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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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회 기초교리강좌

 

 

교조님의 숨결 1-1

-일화편을 중심으로

 

박용매(저산포교소)

 

여러분은 교조님의 숨결이라는 이 제목을 보면서 맨 먼저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강의를 준비하면서 일화편을 심층 분석하면서 3번을 읽었고, 관련 자료들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교조전일화편> <교조전> 혹은 <선인들의 이야기> <고설선집> <본석님의 생애>같은 여러 자료를 읽으면서 느끼지는 교조님의 숨결에선 시종일관 따스하고 자애롭고 밝은 어버이마음이 느껴집니다. 교조님은 어느 한구석에서도 우릴 나무라거나 혼내키시는 곳이 없습니다. 오히려 무안할까봐 말씀을 안 하시는 편이지요. 어느 분은 천리교는 어른이 되게 만드는 종교라고 하더군요. 저는 어버이마음이 되는 걸 가르치는 종교라고 하고 싶습니다. 기독교에서 사랑을 불교에서 자비를 말하듯 이길에서는 어버이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교조님, 나의 어버이

교조님은 천리교를 여신 분이시고, 우리 모두의 교조님이지만 바르게 깨닫고 걸어가기 위해서는 나의 교조님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교조님은 특별한 혼의 인연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모본의 길을 가실 수 있었지만, 범인인 우리들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도 더러 계십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이길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다, 교조님은 나의 교조님, 내 부모님, 어버이, 이런 실감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조전일화편>을 읽고 있으면 교조님이 정말로 어버이구나. 인자하고 따뜻한 내 어버이구나.’ 하는 실감이 납니다. 그래서 일화편의 내용들이 교조님이 나에게 직접 지금 일러주시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겁니다. 그래서 ‘104. 신님에 대한 신앙은 말이지, 신님을 육친의 부모처럼 대해야 해요. 그렇게 하면 진짜 신앙이 되는 거예요.’라고 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일화편 197일할 손은에도 그런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집터에 있는 사람도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밤낮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하며 신경을 쓴다. 자신의 일이라 생각해서 하기 때문에 자신의 일이 된다. 이곳을 제집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일이라 여기면서 하면 제 집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강의나 감화를 듣던지 그래, 저건 내 이야기야,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하고 마음에 새길 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고, 자신의 깨달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조님을 육친의 부모처럼 대하지 않고 특별히 거룩하고 신성한 존재로만 대하는 것은 교조모본을 내가 가까이하기엔 너무 힘든 것, 즉 나와 별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조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을까를 먼저 걸어서 보여 주신 분입니다. 이길이라면 곧 교조님 모본으로 통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이세상과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즐기시려는 어버이신님의 가르침을 믿고 있으니, 당연히 가르침대로 먼저 보여주신 교조님 모본을 따라 가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이 100% 교조님처럼 걸을 수는 없음을 생각하셨는지 열 가운데 두 셋만 걸으면 나머지는 어버이신님께서 받아들여 주신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지요. 모본을 그대로 따라 걸을 자신이 없는데 안 걸을 수도 없고 할 때 이런 말씀은 구세주인 거지요.

 

2. 교조님의 모본- 내가 가야할 길

제가 나름대로 인연을 자각하고 16년 전에 이길을 걷겠다고 작정을 하고 돌아와서 별석을 받을 때 이야깁니다. 오후 2시 직전에 들은 별석말씀엔 친필 145수부터 50수까지가 나옵니다. 그 내용이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고 많이 인용하시는 구절들입니다.

모든 시대 온 세상을 살펴보면 인간이 가는 길도 가지각색이야 1-45

앞으로는 길에 비유해서 말한다 누구 일이라고 새삼 말하지 않아 1-46

산언덕 가시밭 낭떠러지 비탈길도 칼날 같은 험한 길도 헤쳐 나가면 1-47

아직도 보이는 불속 깊은 물속을 그것을 지나가면 좁은 길이 보이느니 1-48

좁은 길을 차츰차츰 넘어가면 큰길이야 이것이 확실한 본길이니라 1-49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구절은

이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닌 만큼 신한줄기로서 이것은 자신의 일이야 1-50

입니다.

별석말씀 듣다가 친필 45수가 나오면 눈물이 나기 시작하여 50수에 이르면 마구 눈물이 넘쳐흘렀습니다.

마침 그 부분이 끝나면 교조님 은신하신 시간, 해금으로 연주하는 팔수의 애잔한 선율이 흘러나오곤 했습니다. 그 팔수를 들으며 눈물을 훔치곤 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이 분명히 보았던 것이지요. 신한줄기로서 걷고자 한다면 원하던 원치 않던 내가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 내 앞길이라 확 다가오니 눈물이 났던 거 같습니다.

 

3. 모본의 종류- 따라야 할 모본, 따라서는 안 되는 모본

교조님의 입장 3가지 다 아시죠?

월일의 현신으로서 리를 밝히신 모본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굉장히 엄격하고 냉정한 느낌입니다. 리를 세우고 밝히는 것이므로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리와 정을 이야기할 때 리를 차갑고, 냉정하고, 원리원칙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리와 정의 조화, 리를 세우는 모본... 리를 세우는 데 있어서 엄격함, 자기에게 적용할 때 엄격함입니다. 월일의 현신은 교조님이지만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신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가끔씩 혹은 어떤 분은 자주 신 같은 행동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보는 신같이 다른 사람이나 신자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태도는 우리 모두가 정말로 삼가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설명합니다.

모본의 어버이로서 교조님의 모본이 있습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교조모본을 따른다고 하고, 교조님의 어버이마음을 따른다고 할 때 이 모본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조전일화편>의 대부분이 이런 모본의 이야기입니다.

존명의 교조님입니다. 존명으로 활동하시는 교조님은 주로 은신 후에 수훈의 효능으로 나타나고, 이길이 발전해 나가는 양상으로 보여집니다. <교조전일화편>에도 - 도사 우노스케선생님의 이야기인 위험한 고비에서 같은 부분 - 물론 존명의 교조님 활동이라 할 만한 이야기들이 나오긴 해도 약간 다른 이야기라고 느껴집니다. 존명의 교조님은 우리가 믿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신념에 문제입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이 세 가지를 모두 다 교조님 모본이라고 합니다. <교조전일화편>이나 <교조전>이나 여러 가지 교리나 교의서에는 이 3가지 입장들이 뒤섞여서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분간해야 할 것은 그런 가운데 우리가 따라야 할 모본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혹은 따라서는 안 되는 모본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분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이길을 애초의 어버이신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제대로 밝게 걸어갈 수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중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본은 2번 모본의 어버이입니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월일의 현신도, 존명의 교조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교조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구요.

리는 내가 신님 쪽으로 세우는 것이고, 정은 내가 주변이나 상대에게 나누고 베푸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것을 구별해야 되듯이 모본에서도 자녀로서 따라야 할 모본도 있고 신의 현신으로 보여주신 모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조님은 입으로 붓으로 모본으로 걸어가야 할 모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이렇게 지내라고 보여주신 모본이 남아있지요. 또 한편으로는 어버이신님 입장에서 엄연한 리의 세계를 보여주시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도 모본으로서의 일화로 남아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두 종류의 일화를 혼돈하지 않아야 한다고 봅니다.

모본에 그런 구별이 있는가? 모본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오셨다면 의아하시겠지만..

 

구체적으로는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일화편138 물건을 소중히

교조님께서는 십 수 차례나 옥고를 겪으셨는데, 나카타 기사부로도 몇 차례 배행한 일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조님께서는 못 쓰는 미농지를 차입해 달라고 하여, 그것으로 노끈을 만들어 한 되들이 병을 넣는 그물주머니를 만드셨다. 그것은 아주 튼튼하고 잘 만들어진 주머니였다. 교조님께서는 감옥에서 돌아오실 때 그것을 나카타에게 주셨다. 그리고는

물건을 소중히 여겨야 해. 살려서 써야 해. 모든 것은 신님께서 주신 거야. , 가보(家寶)로 간직해라.”

라고 말씀하셨다.

 

내다버릴 물건이라도 최후에 최후까지 살려쓰는 중요함을 일러주는 일화입니다. 모든 만물은 어버이신님께서 주신 혜택이므로 감사함을 알고 어떠한 물건이든지 끝까지 살려 쓰라는 모본으로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용재로서 당연히 따라야 할 모본이며, 삼갈 줄 모르는 현대인이 특히 따라야 할 모본입니다.

일화편129 진옴의 구제

1883, 이마가와 세이지로의 장녀 야스는 아홉 살 때 옴이 올랐는데, 더구나 진옴이라 고름이 생기는 것이었다. 부모를 따라 터전에 돌아와서 교조님 앞에 나아가자, 교조님께서는

이리로 와요.”

라고 말씀하셨다. 조심조심 앞으로 다가가니,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라고 하시므로, 마침내 무릎 앞까지 다가가자, 입으로 당신 손바닥을 축여서 그 손으로

나무 천리왕님, 나무 천리왕님, 나무 천리왕님.”

라며 세 번 쓰다듬고, 다시 세 번, 또 세 번을 쓰다듬어 주셨다. 야스는 어린 마음에도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이튿날 일어나 보니, 신기하게도 그토록 심하던 진옴이 흔적도 없이 나아 버렸던 것이다. 어린 야스도 참으로 신기한 신님이야.’라고 생각했다.

야스는 그처럼 더러운 것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으시는 교조님의 커다란 자비에 대한 감격이 성장함에 따라 더욱더 커져, 용재로서 활동할 때면 언제나 그것이 마음에 떠올라, 어떻게 해서라도 교조님의 자비에 보답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정성을 다했다.

 

더러운 것을 전혀 꺼려하지 않고 구제하시는 교조님의 자비로운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구제활동을 하는 용재가 반드시 본 받아야 할 모본입니다.

 

일화편160 감 고르기

마침 그때는 감이 한창인 가을이었다. 마스이 오사메가 교조님 앞에 나아갔더니, 감이 담긴 쟁반이 놓여 있었다.

교조님께서는 그 쟁반에 담겨 있는 감을 이리저리 살피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고 오사메는 교조님께서도 역시 감을 고르시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으신 것은 제일 못하다고 생각되는 감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감이 담긴 쟁반을 오사메 쪽으로 미시면서,

, 너도 하나 먹으렴.”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교조님의 모습을 보고 오사메는 , 과연 다르시구나. 교조님께서도 고르시기는 하지만, 교조님께서 고르시는 법은 우리들이 고르는 법과는 달리 제일 못한 것을 고르시는구나. 이것이 교조님의 어버이마음이구나. 좋은 것을 남겨 두었다가 자녀에게 먹이려고 하는 이것이 정말 교조님의 어버이마음이구나!’ 하고 감동했다. 그리고 그러한 감동 속에서 교조님의 분부대로 감을 먹었다. 교조님께서도 감을 잡수셨다.

오사메는 교조님의 그때 모습을 마음에 깊이 새겨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 어버이마음이 넘치는 교조님의 모본입니다. 제일 못한 감을 고르시는가 하면 자녀가 먹는 것을 본 후에 드시는 교조님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들은 문장 그대로 따라야 할 교조님의 모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음 일화를 봅시다.

 

일화편7 정성 어린 헌공

교조님 댁이 극빈에 빠져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어느 해 섣달 그믐경, 신자 한 사람이 근사한 찬합에 먹음직한 떡을 담아 이것을 교조님께 올려 주십시오.” 하며 갖고 왔으므로, 고칸은 곧 그것을 교조님께 가져가 보였다.

그러자 교조님께서는 여느 때와는 달리,

, 그래.”

라고 말씀하실 뿐, 별로 탐탁찮은 기색이셨다.

그로부터 2, 3일 지나 또 신자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리고 허름한 보따리를 내놓으며 이것을 교조님께 올려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속에는 죽순껍질에 싼 고물 떡이 조금 들어 있었다.

언제나 처럼 고칸이 교조님께 가져가 보인즉, 교조님께서는

어서 어버이신님께 올려라.”

라고 하시며, 아주 만족스러운 기색이셨다.

그것은 뒤에 안 일이지만, 앞의 사람은 상당한 집안으로서 설 떡을 빚고 남았으므로 교조님 댁에 드리자고 하여 갖고 온 것이었다. 한편 뒤의 사람은 집이 가난하였는데, 가까스로 설 떡을 빚게 되자 이것도 어버이신님의 덕택이다. 이 떡을 먼저 어버이신님께.”라며, 갓 빚은 떡을 갖고 온 것이었다.

교조님께서는 그 두 사람의 마음을 모두 환히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한 예는 많아서, 그 후 많은 신자들이 철따라 색다른 음식을 장만하여 교조님께 드리려고 갖고 왔는데, 그때 교조님께서는 음식보다도 그것을 갖고 온 사람의 정성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이 상례였다.

그리고 간혹 교만한 마음으로 음식을 갖고 올 경우에는, 곁의 사람의 권유에 못 이겨 설령 그것을 잡수셨다 해도,

배가 부른데 억지로 더 먹었을 때처럼 조금도 맛이 없어.”

라고 하셨다.

 

이 일화는 얼마 전 교회보에 연재한 교동화에도 나옵니다. 이 일화는 우리가 모방해야 할 교조님 일화일까요? 만약 그렇게 해석한다면 조금 터무니없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가령 신자들이 가져온 헌공물을 교만한 마음으로 가져왔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회장이나 혹은 용재가 , 그래,’ 하고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게 받아도 될까요? 이 신자는 당장 부족을 살 것입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된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을 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교조님은 다음 사람이 가져온 헌공물은 곧 어버이신님께 올려라고 매우 기뻐하시면서 받습니다. 이것을 처음 그 사람의 입장으로 본다면 편애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이런 태도의 차이를 우리들이 가져도 될까요? 용재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어떤 사람이라도 신님께로 이끌고 연결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아무리 교만한 마음으로 헌공물을 가져온 사람이라도 절대로 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맡겨진 신자는 어버이신님께서 내 인연에 맞춰서 보내준 사람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어버이신님은 일부러 우리 교회에 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티끌이 많은 사람이라도 영혼 말대로 이어가면서 조금씩 본래의 진실이 깨어날 수 있도록 구제하는 게 용재의 임무일 것입니다. 언젠가 마음의 진실을 낼 수 있도록, 성인될 수 있도록 큰 마음으로 안아서 길러내야지 우리가 함부로 남의 정성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잣대를 대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물론 교조님은 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화는 어버이신님께 헌공할 때 우리의 태도에 관한 깨우침이지 교조님의 태도를 본받으라는 것은 아니지요. 어버이신님께서는 물질이나 돈이 아니라 그 가운데 담긴 마음의 진실을 보고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일화편148 맑은 곳으로

시도회가 발족하면서 메이세이사에 있던 사람들이 잇달아 탈퇴하여 시도회로 들어가자, 메이세이사에서는 후카야 겐지로만 되돌아오면 나머지 사람들은 저절로 따라오리라 생각하고 사람을 보내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막 나가려고 2층에서 내려가다가 갑자기 극심한 통증을 일으키며 쓰러지고 말았다. 곧 의사를 불러 진단을 받으니 콜레라라는 것이었다. 즉시 병원으로 옮겼으나 도착하기 전에 출직해 버렸다. 그래서 후지타(藤田)라는 사람이 터전으로 돌아와서 교조님께 여쭈어 보니,

전생 인연은 참회할 생각도 않고, 진흙물 가운데서 맑은 곳으로 끌어낸 사람을 다시 진흙물 가운데로 끌어넣으려고 하므로, 신이 잘라 버렸다.”

라고 하셨다.

 

이 일화는 어떤가요?

신이 잘랐다고 하셨습니다. 아주 과한 표현입니다. 구제에 방해가 되는 일에 있어서는 아주 단호한 행동을 취하시는 교조님의 일면을 보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본이 아닙니다. 신님의 길을 멈추게 하는 것에 대한 이런 정도의 엄한 유감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떤 사람의 신상 사정이나 출직에 대해서 함부로 잣대를 들이대며 냉혹하게 말해도 된다는 것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남이 겪고 있는 마디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함부로 말하기가 쉽지만 우리들은 삼갈 일입니다.

 

이 두 가지 일화는 우리가 절대 따를 수 없는 모본의 예를 보여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예는 어버이신님의 엄격한 의지와 엄한 리를 이해시키려고 보여주시는 예로서 남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흔히 남에 대해서 저 집은 저런 마음을 써서 수호를 못 받았다, 교만하니 저런 신상이 오고, 마디가 왔다, 혹은 출직했다는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험담이고 비난입니다. 주제 넘는 짓이지요. 이런 짓을 하라고 교조님이 이런 일화를 남겨주신 아닌 거죠. 남에 대한 평가는 신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요?

다달이 한번, 서로 마음고치기와 이야기 나누기(1897.6.3)라는 지도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지내고 있고 어떤 실천을 하여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서로 더 깊은 깨달음을 얻어 다시 마음을 고쳐서 즐겁게 나아가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주름을 펴고 또 펴 주라는 것이지요. 남의 이야기를 해서 스스로 침울하거나 주변을 흐리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다음 지도말씀이 이런 점을 그대로 일러주시며 경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숨어서 하는 이야기는 옳은 것 없다, 누구누구 할 것 없이 그대로 당장 깨우쳐 주어라, 숨어서 하는 이야기는 티끌을 쌓는 토대라고 깨우쳐 준다.’(1893.12.6)

이것을 분별해서 읽지 않으면 메시지가 왜곡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수호 받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단정을 합니다. 진실이 모자람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상대를 꾸짖는 거죠. 교만하기 때문에 수호가 없어! 신님으로부터 보면 유감한 사람이기에 수호를 받지 못해! <교조전일화편>에도 있잖아? 라고. 이것은 가르침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수호를 받을 때는 상대의 진실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에, 그리고 수호를 받지 못했을 때는 자신의 진실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이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정반대로 하지 않나요. 수호받는 것은 내 공덕, 수호받지 못하는 것은 상대 탓!!! 이런 사람은 주위에 얼마나 많을까요?

이것에 대해 교조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화편196 자녀의 성인

교조님께서는 자녀가 모르는 것이 아니야. 어버이의 가르침이 미치지 못한 거야. 어버이의 가르침이 구석구석까지 미친다면 올바르게 성인된 자녀의 모습을 보게 되겠지.” 라고 되풀이하여 들려 주셨다.

덕택으로 알지 못한 사람도 알게 되고, 구제받기 힘든 사람도 구제받게 되며, 고생하는 사람도 고생하지 않게 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교조전일화편>에는 힘겨루기내용이 10여 편 나옵니다. 힘겨루기 장면은 교조님이 월일의 현신이라는 리를 형태로 보여주신 예입니다. 이것도 우리가 따라할 수 없고, 따라 해서도 안 되는 모본이지요. 한편 환영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것 역시 우리가 따라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잠깐 여담을 하자면

누군가가 이길을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천리교가 싫은 이유가 뭐지요?’라고 물으며 조사했답니다. 그 내용을 보자면...

뭐든지 신의 뜻이라고 갖다 붙이면서 자기 멋대로의 생각이나 뜻을 강요하며 몰아붙이는 태도 - 자기가 신인가?

덕이 없다, 인연이 지중하다며 꾸짖고 책망하는 소리.

무조건 위만 맞추라, 끊임없이 이바지하라.

 

이길 신앙에서 신의 뜻, 덕이나 인연, 이바지이 세 가지가 신앙의 바탕이자 실천에서 중요한 실마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올까요? 우리 스스로 가르침을 충분히 익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먼저 신앙을 하고 있으면서도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또 충분히 깨닫게 해 주지도 못했고요.

친필 564수에 보면 뿌리(근본된 가르침) 파헤칠 준비 왜 아니하나고 신님께서 탄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들 스스로 신님의 가르침을 충분히 익히지 못하니까 자녀들에게도 충분히 납득을 시키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나요?

앞서 읽어드린 일화처럼 부모의 가르침이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못하고 억지로 마구잡이로 몰아가가니까 누군들 싫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좋은 거면 엄마, 아버지나 많이 하시라는 거죠. 그런 자녀들의 반응을 보면서 또 제풀에 꺾여버리기도 하구요.

(다음 호에 계속)

 

(편집자주: 입교 1751219일에 있었던 제53회 기초교리강좌를 정리해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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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76년04월][기초교리강좌 제56회]‘한마음 한뜻’의 조화 - 1 - 이영수 ▣동영상강연 포함▣ 2013.04.03
18 [176년01월][기초교리강좌 제46회]정성 3 - 이상봉 2013.01.04
17 [175년12월][기초교리강좌 제53회]교조님의 숨결 1 - 박용매 2012.12.23
16 [175년10월][기초교리강좌 제51회] 리를 무겁게 - 김위태 2012.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