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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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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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25

 

확인사살(確認射殺)

 

박지수

 

우리 포교소가 있는 곳은 생굴 산지로 유명한 통영의 저산이라는 바닷가에 있다. 생굴철인 겨울이 되면 여기저기서 부탁받는 일이 많아 굴을 까는 박신장(공장)에 자주 가게 된다. 작년까지는 전화로 주문을 해도 택배로 잘 보내 주었다. 그런데 올해는 비가 적게 와서 패사한 굴이 많고 알이 잘아졌단다. 알이 잘아지면 굴까는 데 힘이 들어 굴까는 사람들이 일하러 오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건비도 많이 들고 굴값도 비싸진다. 그러다보니 남는 이익이 별로 없다며 택배 주문을 좀 싫어하는 내색이었다. 그래도동네사람이고 더구나 교회에서 부탁하는 거니까 해 드려야지요!”한다. 그렇게 말 해주었지만 그래도 얼음을 넣어서 택배로 보내달라고 하는 건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가능하면 직접 찾아가서 사오게 되었다. 사와서는 집 냉장고에 있는 얼음을 넣어서 택배로 보내곤 한다. 사러가는 발품을 팔면 시장에서 사는 것보다는 훨씬 양이 많고 싱싱하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얼굴을 맞대어야 한마디 말씀을 전할 기회가 생기게 된다. 사먹는 입장에서도 좋고, 우리에게는 전도 기회가 되니 좋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성교회에서 김장을 할 때 일이다. 김치 치대기 전에굴을 2박스 사 달라는 부탁을 미리 받았다. 김장 당일, 새벽에 근행을 올리고 나서 굴 사오라는 부탁이 생각나 창밖으로 항상 사러 가는 굴 공장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굴 공장에 불빛이 없었다! 큰일 났다는 생각에 가슴이하고 내려앉았다.

이를 어쩌지? 오늘 굴 안 까는 날인가? 엊그제 물어봤을 때 분명히 일요일 외는 쉬는 날이 없다고 했는데. 갑자기 사정이 변했나? 하긴 해마다 어느 때가 되면 수요일과 토요일도 쉬던데, 오늘 쉬기로 했단 말인가? 그럼 왜 쉰다고 미리 말을 해 주지 않았을까? 하긴 언제부터 쉰다고 내게 말할 의무가 있겠는가. 가끔 굴 사러 오는 사람까지 배려해서 미리 알려줄 까닭이 없었다. 매일 가는 것도 아니고 가끔 가는 일인데 말이다. 어쩌지? 그렇잖아도 어제 전화해서 물어볼까하다가 전에 물어본 것도 있고, 전화 받는 것조차 너무 바빠서 싫어하는 눈치여서 그만 둔 건데. 잘못했다. 어제 사 둘걸. 이런 실수를!! 어쩌지? 고성에도 굴 공장이 있으니까 사감선생님께 연락해서 거기서 사시라고 해야 하나? 수협에서 쉬기로 결정한 거라면 거기도 쉴지 모르는 데 그럼 어쩌나? 왜 그렇게 태평으로 안일하게 일을 처리한 거야. 정말 바보같이! 이제 어쩔래? 에이그 일 처리하는 꼴이라니.’

짧은 순간 그렇게 많은 생각과 비난들이 자신에게 쏟아진다. 당황스러운 가운데 자책과 자괴감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친필읽기를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안정이 돼서 굴공장 사장에게 전화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혹시 어제 깐 굴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지도 모르고,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을지 모르니까. 다른 지역에 굴 까고 있는 곳을 알 수도 있고. 침착하자. 실수해도 만회할 기회는 있는 거야. 수습을 잘하면 되지!’하며 마음을 다독거렸다.

그리고 남편에게오늘 굴 안 까나 봐요. 불이 없네. 어쩌지?”했더니 바로 화살처럼 튀어나오는 말이그러니까 미리 알아보라고 했잖아? 어제 사자니까 오늘 해도 된다고 우겼지! 이럴까봐 그랬는데 말 안 듣더니.”한다.‘꼴좋다는 말이 생략되었지만 한 대 머리를 쥐어박는 듯한 화난 말투가 날아온다. 풀죽은 마음이 더욱 더 조그맣게 쫄아 들었다. 기 죽은 마음에 확실하게 더 기를 죽이는 확인사살(確認射殺)이라고나 할까. 마치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순식간에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그냥 둬도 제풀에 기가 죽고, 화가 나고, 자책하며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죽이고 있는데. 거기다가 더 확실하게 기를 죽여 버리다니.

다시 확인해 볼 겸 혹시나 다른 굴공장은 하지 않을까 싶어서 나가 보았다. 밖에는 내 마음처럼 차가운 눈발이 성글게 날리고, 매서운 겨울바닷바람이 불었다. 나가 보니 안에서는 안보이던 몇 군데 다른 굴공장의 불빛이 환하게 보였다!!

후유! 살았다. 그 공장만 쉬나 보다.’

마음에 밝은 불빛이 켜진 듯 환해졌다. 매서운 바람도 갑자기 상쾌하게 느껴져서 어깨를 펴고 심호흡을 했다.

들어와서 조금 가시가 돋친 말투로다른 공장은 다 하고 있네!”했다. 그러고 나서도 싸하게 차가와졌던 마음이 한동안 풀리지 않았다.‘그 실수로 가장 난처하고 곤란을 겪을 사람이 나고, 힘들어도 내가 힘들 건데 왜 자기가 화를 내? 그게 자기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화부터 내? 정말 웃기는 일이네.’싶어서 은근히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굴공장에 내려갔다. 우리가 자주 가는 그 공장은 첫 집이라 지나면서 보니 불이 희미하게 나오고 있었다. 들어가 보니 평소보다 적은 몇 사람이 굴을 까고 있었다.“쉬지 않는다고 안 했소! 전체가 다 일하지 않아도 조금씩이라도 까니까 걱정마이소!”하신다.

어찌 되었든 이제 굴은 사게 되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차가운 마음이 가시질 않았고 이 일이 화두처럼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불이 꺼져 있다고 했을 때 옆에서괜찮아, 어떻게든 방법이 있겠지!”라고 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당신, 놀라고 당황했지?”라는 위로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말이다. 남편이란 [영원한 남의 편]이라는 우스개 소리를 굳이 확인시키지 않아도 되는데. 평소 [바람직한 결혼이란 무슨 일에서든 언제나 항상 내 편을 들어주는 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란 내 신념이 약간 휘청했다. 하긴 가장 크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 역시 진리임을 어찌하랴!

생각해보면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사실 실수하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가. 실수하지 않는 건 신이나 기계이겠지. 한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착각을 한다. 자신은 실수하지 않는다고. 아니면 당신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그런데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그 실수를 어떻게 수습하는가가 문제아니겠는가. 만약 실수를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시도할 수가 없다. 시도하지 않으니 발전할 게 없고, 성장할 일도 없게 된다. 사람은 실수를 통해서 배운다. 그러므로 실수가 문제가 아니라 실수 후에 무너진 마음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비난하고 원망하고 화를 낸다. 그런다고 상황이 달라지거나 좋아지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오히려 상황이 악화될 뿐만 아니라 감정을 상하게 하여 인간관계까지 망치게 한다. 언제나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란 사실을 잊어버리면 확인사살하는 잘못을 범하게 마련이다.

확인사살이란 전쟁터에서 총알을 맞거나 칼에 찔린 적이 혹시 안 죽었을지 모르니까 확실히 다시 죽이는 일을 말한다. 적군이 죽은 척하고 누워 있다가 내가 돌아설 때 공격해서 나를 죽일 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전쟁터에서는 확인사살하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비인간적인 일이니까.‘상대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하는데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는 순간이다. 확인사살하는 심층 심리에서는 공포와 불안과 분노가 숨어 있다고 한다. 정말이지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일이다. 옛날에 대역무도한 죄인은 죽었더라도 다시 무덤을 파서 죽이는 일이 있었다고 알고 있긴 해도 그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살면서 마음을 죽이는 확인사살을 얼마나 많이 저질렀을까. 나 자신도 엄청나게 많이 주변사람들에게 확인사살을 했을 것이다. 내 나름대로는 상대방을 위한다고 한 일조차도 쓰러지는 마음을 완전히 죽게 만들어 버린 경우는 얼마나 많았을까?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총알처럼 튀어나오는 원망이나 비난하는 말들, 생각해 보면 아찔하다. 설사 말로 꺼내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저질렀던 것 까지 치면 훨씬 더 많았을 텐데.

언젠가 내 곁에서 말없이 멀어져 간 많은 사람들도 그래서 그랬던 건 아닐까? 특히나 목이 약한 나는 더 많이 그랬을 것 같다. 목이란 풍기수호의리를 받아야 건강할 텐데, 말을 차갑게 하니 탈이 날 수 밖에. 어릴 때는 착하게 생겼다는 말이 너무나 싫었다. 그래서 커면서 차가와 보이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런 노력이 말로 나타나 (행동으로 할 수는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싸하고 차가와지게 많이 했던 것 같다. 한마디 말로써 사람을 죽인다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이란 말을 좋아한 적도 있었으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더 이상 착해 보인다는 말은 듣지 않았다. 대신 차가와 보인다고 했다. 결국 소원을 이룬 것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마음씨를 써서 목이 약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포교사라면 신자에게 어떤 사정이나 신상이 생겼을 때 나름대로 실천이나 작정을 시키게 된다. 그렇지만 시킨대로 신자가 실천하거나 작정한 것을 지키지 않은 일이 훨씬 많다. 그러다 보니 신상이나 사정이 더 나빠져서 다시 찾아오게 된다. 그럴 때, 너무나 쉽게내가 시키는 대로 안 하니까 그렇지. , 그리될 줄 알았어. 내가 뭐라데. 에이그, 덕이 없으니까 말도 안 듣네. 지중한 인연, 어쩌구 저쩌구.”하기 십상이다. 대하기가 조금 힘든 신자라면 소리 내어 말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상황이 더 나빠져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시키는 대로 안 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자신이 더 잘 안다. 그래서 자신의 실수나 진실과 정성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돌아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죽어가는 마음과 몸을 어떻게든 다시 살려 보려고, 도움받으려고 왔을 텐데, 이 같이 차가운 말을 한다면 그것 역시 확인사살이 된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총 한방 더 쏘아서 확실히 죽이는 것이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을 당사자에게 확인사살은 너무나 잔인한 일 아닌가.

 

어릴 때 집에서 뛰어 놀다가 장독이라도 깨뜨리게 되면 제풀에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게 된다. 이때 제대로 된 부모라면, 울고 있는 아이를 안아서 먼저 달래고, 다치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마음부터 안정시키지 않을까. 물론 깨진 장독이 아깝고 속상 하겠지만 제 자식보다 그 물건이 더 소중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러나, 보통 미숙한 부모는 화를 내고 때리면서 아이를 궁지에 더 몰아넣는다.

네가 하는 짓이 뻔하지!’

네가 제대로 하는 게 뭐 있어? 시킨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덜렁대기는! 그러니까 맨 날 그 모양 그 꼴이지

넌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래? 에이그, 못 살아 못살아.’

이렇게 악을 쓰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어느 샌가 튀어나오는 말들!! 일초도 쉴 틈 없이 험악한 말을 퍼 부면서 아이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또 다른 상처를 남긴다. 분명 확인사살인 셈이다.

각자 처지나 입장 그리고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들은 얼마나 쉽게 이런 말을 함부로 내 뱉을까. 물론 이 보다 더 많은 험악한 말들이 있겠지만 이런 말들이 그냥 생각나는 걸 보면 나 역시 많이 쓰고 있는 말인 모양이다.

 

누구나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있지만 특히 함부로 하기 쉬운 사람은 누구일까. 우리나라 같은 문화에서는 아내보다는 남편, 아이보다는 부모, 학생보다는 선생, 하급자보다는 상급자 아닐까. 그리고 같은 동료사이라면 말이 적은 사람보다는 말이 많은 사람일 게다. 아랫사람이나 말수가 적은 사람은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아니면 마음속으로 원망을 할지언정 쉽게 말을 내뱉지는 못한다.

그런데 지도말씀에서는

신은 끊지 않는다. 그러나 끊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막말, 끊는 말은 신이 매우 싫어한다. 인연이 되어 몸에 나타난다. 그런 가운데서도 마음을 맑히면 그것은 그대로 눈앞에 나타난다. 그것은 당연한 리. 나쁜 말은 아주 싫다. 깨끗이 바꿔라. (1891. 1. 28)

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어버이신님께서는 싫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싫다고 까지 하셨다. 그런데, 막말 끊는 말을 하기란 얼마나 쉬운 지. 특히 어렵고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더 확실하게 절망으로 빠뜨리는 확인사살이란 너무나 잔인하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 실수 때문에 겪게 되는 어려움이나 곤란함이란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거기다가 덤으로 막말 끊는 말로 확인사살까지 할 필요는 없다. 함부로 말을 하면 자기에게 만족이 될지 몰라도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려움이나 곤란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재기할 기회마저 빼앗아 가 버린다. 어려움과 곤란함에 처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추궁하고 비난하는 험악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따뜻하게 안아주고 감싸주고 격려해 주는 일이다.

말은 쉬워도 이것을 행동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러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며, 이런 마음을 만들기 위하여 신앙을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길에서 말하는 구제란 결국 어둡고 주름진 마음을 밝게 펴서 마음을 살리는 길이지 않는가. 그런데 확인사살이란 오히려 정반대로 가는 길이다. 알고 한 것도 많겠지만 모르고 저지른 확인사살은 또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이번 일을 통해 어버이신님께서는 [확인사살은 이제 그만!]이라고 깨우쳐주고 계시는 건 아닐까? 남편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가 아니라 평소에 내가 얼마나 많이 남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지 되돌아보게 한다. 정말 조심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