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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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년11월]아버지 - 김혜원

2013.11.05 13:55

편집실 조회 수: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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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김혜원(도성포교소, 진주삼현여중 2)

 

교도소의 커다란 문 앞에 서니 괜히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약간 초조하게 발걸음을 이리 왔다 저리 왔다 하면서 교도소 주위를 돌아다녔다.

몇 분 뒤, 교도소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이익-

나는 좀 떨었는지 입술이 부르르 떨며 교도소 앞으로 갔다.

아버지다. 헝클어진 머리에 저번에 교도소에 들어갈 때 입었던 옷 그대로 입으셨고 졸린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아버지는 부끄러웠는지 창피했는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 형편은 바닥을 삽으로 파보려고 해도 팔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그 가난 속에 아버지와 나는 꿋꿋하게 살아왔다.

아버지는 매일매일 꾸준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신다.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조금이나마 피곤을 덜어주기 위해 항상 찌개를 끓여 대접한다.

그러던 어느 날,아버지는 새 축구공과 축구화를 사 오셔서 떨리는 손으로 나에게 주셨다.

그것들을 받으려던 순간 경찰이 찾아와 아버지를 잡아갔다. 나는 울며 떼를 쓰며 아버지의 손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경찰은 아버지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치 저승사자처럼.

눈물을 멈추고 내가 끓였던 찌개만 넌지시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잡혀가셨던 그 교도소에 난 절대로 면회를 가지 않았다. 아버지도 원치 않으셨는지 나에게 편지 한 통도 보내시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시기를 간절히 빈 것은 면회를 한 번도 가지 않았던 나였다.

그렇게 항상 아버지가 오시길 빌며 며칠 동안은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김치찌개를 끓이며 현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가끔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꿈에서 손짓하듯 불러낸 적도 있었지만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김치찌개를 끓여도 아버지가 오시지 않자 나는 굶는 날이 많아졌다. 오직 아버지 생각만 하면서 말이다.

몇 해 동안 아버지의 혼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 기다림 끝에 교도소 문 앞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하늘을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끝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김치찌개나 먹을까?”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아버지는 나를 꼬옥 껴안아주셨다.

 

* 14회 한글학생백일장(산청문화원 개최)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