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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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32

 

내 마음의 평화, 세상의 평화

 

박 지 수

 

9월 호에 실었던 지네이야기를 읽고 많은 분들이 한마디씩 하셨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해서 이 작은 것들과 평화롭게 공존해야 할 이유와 그 밑바탕 생각을 나 자신 스스로도 정리해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른바 지네이야기 2탄이라고 할까? 아니면 이어지는 평화이야기라고 이름 하면 좋을까?

 

대충 주변의 반응들은 이랬다. ‘파리나 바퀴벌레도 징그럽고 싫은데 지네는 죽여 마땅하다며 진저리를 친다. 내게 해를 끼치니 당연히 죽여야 한다. 보기에도 끔찍하니 밉고, 없어져야 할 동물이다.’ ‘약을 뿌리든지, 어떻게 하든지 반드시 집에는 못 들어오게 해야지. 그걸 어떻게 그냥 고이 내보내주느냐?’ 그리고 자신이 아는 지네퇴치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가끔은 너무 작은 곤충들까지 그렇게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반응까지....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많은 생각들과 말이 마음속을 지나간다. 일일이 대응하기가 힘이 들고, 보통은 웃고 넘어가지만 마음속으로 여간 씁쓸한 것이 아니다. 해서 언젠가는 이어지는 평화이야기를 쓰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종교, 영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른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 속엔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연과 동식물과 더불어라는 전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문명이 인간만이 잘 사는 세상, 아니 돈 많은 인간만이 살만하고 행복한 세상을 추구하다 보니 오늘날 이런 엄청난 환경문제와 전지구적인 온난화문제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모두가 다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라고 하면서 그 모두에 왜 사람들만!’이라 생각하는 지, 그 좁고 이기적인 생각이 놀랍다. 과연 인간만이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 그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이 이른바 다른 생명의 죽임을 바탕으로 한다면 진정한 행복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내가 그 인간이란 종에 속하는 것이 부끄럽고 미안하다.

거의 십 여 년 전에 어느 영성 수련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어느 프로그램에서 참가자 중 누군가의 양말을 벗게 하여 우리들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러면서 이 양말이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력()이 들었을까를 생각해서 이야기하란다. 구체적으로 몇 명 정도인지, 또 왜 그렇게 생각하는 지 근거를 대라 한다. 스물이 안 되는 참가자들은 저마다 2, 5, 7, 10, 혹은 25, 50, 100, 1000명 정도를 이야기 했다.

2명이라고 한 사람은 양말 만든 공장 사람 1, 그것을 산 사람() 1, 그렇게 두 명이란다. 5명은 양말 만든 사람1, 양말을 중간에서 파는 사람 도매 1, 그걸 떼다 파는 소매 1, 양말 사온 엄마1, 신은 나 1, 5! 10명은 양말을 만든 사람1, 포장한 사람1, 포장하여 싣고 온 트럭기사 1, 짐을 내려 준 일꾼 1, 중간 유통에 2, 양말 파는 가게 주인 1, 양말을 사온 아내 1, 신은 나 1, 저기 가지고 계신 진행자 1, 그러니까 10!

이렇게 차츰 자신의 생각들을 이야기하다보니 중간에는 그 양말을 만든 원 재료가 브라질에서 온 면화인지, 아니면 아프리카 어디에서 온 면화인지, 면화를 가꾼 사람, 그 면화를 가꿀 때 뿌린 농약이나 비료를 만든 사람은 몇 명인지? 그 농약이나 비료를 만들기 위한 재료는 또 누가 생산한 것인지? 그러면 그것이 비행기로 왔는지, 배로 왔는지? 아니면 차로 수송을 했는지? 그 비행기를 만든 사람은 몇 명인지? 아니면 배를 만든 사람은 몇 명인지? 혹은 수송한 트럭를 만든 이는 몇 명인지? 그리고 그 차가 다닐 고속도로를 만든 이는 몇 명인지?

또 양말을 표백하거나 염색한 사람은? 표백제나 염색제의 원재료는 어디서? 그것이 양말 공장까지 오기의 과정은? 또 양말 포장지의 인쇄는? 포장지 종이의 원 생산지는 열대림일 텐데 그것은 어디서 왔는지? 그 종이는 어떤 경로를 통해 양말 공장까지 가게 됐을까?

그리고 양말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불을 켜거나 기계를 돌리는 전기가 있어야 되고, 석유가 있어야 될 것이다. 또 밥을 먹어야 일을 할 수 있으니 쌀농사와 채소를 기르는 농부, 물고기와 어패류를 잡아오는 어부, 소나 돼지나 닭, 오리를 키우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 외 그것들을 수송할 트럭, 기사, 도로, 석유 따위가 있어야 되고, 식당이 있어야 되고, 식당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장비 물건과 사람이 있어야 되고, 사람을 보자면 석유를 시추하는 사람,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에 근무하는 사람, 비행기 기장, 배 선장, 농부, 트럭기사, 식당 주방장, 도로 건설하는 기술자, 또 그 사람들을 지탱해 주는 식구들, 그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시내버스 기사, 지하철기사, 택시기사, 혹은 철도기사까지, 그리고 또 그들이 있게 낳아준 부모, 부모의 부모,

이렇게 의식을 확장시키다보니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 사물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옆으로는 지금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동식물, 미생물, 그리고 모든 물건들이 연결되어 있었고, 시간적으로는 과거의 모든 사람들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거기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서로 얽혀 있고, 아무 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관계의 고리를 보게 되었다. 작은 양말에서 시작된 생각이 이 우주를 모두 포함할 정도로 커졌다. 놀라운 의식과 생각의 확장에 그저 멍할 뿐이었다.

그런 뒤 그 양말이 이 자리에 있기까지 내가 기여한 것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어떤 이는 고속도로 건설에 참가했고, 어떤 이는 인쇄소에 근무해서 양말포장지를 인쇄했고, 누구는 양말공장에 다니는 자식이 있어 매일 밥하고 빨래해 준다했고, 누구는 은행에 다니니까 은행이 있어서 그 양말 공장에 자금을 대출해 주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기여한 바를 이야기하였다. ? 나는 양말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그에 연결된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고, 안전하도록 열심히 기도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차근차근 따져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어느 한 생명도 따로 떨어져서 살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 세상 모든 존재들 덕분에 내가 이렇게 불편없이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사실 양말을 신기 위해 면화를 직접 길러야 된다던지, 그 면화를 직접 짜야 한다 던지, 아니면 먼 나라까지 가서 내가 수입해 와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비용이 들 것인가? 아니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연관성 속에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모든 존재에 빚을 지고 사는 셈이다. 다른 사람이 있어 내가 있고, 이 자연이 있어 내가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확장해 가면 이 세상 누군들 소중하지 않으랴? 이 세상 누군들 내 삶을 지탱해주는 은인이 아니랴? 그런데 너무나 쉽게 잊는다. 아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이길에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형제자매, 일렬형제라고 하지 않든가. 이런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받아들이며 살고 있을까. 그리고 어버이신님께서는 이 세상은 신의 몸이라고 하셨는데, 이때 신의 몸을 이루는 것이 단지 인간뿐이겠는가.

그 거대한 생명의 고리들 속에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인간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과연 수많은 생명의 고리들 속 단 하나의 종에 지나지 않은 인간이 뭇 생명들을 함부로 대하여도 되는 것일까. 이 세상에 기어 다니는 작은 것들, 꿈틀거리는 것들 그리고 동식물들 없이 인간이 과연 살아갈 수는 있을까.

나는 나, 너는 너라는 분리된 의식이 쉽게 적을 만들고, 이 세상의 전쟁을 만들고, 평화가 사라지게 하는 것이리라. 내가 있어서 너가 있고, 너가 있어서 내가 있다. 내 삶이 너로 인해 지탱이 되고 있는데 어찌 너를 함부로 할 것인가?

하지만 보통의 경우 별로 그렇게까지 생각을 이어가거나 확장시키지 못한다. 너무나 근시(近視)안이다. 눈앞에 이익만, 지금의 이익만, 인간이란 한 종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극도의 이기주의다. 신님은 이 세상에 왜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보다는 훨씬 더 많은 동물이나 곤충을 만든 것일까? 더불어 사는 것이 무엇이고, 비폭력과 평화가 무엇이지 깊이 깊이 생각해 본다.

 

어느 글에서

비폭력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만 주먹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고 있다면 주먹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비폭력입니까? 아니죠. 이미 내 마음의 적개심이 폭력을 행사했어요. 내 마음도 힘이에요. 마음은 물질과 분리되어 있지 않단 말이에요. 내가 하는 어떤 생각, 그 마음이 구체적으로 주먹이 나가게 결정하는 거잖아요. 주먹이 나가기 전에 내 마음이 분노를 일으켰다면 폭력을 행사한 거예요. 그러니까 쳤다 안쳤다, 총을 쐈다, 안 쐈다, 혹은 죽였다, 안 죽였다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비폭력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대상에 대해 연민이나 자비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는 문제입니다. 이 사람, 이 생명도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나와 같이 살고 싶어 한다,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걸 깊이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분노와 적개심으로 그 생명을 없애야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면 당연히 폭력이 행사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폭력을 쓰게 되는 마음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저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두렵고, 물까봐서 두렵고, 병균을 옮길까봐 두렵고, 모르니 더 두렵고. 두렵기 때문에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평화와 행복을 바란다고 하면서 폭력과 분노, 적개심, 미움을 보낸다면 그것이 바른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이미 우리 마음이 적개심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우리 자신을 정화하지 않고서는 이 세상의 평화나 행복을 말한다면 그것은 결국 어불성설일 뿐입니다. (생명평화등불 통권218~31).

 

이어서 한 가지 글을 더 인용하자면

더불어 살지 않으려는 마음이 전쟁과 고통을 세상에 만듭니다. 함께 하지 않으려는 마음들이, 나누지 않으려는 마음들이, 섬기지 않으려는 마음들이 세상을 병들게 하고 상처주고 있습니다. (길에서 꽃을 줍다, 48쪽에서)

 

그렇다. 꿈틀거리고 기어 다니는 것들과 더불어 살지 않으려는 마음이 아무 생각없이 살충제를 마구 뿌려대게 한다. 짜증내거나 미워하며 파리를 잡고, 바퀴벌레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죽어라며 때려잡는다. 내 피 한방울 먹었다고 미워하며 모기를 모질게 잡아 죽이지 않았던가. 과연 귀찮고 끔찍한 그들이 사라지면 내 삶이 더 빛나고 깨끗해질까? 내 미움으로 죽은 그들의 고통이 내 행복에 도움이 될까?

그들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죽일 때는 내 마음도 미움과 증오로 더럽혀진다. 다들 잘 알다시피 화를 낼 때 인간이 내뿜는 독성은 상상보다 더 크고 치명적이라고 한다. 파리나 모기, 바퀴벌레, 혹은 개미나 지네를 그런 마음으로 때려잡는 일은 곧 그 미움과 증오의 독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일이다. 그것을 반복할수록 미움과 증오가 더 크고 더 깊게 잠재의식 속으로 자리 잡아 시시때때로 생활속에서 폭발하게 된다. 마치 남의 손가락질하면 네 개 손가락이 자신을 향해 있듯이 밖으로 미움, 증오, 적개심을 뿜으면 내 마음에는 4배나 더 많은 미움, 증오, 적개심이 생겨나 자리 잡지 않을까?

함께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나누지 않으려는 마음이, 섬기지 않으려는 마음이 세상을 병들게 하고 상처주고 있다.’ 그것이 어찌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사는 크거나 작거나, 어리거나 늙었거나, 보기에 예쁘거나 추하거나, 길거나 짧거나, 기어 다니거나 날아 다니거나, 혹은 헤엄쳐 다니는 것들까지, 그 생긴 모습과 상관없이 모든 생명들을 존중하지 않는 인간의 이기심과 거만함이 이 지구를 오염시키고 병들게 하고 있지 않는가.

섭리도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가 마음 받아들이는 대로 갚아 주리라 (5-50)

이것은 무슨 말을 하거나 생각하거나 받아들이는 대로 곧 갚아 주리라 (5-52)

이 갚음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 말라 선악 할 것 없이 모두 갚을 테다 (5-53)

선한 말을 해도 악한 생각을 해도 그대로 곧 갚음을 하는 거야 (5-54)

단단히 들어라 입으로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어디서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5-87)

지금부터는 무슨 말을 하거나 생각하거나 그대로 나타난다 이것이 신기해 (6-12)

인간들은 모두 각자의 마음에 따라 월일 분간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6-97)

 

누군가가 그렇게 작고 하찮고 물기까지 하는 해로운 지네는 죽어 마땅하다고 강변했다. 그 소리를 듣고 참 섬뜩하고 무서운 사람이구나싶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작은 미물일지라도 생명이다. 그 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귀중하고 귀중한 하나뿐인 생명이겠는가? 단지 크기가 작거나 더 짧은 수명을 가졌다는 차이지, 그 생명의 무게로 볼 때 결코 그들의 생명이 가볍다고 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크기로 본다면 코끼리나 공룡은 귀중한 생명이고, 인간은 하찮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몇 천 년이나 사는 나무들과 비교해서 인간은 고작 100년 밖에 못사는 하찮은 것들이라 해도 아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찮은 인간들을 이 지구에서 몰아내자고 저 코끼리 공룡 나무들이 외친다면 어찌 할 것인가.

해롭다, 하찮다, 죽어 마땅하다 하는 모든 것들이 오로지 인간중심, 더 나아가서 자기중심인 판단일 뿐이다. 내게 해롭고, 내 보기에 하찮고, 내 생각에 죽어 마땅할 뿐이지 어버이신님에게 물어보시라. 어찌 그들이 해롭고 하찮고 죽어 마땅하다고 하시겠는가? 다 이유가 있고 필요가 있어서 만들어 놓은 존재들인데.

신문이나 방송에서 이런 기사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전화하는 데 시끄럽게 방해한다고 해서 옆 사람을 그냥 죽이고, 길을 가는데 조금 걸리적거린다고 시비 걸어 싸우고, 기분 나쁜데 남이 행복하게 웃는 게 기분 나빠 칼로 찌르는 청소년들이 문제라고 떠들어 댄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 청소년만의 문제일까. 나 자신을 비롯하여 각자 우리들의 마음 밑바탕에 있는 자기 중심된 이기심과 탐욕을 드러내는 모습 아닐까.

이 세상에서 죽어 마땅한 존재는 하나도 없다. 내게는 해로울지 몰라도 그들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이 생태계(지구의 환경)를 유지하는 데 정말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고, 그 생명 덕분에 어떤 형식으로든 내 삶이 지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 안다면 하찮고, 죽어 마땅할 존재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찮게 하는 녀석들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녀석들과 공존할 수 있다면 더없이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만약 녀석들이 귀찮고 너무 무서워서(사실은 녀석들이 우리를 더 무서워할 것이다. 우리는 녀석들에게 물린다 해도 대체로 생명의 지장은 없지만 녀석들은 십중팔구 모질게 죽임을 당하거나 필사적으로 도망가야 간신히 살 수 있다.) 잠도 못 자거나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다면 결국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으리라.

얼마 전에 귀농한 어느 친구 집에 간 적이 있다. 주방으로 들어가는 문에 [파리는 들어오지 말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거 참! 기발하네. 요즘은 파리조차 똑똑해서 한글을 다 아는가?’싶어 픽 웃음이 났다. 효과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 마음이 아름다워서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런데 정말로 파리처럼 귀찮게 방해를 하거나, 윙윙거려 밤잠도 설치게 하는 모기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는 이렇게 하고 있다. 우선 여러 차례 부탁을 하고 경고를 먼저 한다. “파리야, 나가서 좀 놀아 줄래? 계속 귀찮게 하면 죽일 수도 있잖아. 죽이기는 정말 싫어.” 그러고도 계속 괴롭힌다면 내 마음 속에 분노와 증오, 적개심 없이 파리채를 든다. “, 부탁했는데 안 듣는 구나. 할 수 없지. 너도 살고 싶은 생명일텐데 죽일 수밖에 없어서 미안하다. 다음 생에는 더 나은 몸으로 태어나거라. 나무천리왕님!”

아주 긴 세월이 걸리겠지만 우리가 미물이라고 칭하던 그들이 어느 생에선가 사람으로 환생하여 용재가 되어 우리 앞에 서 있는 날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