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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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31

 

가장 긴 여름

박 지 수

 

언젠가 쓴 적이 있었던 지네이야기를 다시 꺼낸다. 올 여름은 지네와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과의 전쟁, 뭐 이런 표현을 싫어하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날들이었다. 전쟁 결과는 내가 참패!! 그렇게 노력했던 지네와 소통에도 결국 실패했다고 자백할 수밖에 없다. 어쭙잖은 곤충보호자, 내지는 환경보호자 흉내를 내다가 한계에 달한 것이다.

오래 전에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내용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감동적이라서 나도 실천해 보리라 작정하고 곤충들과 이야기 걸고, 보호해주고, 모기에게 피 나눠 주기, 죽이지 않고 살려서 보내주기를 하며 곤충들과 평화로운 소통을 꿈꾸며 십 여 년을 계속 노력해 왔다.

그 책에 지네는 나오지 않지만 이 녀석들도 이 세상에 존재할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신님이 만든 것이란 점은 분명하니 살 권리를 존중해 주기로 했다. 전에도 썼듯이 이 녀석들이 우리보다 더 오래 전에 여기에 살았을 것이다. 대대로 말이다. 어쩌면 인간이 나타나기 전부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새로 온 우리가 무슨 권리로 이놈들을 쫒아낸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소통을 시도한 것이다. 너희도 이집에서 살아야 하고, 우리도 살아야 하니 서로 공생공존하는 방법을 찾자고. 해서 우리가 자는 10시 이후에 너희가 주로 활동하고, 서로 눈에 띄지 말고 서로 해치지 않기로 하자고 간곡히 여러 번 이야기 하였다. 만약 눈에 띄이면 놀라서 죽을 수도 있으니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하자고 약속하였다.

물론 이것이 일방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가 받아들여졌는지 지난 여러 해 동안 커다란 어려움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물론 해마다 여름이면 지네를 서너 번 만나기도 하고 물리기도 했다. 지네를 만나면 약속 지켜야지? 잊었니? 지금 나올 시간 아니잖아? 눈에 안 띄기로 약속했지? 밖에 내 보내 줄 테니 밖에서 살아!”하고 달래서 보내주었다. 몇 번 물리는 가운데도 순간적 적개심으로 죽이는 일없이 살려 보내 주었다. 약속을 어긴 것은 괘씸하지만 세상엔 괴팍하거나, 너무 호기심이 많거나, 제멋대로인 사람들도 가끔 있듯이 이 녀석들도 그런 부류겠지.’ 이해하면서.

그런데 올해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남편이 전도청에 한국수양회 일로 한 달동안 가 있게 되었다. 가기 전에 여름이 시작되자마자 남편이 한번 물린 적이 있었다. 그땐 작은 놈이어서 그런지 큰 상처없이 넘어갔다. 그리고 남편이 전도청에 간 뒤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두 세 마리가 출몰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있을 때 나오는 것 하고 혼자 있을 때 나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작년까지는 일년에 서너 번이던 것이 매일 두 세 번 나타났다.

어떤 때는 교조전 등불만 켜 놓고 기원하다보면 나를 향해 돌진하는 (내 느낌이겠지만) 시커먼 녀석들을 보고 기겁을 하기도 하고, 작은 불을 켜놓고 전화를 받다 이상해서 방바닥을 짚고 있던 반대쪽 손을 털면 툭 털어져 도망가는 녀석, 수시로 왔다 갔다하는 녀석들까지... 잠들기 전에 내가 눈을 뜨고 있을 때는 나오면 그래도 그다지 놀라거나 당황하지도 않는 데 잠자는 데 나오면 기겁할 지경이었다. 해서 지네가 나온 방을 피해 다른 방으로 가서 자면 거기도 나오고, 서재에는 괜찮겠지 싶어 자면 거기도 나오고, 신전도 나오고, 화장실도 나오고, 부엌에도 나오니 집에 있는 게 두려웠다. 밤마다 오늘 밤은 또 어쩌지? 하는 걱정이 태산이다. 어디로 피난을 가야 할런지 기가 찼다.

지네는 밤이 깊은 시간과 날씨가 덥고 습한 날에 잘 나온다. 올 여름은 유난히 습도가 높고 더웠기 때문에 이 녀석들이 나오지 않은 날이 며칠 없었다. 이젠 날씨만 봐도 지네 나올 날씨를 알겠다. 그러다 보니 잘 때는 항상 머리맡에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두고 불을 켜놓고 자게 되었다. 불을 켜 놓아 밝으면 조금 덜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나와도 금방 볼 수 있으니까 바로 밖에 내 보낼 수가 있었다. 불을 켜 놓고 자야할 정도가 되니 깊은 잠은 물 건너 갔다. 나중에는 불안하여 등 뒤로 오지 않을까? 내가 안 보이는 발쪽으로 오는 게 아닐까? 겁났다. 보통 지네가 잘 무는 곳이 발가락, 손가락 사이니까 궁여지책으로 그 더운 여름에 양말을 신고 잤다. 손은 이불로 감고 자고... 그러다 보니 그 괴로움이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잠 못 자게 하는 고문을 매일 밤 당하는 셈이니 죽을 지경이었다.

혹시나 모기매트를 켜놓으면 그 냄새에 안 나올 것 같아서 매트를 구해서 매일 꽂아두었다. 며칠은 괜찮은 것 같더니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또 절에서는 향을 많이 피워서 곤충들을 못 오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문을 다 닫고 향을 5개피를 동시에 피워서 도망가기를 기대해도 소용없었다.

그러던 차에 조카들이 왔다. 벌레라면 기겁을 하는 서울내기 두 녀석이 왔으니 걱정이 태산이다. 물지도 않은 나방이나 날파리만 봐도 기겁을 하니, 저 녀석들이 만약 지네를 본다면 당장 짐 싸고 서울로 도망을 갈 것 같았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온 첫날도 역시 나왔다. 마침 잠자기 전에 애들은 씻는다고 샤워하고 있어서 지네를 보지 못했다. 방을 닦는데 나와서 몰래 살짝 녀석을 내 보냈다. “이제 들어오지 마! 애들이 보면 기겁하잖아?” 작은 소리로 나무라며 보내고 아무 일 없는 척 했다. 애들이 잠들고 나서도 걱정이 돼서 신전에서 기원을 했다. “조카들이 밤새 무사하게 해 주세요. 지네들과 한 약속을 지네가 어기지 않게 도와주세요. 전 해칠 생각이 없는데 이 녀석들이 자꾸 나오니 제가 어찌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서로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 서로 눈에 띄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부디 도와주세요.” 간절히 신님께 하소연도 하며 빌었다. 그 날 밤은 기원한 덕분인지 무사히 잘 넘어갔다.

조카들이 있는 동안, 지네에 대한 두려움에다 조카들 걱정까지 더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라 일어나고 긴장했다. 그러니 새벽근행을 올린 뒤에는 기진맥진해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있어서 잘 수 있는 날은 몇 날 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여름이 몹시도 길고 힘들게 느껴졌다. 도대체 이 여름이 언제 끝날지, 지네들은 언제까지 이렇게 나올지 체력은 한계에 이르고, 인내력도 한계에 이르렀다.

해서 주변에 하소연하며 지네 퇴치법을 물어 보았다. 경험자들이 많았다. 진양회장님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농약을 사다 주겠다고 해서 고맙게 받기는 했다. 경험으로는 그 농약을 집 경계선을 따라 쭉 뿌려 놓으면 녀석들이 죽는단다. 그렇게 일년에 두어 번 하면 몇 년을 안 나온다고 했다. “농약인데 괜찮아요?” 걱정스레 물으니 시골에서는 다들 그렇게 한다고 했다. ‘할 수 없지. 내가 죽을 판이니 농약을 뿌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집에 가지고 와서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농약에 써여 있는 내용을 읽어보았다.

[살충제, 농약 킬토충- 이 농약은 야생조류에 피해를 줄 수 있으니 사용에 주의하여 주십시오. 살포된 농약이 양어장, 저수지, 상수취수원, 해역(바다)으로 바람에 날려 들어가거나 빗물에 씻겨 직접 흘러 들어갈 우려가 있는 지역에서는 사용하지 마십시오. 어독성 1] 옆에 그림에는 물고기와 조류에 가위표가 그려져서 죽는다는 표시를 하고 있었다.

야생조류에 피해라고? 그래서 가끔 보도에 나오는 철새들이 이 농약에 당한 것이 아닐까! 어독성 1급이라면 물고기에겐 치명적이란 이야기? 또 여긴 바다가 가까운 데 농약이 사흘들이 내리는 빗물에 씻겨서 바다로 들어가면 어쩌지? , 안되겠다. 나 좀 편하게 살자고 아무 잘못도 없는 동물들을 떼죽음 시킨다는 말이지. 지네가 한 두 번 문 것뿐인데. 이걸 뿌리면 지네뿐만이 아니라 지나가는 모든 곤충과 새들까지, 물고기들도 다 죽는단 말이구나. 이건 아니야. 이건 너무 가혹하고 나쁜 일이야. 단지 지네가 안 나오면 되는데. 죽이지도 말고, 그냥 우리 집안과 방안에만 안 나오면 좋겠는데,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며 또 며칠을 지냈다.

남편이 돌아오고 그 이야기를 듣고는 모기장을 치자고 한다. 모기장을 치고 사방으로 무거운 베개나 책으로 눌러놓아서 못 들어오게 하잔다. ‘혹시나 그러면 괜찮을까?’ 싶어 안심하며 잤다. 새벽녘, “아야!”하고 일어나 불을 켰다. 시커멓고 커다란 지네가 내 팔뚝을 물고 모기장을 타고 도망가는 중이었다. “휴유... 모기장도 무용지물이구나.” 한숨이 나온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지네를 고이 밖으로 내 보냈다. 그러고 나니 잠이 올 리 만무하다. 뜬 눈으로 자는 둥, 마는 둥 새벽을 맞이하고 나니 월차제였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 월차제를 지냈다.

그날 오후, 멀리 대전에 사는 친구가 친정식구 일가족과 휴가를 오고 싶다는 전화를 했다. 바로 떠오는 생각 오는 거야 좋은데... 지네 나올 건데 어쩌지?’ 그래도 , 내일, 모레 일박이일? 식구는 열 명이라고? 알았어. 그럼 내일 와~.” 날씨를 보니 습도가 아주 높았다. 딱 지네 나오는 날씨인데 큰일이다.

게다가 내 팔뚝도 이제 벌겋게 부어올라 가려웠다. 왜 그러냐고 친구가 물으면 지네 때문이라고 하면 놀라서 가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인터넷으로 지네퇴치법을 찾았다.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었다. 주로 농약을 치거나 살충제를 뿌리거나 하는 것이었다. 농약은 우리 신발장 위에 그대로 방치되고 있으니 그건 아니고. 그 외에 한 가지 방법에 솔깃했다. 농약도 살충제도 아니고 삼백초라는 한약재를 망에 넣어 곳곳에 두면 안 온다는 것이었다. ‘앗싸! 이게 내가 원하던 거야!’ 쾌재를 부르며 사왔다. 한약방 사장님께서, “지네가 살다니, 거긴 오염되지 않은 좋은 곳인가 보다!”하시는 말씀도 별 반갑지 않았다. 정말 효과가 있기를 바라며 망으로 싸고 있는데 친구가족들이 들이닥쳤다. 꼬맹이 두 명, 어른 여덟 명이었다.

마침 날씨는 비 오다가 흐리다가 안개까지 꽉 끼여 사방이 구분 못할 정도였다. 이런 날은 정말 지네가 100% 나오는 날인데. 부디 삼백초가 효과가 있기를 바라고 빌 뿐이었다.

일 년 만에 이십년 지기 친구와 반가운 해후를 하고 저녁 먹고 부엌에서 친구랑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여자들이 사용하는 방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아차, 지네구나.’ 싶었다. ‘이 시간쯤이면 녀석들이 움직이지.’ 재빨리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지고 달려갔다. 그리고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서 가만 있어. 보내 줄게. 가만 있어~!”하며 지네를 달래서 쓸어 담으려고 하는데 순식간에 녀석이 옷장 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기대했던 친환경적인 방법, 삼백초도 소용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지네를 본 친구네 동서와 동생, 엄마, 조카들은 당황하기도 하고, 지네를 달래는 내 모습이 신기하기도 한지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조금 뒤 어머니가 여기서는 지네 죽이면 안 되나 보네?”하셔서 ,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여긴 기도하는 곳이니까요, 살생하면 좀 그렇죠! 가능하면 밖에 내보내서 살려주고 있지요!”했다.

지네는 사라졌지만 다들 그 방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서재에서 놀았다. 무서워서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밤샘 했다는 소리까지 새벽에 들었다. 그렇게 밤샘을 하는 걸 보고 미안해 하니 친구가 아니, 이렇게 밤새워 노는 것도 재미잖아. 휴가인 데, 좋은 추억거리지 뭐.”하며 되려 나를 안심시킨다. 새벽 근행 올린 다음에 가보니 어젯밤에 그 놈이 다시 나와서 빗자루로 쓸어다가 밖에 보내 주었다고 한다. 놀라서 소동벌이지 않고 그렇게 보내주었다니 웃음이 난다. “이제 날이 밝았으니 지네는 안 나와요. 그러니 좀 쉬세요.” 했더니 그제서야 다들 자리 잡고 누웠다. 그 모습에 정말 무슨 조치를 취해야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늦게 일어난 친구의 제부는 지네이야기를 듣고는 너스레를 떨며 저도 여기서는 죽이면 안 될 거 같아서 한 마리 고이 모셔다가 밖에 보내 드렸어요!”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떠나는 친구에게 애들이 다시는 안 오겠다고 하겠는 걸?” 했더니 아니, 다음에는 모기장 가지고 오자는 데!” 라고 해서 웃었다. 요즘에 새로 나오는 텐트형으로 생긴 모기장을 치면 구멍이 없으니 들어오지 못한다나. 다행이다. 다시는 못 올 곳으로 생각하지 않고 즐거웠다니.

그 다음날 고성에 나갔을 때 약국에 들러 물린 팔뚝을 보여주며 지네 퇴치하는 약이 있는지 물어보니 요즘 잘 나가는 제일 강력한 거라며 주었다. “이거 사람에겐 해가 없지요?”했더니 괜찮다고 하였다. 약사는 올해는 유난히 지네가 많다고 다들 많이 물려서 약 사러 온다고 했다. 그래서 그 약을 많이 팔았단다.

그래, 우리 집에도 유난히 많이 나왔지. 지네가 나오는 날씨는 습하고 더운 날씨다. 더워도 습기가 없는 까실하게 맑은 날에는 나오지 않고 눅눅한 장마철같이 끈적거리는 날씨에 나온다. 올 여름 날씨는 지금까지 지내온 여름 중 가장 무덥고 눅눅한 날씨가 많았다. 뉴스에 우리나라의 기후가 아열대성으로 변하고 있다고 하더니 그 증거라도 보여주듯이... 그렇다면 결국 지네가 많이 나오도록 만든 것은 우리 인간들 잘못이란 이야기다. 지구온난화란 인간들이 불러일으킨 재앙이 아닌가.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 장소에 자주 가고 싶은 건 인간이나 지네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경치 좋은 곳, 기분 좋은 곳에 몰리듯이 말이다. 그런 곳에 까지 생각이 미처 가니 마음이 복잡하고 답답하다.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지구온난화, 하지만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지구온난화가 원인이니 이를 어찌해야 할 지!

약을 사오면서도 편치 않았지만 그래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좀 살아야겠고, 손님한테도 할 짓이 아니고 하니 최후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긴 시간동안 지켜온 곤충들과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겠다고 맹세한 약속을 일부 파기하는 행위였다. 내 삶터가, 인간만이 아닌 모든 동물들, 곤충들에게 까지도 평화로운 안식처가 되길 바랐던 원대한 내 이상은 너무나 이상적이었던 것일까?

사 온 지네퇴치약도 읽어보았다.

[의약외품, 개미, 바퀴 살충제, 광범위 지속성 살충제, 로취 앤트 킬라, 스프레이. 호텔, 카페테리아, 학교기숙사, 선박등의 장소, 건물들의 해충구제에 사용된다. 사용방법은 해충들이 서식하는 곳, 또는 번식하기에 적당한 곳에 적당량을 도포한다. 주의사항 중략.] 더 자세히 읽어보니 이 살충제 역시 클로르피리포스라는 농약 성분과 같고 함유량도 거의 같다. 아니 함유량은 농약보다 오히려 더 많았다. 농약은 2%, 이건 2.3%였다. 단지 약국에서 파느냐, 농약방에서 파느냐 하는 거였고, 농약처럼 무지막지하게 비닐봉지에 많은 양이 들었나, 아니면 깔끔하게 스프레이용기에 담겨 보기에 농약처럼 안 보이는 차이 정도였다.

한 두 가지 위로가 된다면 야생조류 피해라든가, 어독성이라든가하는 말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스프레이 살충제는 집 안에만 뿌리니 아침, 저녁으로 우리 마당에 찾아와 노래하는 이쁜 새들이 잘못 먹고 죽을 일은 없을 것이고, 죄 없는 곤충들이 우연히 집 근처를 다니다가 피해를 볼 일도 없겠지. 또 농약이 빗물에 씻겨 바다로 들어가서 물고기들을 죽을 일도 없을 것이다. 마음 아프지만 집 안은 할 수 없이 포기했다. 지난 한달 반을 망설이며 고민하지 않았던가.

약을 사와서 하루 동안 가만히 두었다. 집안에 있는 벌레들에게 피난 갈 시간을 준 것이다. ‘내일 오후 5시에는 뿌릴 거니까 제발 목숨 잃지 않도록 모두 다 피난 가 다오. 미안하다. 나로서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구나. 정말 미안하지만 새로운 곳, 안전한 곳으로 가 다오. 미안하다. 미안하다.’ 마음속으로 계속 중얼 중얼 이야기를 하고 근행시간에도 신님께 참회를 드린다. 곤충들 역시 신님의 귀중한 차물들이 아니겠는가? 어떤 곤충들이 얼마나 이 집안에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부디 무사히 이사 가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런데 그 안전한 곳이 있기나 할 것인가? 온 세상이 농약으로 넘쳐나는 데.

씁쓸하고 막막하여 가슴 아픈 자신을 추스르려 노력하며 다시 책을 펼친다. 그 책(‘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조안 엘리자베스 록 씀, 민들레 출판사)에 있던 지은이의 말 한 구절을 빌어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곤충들에게 사죄하고자 한다.

[곤충은 육체의 형태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집안에 있는 벌레를 죽이는 것 외에 다른 해결책이 없다면 죽여도 괜찮다고 저는 말합니다. 육체의 형태 속에 갇힌 벌레의 영혼을 풀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풀어줄 때는 벌레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야 합니다. 증오의 기운이야말로 곤충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해로운 독이기 때문입니다. 입증할 수는 없지만 저는 우리의 적개심이 오히려 곤충을 우리 곁에 (가상의 적으로) 묶어둔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곤충은 우리의 적대적 생각이 뿜어낸 독에 중독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곤충을 관용과 애정으로 대하면 곤충과의 만남은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곤충을 죽이더라도 말입니다.] (위 책 17페이지에서 인용)

 

이제 내 생애 가장 긴 여름이 지나가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