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본 사이트에는
천리교회본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른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
담길 수도 있습니다.




천리교 교회본부



cond="$

[177년04월]어느덧 30년 - 이영수

2014.04.03 18:54

편집실 조회 수:985

참여마당

 

어느덧 30

 

 

이 영 수 (저산포교소장)

 

어느 날 고성교회에서 저녁근행을 마치고 2대회장님과 읍내 시가지에 있는 투다리에 갔다. 저녁식사를 하지 않았을 때 나를 가끔 그곳으로 이끄신다. 몇 천 원 하는 오뎅 한 그릇 시켜놓고 마주 앉았다.

첫 말씀이

우리가 만난 지 30년 되제?”

헤아려보니 과연 몇 달만 있으면 만 30년이다. ‘, 벌써 그렇게 되었나!’

군 제대하고 늦깎이 대학생이 된 나는 1학년 한 학기동안 마산에서 진주까지 잠시 통학, 자취를 하다가 2학기가 되자마자 함께 자취하던 선배가 이제 나가 살아라했다. 같이 살 사람이 생겼다고.

본의 아니게 쫓겨나는 심사가 쓸쓸했다. ‘자취방을 구해야 하나, 다른 사람 찾아 같이 자취해야 하나고민하던 내게 학교게시판 한쪽 구석에 붙은 벽보가 눈에 들어왔다. ‘계성학숙이라는 곳에서 학숙생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하숙이 21실 기준에 7-8만원 하던 시절인데 계성학숙에서는 45천원 한다는 거였다. 순간 구세주를 만나는 듯 바로 여기다하는 생각이 들어 지원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지원해서 경쟁자가 있었다. 다행이 행운은 나에게 돌아왔다. 2대 회장님, 천리교, 고성교회와의 만남이 거기서 출발했다. 계성학숙은 고성교회에서 짓고, 운영하는 학생들을 위한 숙식공간이었다.

 

담배를 좋아하는 2대 회장님은 투다리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도 어김없이 한 개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어지는 말씀이

“30년 동안, 우리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만났제?”

계성학숙에 들어가자마자 학생자치대표를 맡게 된 까닭으로 2대 회장님과 만날 기회가 많았다. 때론 편지로, 때론 주말이나 방학을 맞아 고성으로 가서 찾아뵈었다. 회장님이 진주에 나오시는 날에는 거의 어김없이 찾아주셔서 대화를 나누었다. 학숙에서도 당연히 만났고, 시내 커피숍이나 식당으로 불러주기도 하셨다. 해박한 지식을 지닌 회장님은 철학 사상 종교 문화 전반에 넘나들면서 대화를 이끌었고, 그 만큼 좁아터진 내 머리는 여기저기 깨지는 소리가 났다. 회장님이 의도하셨든 아니든 내 의식의 폭은 확장이 되어갔다. 학과 수업보다도 회장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좋았다. 그래서 때론 수업을 빼먹기도 하고, 다른 약속을 놓치기도 했고, 시험을 망칠 때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조금씩 아주 조금씩 천리교 교리를 듣기도 했다. 교리는 내가 묻기 전에는 거의 말씀하시지 않았고, 장황하게 늘어놓지도 않았다. 어릴 때부터 가톨릭 신앙을 하고 있었던 나는 그게 좋았다. 그런데 어느새 감칠 맛 나듯 알게 모르게 천리교에 물들어 갔고, 회장님과의 만남은 켜켜이 쌓여갔다.

 

1986년 이었을까. 회장님은 고뇌 찬 모습으로 교회를 떠나 지리산 산청 자락에 있는 어느 움막에 자리를 잡으셨다. 거기까지 찾아가 만나곤 했다. 3학년 겨울방학이 되자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러곤 마산 집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는 나에게 움막을 나설 쯤 고성교회 가서 수련회는 하고 갈 거제?” 하셨다. 전혀 뜻하지 않는 말씀이었다. 수련회는 털끝만큼도 내 안중에 없었던 단어였다.

그런데 지리산을 뒤로 한 채 진주 버스터미널로 오는 내내 그 말씀이 묘하게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고성가야 하나, 마산가야 하나?’ 하는 질문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당연히 마산이었고, 질문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터미널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 질문은 증폭되었고, 버스표를 사는 창구에 이르자 극에 치달았다.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선택한 곳은 고성! 회장님의 빈자리 한 모퉁이를 채워드리고 싶었다. 거기서부터 내 운명은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수련회를 준비하고 참가하고 어쩌다 보니 학생회장이 되고 말았다. 그 당시 학생회장은 인기가 전혀 없었다. 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보다 못해 내가 나섰더니 뭘 안다고 나서느냐고 했다. 기존 회원들의 반발이 거셌다. 경험 없고 아직도 기독교 신앙 틀을 벗지도 못했으니까 당연했다. 다음날 재선거에서도 똑같은 분위기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학생회장이 되었다. 회장님은 언젠가 돌아오실 것이라고 믿었고, 그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워드리고 싶은 마음이 한 쪽 구석에 늘 자리 잡았다. 교회에서 머무는 시간도 많아졌다. 이렇게 하여 조금씩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전공이었던 건축사 꿈은 멀어졌고, 가족 친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천리교 포교사 길은 가까워졌다.

 

언젠가 교회로 돌아오실 것이라고 믿었던 회장님은 131020년이 지나도 돌아오시지 않았다. 24년 만에 돌아오셨을까? 이제 들어오신 지 5년쯤 된 것 같다. 그 동안 나도 교회 밖을 나가 산 게 5년은 된다. 다시 돌아와 포교사의 길을 걸은 지 17. 말이 17년이지 이름뿐인 포교사라 이 부분은 할 말이 없다.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

 

오뎅 국물 맛 참 좋제?”

, 정말 맛이 있습니더.”

이리 보니 얼마나 좋노?”

같은 하늘 아래 한 공간에 만나 눈빛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좋아라하신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몇 천원 되는 오뎅 한 그릇 값도 내가 내려고 하면 회장님은 손사래를 치신다.

니가 뭔 돈이 있노.”

아직도 난 이렇게 어리다.

 

회장님은 일흔 다섯, 난 쉰 넷. 앞으로 얼마나 더 만나게 될까?

이제 멀리 가지 않아도, 애써서 시간을 내지 않아도 고성교회만 가면 만나지는 회장님이시다. 근행보기 위해 신전에 가면 일찍 나오셔서 참배하고, 자기 몸도 불편하시면서도 근행 보러 오는 신자 분 앉은 자리까지 찾아가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인사하고 다정하게 말을 거신다.

 

요즘 고성교회는 조석근행 오시는 신자 분 20여명.

하지만 나는 다시 꿈을 꾼다. 가슴 설레는 벅찬 꿈을 꾼다.

근행 참배자 100여명 되는 것을 내 눈으로 기어이 보겠다고. 머지않은 앞날에. 이 꿈이 모두의 꿈이 되고, 현실이 되도록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