이 밝아지면 그것이 수호라고 믿습니다. 만약 어떤 깨달음이 어둡고 침울해지게 만든다면 그것은 바른 깨달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래오래 신앙을 하였더라도 즐거움만으로서 가득해야지(5장 다섯에) 하신 신악가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겠어요?

신님께서는 이길을 통해 언제나 우리들이 밝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시기 때문에 밝게 이끄시는 것이지요.

옛 성인의 말씀에 천년동안 어두웠던 동굴이라도 촛불 한 자루 밝히면 순식간에 환해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란 그 촛불 한 자루 밝히는 사람이 아닐까요? 물론 수준 높은 이른바 세계적인 종교인 가톨릭이나 불교나 개신교에 가서도 선생님은 충분히 빛나게 잘 하시리라 믿지만 지금 여기, 이길에 보내신 이유는 여기에 촛불 한 자루 밝히는 게 더 필요했기 때문 아닐까요? 여기가 저기보다 더 어둡다면 여기에 더 밝은 불빛이 필요한 법입니다. 여기에 더 막중하고 큰 사명이 있기에 보내신 게 아닐까요? 아무리 오랫동안 어두웠더라도 단 한 자루의 초로 밝아질 수 있는 것처럼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소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소명을 잊고 절망하고 회의하기 보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요즘 집중하는 구제 - 더러운 진창에 손을 내밀어

우리는 언제나 저 아래 진창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에게 손 내밀기를 두려워합니다.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용재된 사명으로 잠시 손을 내밀어보지만, 어느 순간 그 더러움이 싫어서 손을 빼 버립니다. 내 손에 더러움이 묻을까봐서요. 이게 지금까지 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물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선 나도 옷이 젖거나 손에 물을 묻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러움이 묻은 사람의 옷을 벗겨주고 새 옷을 입혀주기 위해선 내 손에 더러움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더러움이 무서워 구제의 손길을 거둔다면 우리의 존재 이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참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그 진창에서 헤매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제 손과 마음 어느 부분에 더러움이 묻고 젖습니다. 그 더러움과 축축함이 싫고 힘이 듭니다. 밝음과 맑음 그리고 따뜻함을 늘 지향하는 저인지라 그런 더러움과 부정적인 감정들과 괴로움이 싫고 고통스럽습니다. 제가 오염되는 것 같아 도망가고 싶습니다. 잡은 손 탁 털어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길에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처음에는 잘 잡아주다가 어느 순간, 그 손을 탁 놓아버립니다. 외면해 버리는 것이지요. 그들의 고통을 듣는 것이 힘겹고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 너무나 버겁고 고통스러워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던 것이지요. 수없이 반복해 왔던 구제에서 겪은 좌절을 이 절대 절명의 130연제 시순에 또다시 반복할 수 없다는 뼈저린 자각이 일어났습니다. 옆에서도 촉구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날로부터 네 달이 지난 지금까지 저는 힘겹게 버티고 손 놓지 않으려고 저 자신과 싸우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수 있도록, 어둠이 밝아질 수 있도록 힘껏 마음에 주름을 펴주는 일에 매달립니다. 수시로 올려야 하는 밤 기원 때문에 밤에도 몇 번이나 깨어나 기원 드려야 하니 잠을 제대로 못 잡니다. 낮에도 수시로 오는 구제요청에 일상의 일들이 밀리고, 체력이 딸려 때때로 코피가 나고 몸살이 납니다. 기원하거나 근행을 올린다고 잠시 엎드리면 여지없이 몰려드는 졸음에 잠이 들어버립니다. 엎드린 그 순간이 너무나 편안하게 느껴지고 누우면 괴롭습니다. 잠이 만성적으로 부족하다보니 늘 비몽사몽 헤매입니다. 저 자신이 감당할 수 없고 버거워서 신님께 울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정말 힘들다고 신님께 온갖 투정을 부리며 울며불며 하소연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대수냐고 어버이신님은 말씀하십니다. ‘상대는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데 네가 잠 못 자는 것, 몸살이 나는 것, 코피 나는 것, 설거지거리가 밀리거나 청소가 밀리는 정도가 뭐 그리 대수냐고 몰아붙입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코피 나서 죽을 것도 아니고, 청소 좀 밀린다고 구제를 포기할 수는 없지요. 할 수 없이 잡은 손을 놓지 않겠다고 굳게 다시 작정하며 기원을 드립니다. 그렇게 힘을 얻어서 다시 자신을 맑히고 밝게 만든 뒤 다시 구제에 나섭니다.

제가 지금 구제를 위해 손을 잡은 사람들은 너무나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최첨단인 미국의 뉴욕에 삽니다. 그들의 머리는 명석하여 명문대를 졸업한 수재들이고, 탁월한 재능은 그 누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경제력은 동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성을 집으로 삼을 정도이고, 그들의 외모는 연예인을 능가합니다. 그들은 친필에 말씀하신 고산 중에서도 고산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구제 요청에 손을 내밀어 잡았을 뿐인데 알면 알수록 질리게 만드는 그들의 조건과 배경들이 주눅이 들기도 합니다. 겉보기엔 아무 것도 부러울 것도 없는 다 가진 그들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제게 왜 손을 내미는 것일까요?

이길의 가르침대로 늘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과 바르게 걷고자 노력했기 때문 아닐까요? 마음이 어두운 사람을 보면 어떻게든 밝혀주고 싶었습니다. 사람에 대해 수없이 속고 실망해도 믿고 또 믿으며 기다려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들에게 없는 따뜻함과 밝음과 여유를 가졌는지 모릅니다. 그들과 저는 정반대의 삶입니다. 제가 가진 거 눈에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보다 잘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제게 구제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불공평하게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 모든 것을 가졌지만, 마음의 평화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에 이르면 공황 상태(멘붕)에 빠져 버립니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조그만 일에도 화를 내면서 주먹이나 폭력이 바로 튀어나옵니다. 그 결과 수시로 코뼈가 부러지거나 피흘리며 다치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사소한 기다림에도 견디지 못하고 파닥거립니다. 마치 도마 위에서 산 채로 소금이 뿌려진 생선을 보는 느낌입니다. 작은 일에도 금방 마음이 죽어버리고 부정적으로 변해버립니다.

의심 많고 불안하고 조급하고 부정적인 그들에게 이길의 가르침을 적극 전하며 제가 가진 여유와 긍정과 따뜻함으로 위로하다 보니 그들에게도 조금씩 평화로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을 듣고 느끼면 참으로 기쁘지요. 이것이 구제하는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문득 제가 했던 말들이 그들에게 스며들어서 다시 그들의 입으로 나올 때, 그 말을 듣는 제 마음엔 기쁨이 넘쳐납니다.

어버이신님께서 제게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구제를 해보라고 하십니다. 세속적인 그 모든 것을 가졌지만 불행하고 힘든 그들에게 이길의 가르침으로 마음의 평화를 주라고 하십니다. 모든 힘과 진실을 다 기울여 전심전력하는 이 미션을 해나가면서 저는 이길의 훌륭함을 실감하며 함께 조금씩 성인해 나가는 중이랍니다.

저는 이 미션을 통해 제게 가장 취약한 부분에 대해 집중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구제과정에서 있을 모든 상황을 다 제시하면서 신님은 저를 혹독하게 훈련시키고 단련시키십니다. 어둠, 부정적인 상황과 감정, 폭력이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견디고 이겨나갈 힘을 키우게 하시는 걸 느낍니다. 정말로 이 미션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얼마나 마음의 그릇이 커질지, 신앙의 중심이 단단해질지 스스로 기대됩니다.”

 

산언덕 가시밭 낭떠러지 비탈길도 칼날 같은 험한 길도 헤쳐 나가면 1-47

아직도 보이는 불속 깊은 물속을 그것을 지나가면 좁은 길이 보이느니 1-48

좁은 길을 차츰차츰 넘어가면 큰길이야 이것이 확실한 본길이니라 1-49

 

이렇게 아침부터 긴 통화를 하였다. 밝아진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날아갈 거 같다. 이렇듯 이길의 가르침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