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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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33

 

 

마음 청소

 

박지수

 

1833야 기원수련회가 얼마 전에 열렸다. 수련회에는 매일 청소 히노끼싱하는 시간이 있다. 청소 히노끼싱 시간에는 먼저 구역을 말해주고 자신이 하고 싶은 청소구역에 손을 들어서 자원하라고 한다. 물론 어떤 때는 자기가 제일 하기 싫은 곳, 하기 싫어하는 청소를 하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그래야 자신의 인연을 자각하고 납소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청소 소임이 정해지면 같은 청소구역을 맡은 사람끼리 의논을 하도록 한다. 매일 하는 청소라고 해서 무질서하게 아무렇게 하도록 하지 않는다. 반드시 의논을 거치게 한다. 어떤 방법과 순서로 할 것인지, 누가 어느 부분을 맡아서 청소할 것인지를 정한다.

그런 다음, 청소할 때 마음가짐을 되새기기 위하여 청소히노끼싱에 대한 의미(멘트)를 읽어준다. 청소구역인 방바닥이나 화장실이 곧 내 마음 속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닦듯이 청소하기 위해서이다.

 

청소히노끼싱

 

먼지를 털어낸다.

방바닥을 닦는다.

이 단순한 청소가

청소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숨쉬는 삶을 건강하고 맑게 열어내는 작업이다.

내 몸, 내 마음, 내 영혼을 씻어 내고, 닦아내서 맑게 하는 일이다.

 

청소는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며, 정성을 드리는 일이다.

세상을 향해 내 마음을 시원스레 열어내는 고귀한 일이다.

이것은 더 큰 를 만나게 하는 몸짓이며,

어버이신님을 공손히 받드는 일이다.

 

주변 안팎의 먼지를 털고 깨끗하게 씻어내자.

내 안에 쌓인 티끌을 털어내자.

이 자그마한 일인 청소가

바로 내 영혼을 맑히고, 주변을 아름답게 하여

어버이신님의 몸인 이 세상 한 부분을

더욱 빛나게 한다.

 

청소는 청소만의 일이 아니다. 여기 있는 이 공간의 나무들이, 이 화장지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을 들였을까를 생각한다. 비록 지금 내 눈앞에는 없지만, 한 사람씩 떠 올리며 감사하다는 인사와 행복을 축원한다. 나아가 이 공간을 사용했고, 앞으로 사용할 모든 사람들까지도 행복과 건강을 축원하기도 한다. 단지 먼지를 털고 걸레질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공간을 행복과 감사로 채우면서 청소를 실시한다.

그런 다음 청소를 끝낸 뒤 다시 모여서 히노끼싱한 소감나누기를 한다. 어떤 마음, 어떤 생각, 어떤 느낌으로 청소를 했고, 기분이 어땠는지 서로 나누기를 한다.

이렇게 청소히노끼싱을 하다보면 청소는 단지 공간 정화만이 아니라 내 몸, 내 마음, 내 영혼을 닦는 일임을 체험으로 알게 된다.

 

어쩌다 옥수물을 먹다 보니 회랑 바닥에 얼룩이 여러 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뭔가 단 것을 먹고 흘린 것 같았다. 이 회랑은 조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어서 닦는 곳인가. 그런데 이렇게 큰 얼룩들이 있다니. 의아했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니 회랑을 닦는 시간이 주로 밤이나 새벽일 것이다. 어둠 속이나 아니면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신전 불빛에 의지해 기어서 닦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두워서 바닥에 얼룩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한 가지 짐작되는 이유는 마른 걸레로만 닦기 때문이리라. 마른 걸레로는 먼지, 티끌, 머리카락 같은 것은 닦여 나오지만 찌든 얼룩은 그냥 지나치게 되고, 걸레에 묻지 않는 티끌은 밀려다니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가끔은 물기가 배인 촉촉한 걸레나 때로는 쇠수세미로 청소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리고 환한 햇살 아래 혹은 불을 환히 밝혀 먼지들이 떠 다니는 것이 보이게 해서 청소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고 밀대로 방바닥을 닦아보면 여전히 남아있는 얼룩을 보게 된다. 아무리 젖은 걸레고, 밝은 불빛 아래라고 해도 그냥 지나쳐 버린 얼룩들이 많다. 다 알다시피 이때는 기어서 닦을 수밖에 없다. 기어서 바닥을 닦는다는 것은 자세히 살펴서 얼룩을 놓치지 않고 닦기 위해서다. 밀대로 서서 닦는 일은 쉽긴 하지만 몸을 낮춰서 자세히 살피는 일은 아니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보면 깨끗이 청소를 하고 싶을 때는 몸을 낮춰서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밀대로 서서 아무리 열심히 닦는다 해도 닦아내지 못하거나 발견하지 못하는 티끌들이 많다. 그리고 깨끗한 곳은 구태여 집중해서 빡빡 닦을 필요는 없지만 얼룩이나 찌든 때는 한두 번 걸레질만으로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쇠수세미나 물걸레로 집중해서 닦아야 한다.

 

청소는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한 마음청소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벼운 티끌이야 아침 저녁으로 근행을 보면서 털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슴속에 쌓이는 찌든 때나 구석진 티끌은 이것만으로 털리지 않는다. 그래서 도보실천, 단식, 포교전도, 월차제 참배, 12장 근행, 상급교회 일참, 각종 연성회나 수련회를 참가함으로 해서 찌든 때, 구석진 티끌을 털어내는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이중에서 특히 33야 기원수련회는 찌든 때 중에서도 찌든 때를 짧은 기간에 집중해서 닦아내는 기회라고나 할까. 수련회를 참가 하다보면 어두운 방을 환하게 불을 밝히듯 마음이 밝아져서 상대라는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찌든 티끌을 더 잘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묵은 때, 시커먼 자국, 구석진 티끌을 털어낼 수 있는 대청소 기회가 생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청소를 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일까. 우선 자신의 티끌을 발견해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티끌을 발견하면 그것을 닦아낼 노력, 작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도구를 선택하게 된다. 마음의 티끌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상대라는 거울과 밝은 불빛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청소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내고, 몸을 낮추고, 도구를 갖추어서 하게 된다. 이런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 수련회라고나 할까.

한편, 실천도 다양한 실천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티끌도 여러 가지 다양하게 많기 때문이다. 한 가지만 해서는, 혹은 좋아하는 것만 해서는 여러 가지 티끌을 털 수 없는 노릇이다. 한 가지 실천을 꾸준히 몇 십 년 하는 것은 참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양한 실천을 섞어서 한다면 더 많은 깨달음과 티끌이 털리지 않을까. 마치 바닥만 닦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선반 위의 묵은 먼지를 털어내야 하고, 창문을 닦아내야 하고, 냄비나 솥에 오래 눌러 붙은 때를 닦아내야 하고, 창고 정리, 정원 손질을 해야 하듯이 말이다. 한 가지 실천만 계속 한다는 건 그 중 하나만 줄기차게 하고 있는 셈은 아닐까. 평소에 하지 않는 작정과 실천을 해야만 새로운 수호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믿는다.

이렇게 청소에는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가 많다. 청소가 갖는 상징성을 미루어 보면 어떤 종교에서든 청소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청소는 곧 수행이라고 할 정도이며, 청소하는 넓이와 깊이는 그 사람의 인격에 비례한다고 까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