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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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9

 

여름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날

 

박 지 수

 

장마도 끝나 하늘이 파랗게 개여 흰 구름이 이리저리 가볍게 떠다니는 선명하게 맑은 날이다. 남쪽바다에서 북쪽 산으로 불어오는 바람, 뒷산에서 앞 바다쪽으로 불어가는 바람이 지나가는 동서로 남북으로 바람 길이 뚫린 시원한 서재에 앉아 있다. 이곳은 그래도 가만히 있으면 시원한데 남부지방에는 폭염 경보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고 라디오에서 이야기한다. 중복이라 뭘 먹느니 어쩌니 하며 먹는 이야기와 더위 이야기가 온통 넘친다. 밖에 따가운 햇볕에 이불을 내다 널러 나가면 햇살이 쏘듯이 무섭게 따끔거려 도망쳐 들어오는 한 낮, 그래도 뒷밭에 참깨는 바람 맞고 따가운 햇살을 받아 기뻐하는 듯 무성하게 자랐고 저 너머 바닷가에는 물놀이하는 아이들과 피서객 소리가 들려온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 한가운데를 지날 때면 시원한 한시(漢詩)가 읽고 싶어진다. 어떻게 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어느 여름부턴가 그렇게 여름을 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너무나 무덥고 뭘 할 엄두도 안 나게 맥도 없고 축 처지는 몸과 마음에 깊은 산에서 불어오는 솔바람 한줄기 같은 청량함을 주는 한시를 찾아 읽게 되는 모양이다.

오늘 아침, 책꽂이에서 별 생각없이 한 권의 책을 뽑아들었다. 그다지 좋은 책이 아닌 거 같아서 다시 넘겨보고 마음에 안 들면 버리려고 집어든 것이었다. 그런데 한시(漢詩)집도 아닌데 몇 장을 넘겨보다 보니 한시들이 나와 있다. ‘이게 웬 횡재냐싶어 보물을 찾은 듯 기분이 흐뭇하다. 오늘 중복이고 이렇게 무덥지만 맑은 날에 딱 읽고 싶은 시들이 있어서 행복한 마음에 젖는다.

 

봄 강물 흘러 흘러 사방 연못에 흥건하고

여름이라 구름 우람하여 기이한 봉우리처럼 피어나는 도다.

가을달 휘영청 밝은 빛 드세우고

겨울이라 영마루엔 고고한 소나무가 우뚝하구나

 

도연명의 시는 이 곳의 지금 이 풍경, 저 머리 바다 수평선 너머로 피어나는 흰 뭉게구름을 보고 읊은 듯하여 먼 옛날 시인의 마음에 쏙 들어가게 된다. 흰 구름이 우람하여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나오는 뭐든 소원을 들어주는 거인 지니같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주인님!”하며 불쑥 나타나는 것 같은 환상을 일으킨다. 혹은 어딘가 있을 것이라고 옛사람들이 믿었던 무릉도원 깊은 산일까도 싶다.

무더운 여름 산 속에서

한여름 무더위에 깃부채 들 맥도 없어

훨훨 벗은 맨 몸에 그늘 짙은 푸른 숲속에서

모자일랑 훌렁 벗어 돌 벽에 걸어 놓고

이마의 땀 식히며 소나무 솔솔 부는 바람 쏘이네.

 

산속에서 친구와 더불어 한잔하며

그대와 내가 만나자 산꽃들도 반가워 피네

한 잔 들게, 한 잔 주게, 또 한 잔에 해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이미 취해서 풀밭에 한숨 자려고 하느니

그대는 마음대로 갔다가 내일 아침에 거문고나 안고 오게.

 

술과 달과 시로 유명한 이태백이라 불린 이백의 시이다. 소리 내어 읽다보면 한 여름 솔바람이 시원한 그늘 짙은 푸른 숲속이 떠오르고 마음이 시원해진다.

 

강물은 흘러가도 마음은 가라앉고

구름이 자재하니 나도 느긋하다.

 

두보의 시인데 강정(江亭)’에 나오는 댓구란다. 이 구절을 읽으니 선시(禪詩)를 읽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다. 파란 하늘가에 흘러가는 흰 구름을 보면서 읽으니 맛이 좋다.

봄에는 백화가 곱고, 가을에는 달이 밝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눈이 차다

이런 저런 일에 마음 쓰지 아니하면

인간 세상살이 나날이 호시절(好時節)이라.

 

운문선사의 게송(偈頌)이다. 가만히 음미하다보니 어느 덧 세상사에 달관한 도인이 된 듯 평화로워 진다. 그렇지! 이런 저런 일에 슬프거나 짜증나거나 화나지 않고 마음 뺏기지 아니하면 인간 세상살이가 나날이 어찌 즐겁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곧 마음이 맑아지면 극락이로다하신 신악가 말씀, 누가 뭐라 해도 화가 나지 않는 마음 맑히는 가르침이니라 하신 지도말씀처럼 마음성인이 된 날들일까? 세속에 살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교전의 가르침이 이길을 걷겠다고 작정하고 나섰을 때 가장 마음 깊이 다가왔던 나로서는 참으로 부러운 경지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극락, 그런 마음이 맑아진 경지, 그런 마음성인의 날들을 지향하지만 과연 그런 날이 언제쯤에나 있을 건가?

여름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무더운 중복인 오늘, 시원하고 맑은 한시 몇 편으로 무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