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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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회 기초교리강좌 3

 

한마음 한뜻의 조화 3

 

 

이영수(저산포교소장)

 

3) 감사, 삼가, 서로돕기

다음으로 한마음 한뜻을 이루어가는 중요한 마음가짐으로 살펴볼 것은 감사 삼가 서로돕기이다. 이 세 가지를 이길에는 즐거운 삶의 키워드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는 바탕이라고 생각한다. 이것 없이는 즐거운 삶도 없다.

(1) 감사

우리는 흔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거나, 뭔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만 감사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진실한 감사란 이런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뭔가에 의존해야만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진실한 감사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어버이신님의 수호로 생명을 부여받고 있다는 자각이 일어날 때 저절로 생겨난다. 물 불 바람으로 살려지고 있는 이 생명, 당신의 존재, 만물의 숨결 하나하나가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매 순간순간마다 일어나고 있다. 기적 같은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고 환희고 충만한 감사다.

이런 혜택 위에서 꿈을 꾸고 계획을 하고 삶을 펼쳐간다. 물 불 바람이라는 근본 수호 없이 삶을 영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이런 인식을 하지 않고 당연히 주어진 것이라 예사로 생각하며 감사를 잊고 산다. 그래서 커피 한잔 얻고, 쉴 자리 제공받고, 시험에 통과되고, 승진하고, 새 집 새 차를 사는 것에 대한 감사는 어느 정도 알면서도 정작 근원적인 수호인 숨을 쉰다는 것, 보니 보이고, 들으니 들리고, 가니 가지고, 먹으니 절로 소화되고, 손을 움직여 활동할 수 있는 이 경이로움과 이 기쁨과 이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다. 설사 때때로 느끼고 안다 해도 아주 잠시일 뿐 늘 잊고 산다. 그러니 인생의 대부분을 짜증 속에 살고, 허욕에 눈이 가려 허우적거리고, 교만에 두 눈이 뒤집혀 길길이 날뛰는 게다.

생명의 근원이신 어버이신님의 수호는 언제나 변함이 없고, 11초도 쉼이 없다. 이 덕분에 세상 삼라만상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다. 너도 있고 나도 있고 우리가 있다. 어버이신님은 우리 모두가 정말로 행복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골고루 다 갖춰주셨다. 이것이 진실로 감사한 일이다. 어버이신님의 수호가 감사하고, 너의 존재가 감사하고, 내 삶이 감사하다.

감사로써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여기에 무슨 억센 고집 억지 욕심 낼 일이 있겠는가. 패거리지어 소수를 소외시키는 작당을 하지도 않을 것이며, 분쟁과 모반도 사라지고, 억울함이나 우울증도 싹틀 여지가 없을 것이다.

행복을 누리도록 충분히 수호하고 있다 몸에 받게 될 테니 이것을 즐거워하라 2-42

이 세상 삼라만상은 모두 월일 인간은 모두 월일의 대물 6-120

온 세상 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억센 고집 억지 욕심내는 자 없다 6-121

 

감사를 모르는 삶은 제 멋대로 날뛰고 끝 모를 욕망에 휩쓸려가지만 감사를 아는 삶은 모든 일에 삼갈 줄도 안다. 그래서 감사는 삼가로 이어진다. 삼가는 감사 이외 다른 데서 생길 수가 없다.

 

 

(2) 삼가

유달 제3호에 삼갈 줄 모르는 욕망은 사람을 잘못된 길로 들게 하고, 분쟁을 일으키며, 결국에는 세상의 조화를 문란케 하여, 장래를 위태롭게 한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삼가란 무엇인가.

원래 삼가는 겸허라는 말로 번역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 명사형이 아니라 부사어라서 채택이 되지 않는 모양인데 바른 번역이라고 보기 어렵다. 여기서는 삼가로 쓴다. 삼가에는 여러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인 사전에 나오는 의미로는 신중하다, 근신하다, 조심하다, 경의를 표하다, 얌전하고 점잖다따위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길에서는 이런 의미보다 절제와 겸허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고 있는 것 같다.

절제로 보자면, 더 먹을 수 있는데 숟가락을 놓는다, 더 좋은 옷을 입을 수 있는데 조금 못한 것을 입는다, 더 말할 수 있지만 이만 줄인다 하는 것이 삼가다. 더 잘 수 있지만 잠을 줄이고, 더 가질 수 있지만 이 정도에서 그친다. 이것이 삼가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은 어떤가.

이왕 하는 김에, 이왕 사는 김에, 이왕 내친 김에 조금 무리가 되지만 더 큰 집을 사고, 더 큰 차를 몰고, 더 좋은 옷을 입고 과시한다.

집을 30평 정도 크기를 살 형편인데도 40평을 사고, 차는 2000cc보다 2500cc를 산다. 그래서 빚이 진다. 집이나 차만 그렇겠는가. 모든 일에 거의 이런 식이다. 품위를 생각하고 체면을 생각하고 남을 의식해서 좀 더 좋은 것, 좀 더 큰 것, 좀 더 세련된 것을 추구한다. 욕망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니 언제나 빚쟁이 인생이다. 빚을 내지 않고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만큼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꼴이다. 여유가 없고 밝음이 없고 부자유하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남을 돕는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낸다.

그러나 반대로 30평을 살 수 있지만 25평을 사고, 2000cc를 탈 수 있지만 1500cc로 만족한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좀 못났고, 좀 작고, 좀 수수해도 만족하고 더 좋고 더 크고 세련된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것이 삼가다. 남의 눈이나 평가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그 만큼 여유가 생기고 가볍고 자유롭다. 그런 까닭에 아무런 사심 없이 남을 도울 수 있는 힘이 나온다.

물질만이 아니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존중받고, 인정받고,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이런 욕망 집착에 쉽게 노출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가 받고 싶은 만큼 충분히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터무니없이 원하고 바라고 생떼를 부린다.

원래 세상일이란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고, 부모를 정하는 것도 아이를 점지 받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날씨도, 밤낮의 구분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도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일어난다. 이런 간단한 몇 가지 사실만 열거해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사실을 무시한 채 세상만사 자기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고 짜증내고 원망하고 저주를 퍼붓고는 사람들이 세상 천지에 얼마나 넘쳐나고 있을까. 이들에게 누군가 조금만 건드려도 말이나 주먹다짐으로 이내 분노가 폭발하고 만다. 실로 삼가를 잃은 모습이다. 도대체 이 시대에 삼가라는 단어나 의미조차 살아있을까.

삼갈 줄 모르는 욕망과 집착에 휩싸인 마음에는 어둠과 괴로움과 불안이 자라난다. 한 없이 자기를 비하하고, 조울증이나 우울증에 빠지고, 주변 사람들의 정신까지 갉아먹는다. 어떤 여유도 어떤 자유도 없다.

존중, 인정, 이해,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고 삼가는 마음을 키울 수 있다면 그 만큼 더 여유롭고, 더 밝고, 더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 아닌가. 바로 여기에서 남을 도울 수 있는 기운이 저절로 나타나리라. 말 한마디가 그렇고, 눈짓 하나가 그렇고, 몸짓 역시 그렇다. 이것을 받고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삼가는 나 좋고 너 좋고 세상 모두가 좋아지는 길로 안내한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왜 삼갈 줄 모른 채 이글거리는 욕망과 집착에 꽁꽁 묶여 괴롭게 살고 있을까. 주어진 것에 감사를 모르고 언제나 남을 의식하고 체면을 앞세우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옆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남의 눈치를 살피고 비교를 한다. 그러면서 남보다 나으면 은근히 자랑하거나 뽐내고, 남보다 못하면 시기 질투에 온갖 불평으로 속을 끓인다.

생각해 보면 고개를 이리저리 가로저으며 남과 비교한다는 것은 아니야, 아니야! 이것으로 내가 만족할 수 없어!’하며 자기 현실을 부정하는 모습 같다. 그런 모습을 보고 덩달아 어버이신님도 아니야, 아니야, 그럴 필요가 없어!’ 도리질하시는 건 아닐까.

이에 비해 남 눈치 보지 않고, 위로 하늘을 보고 아래로 자기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위로 어버이신님의 뜻을 묻고 아래로 자기 현실을 살피면서 주어진 삶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그래, 그래! 이것도 과분하지!’ 하며 주어진 삶을 수긍하는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어버이신님도 기뻐하시면서 그래, 그래. 바로 그거야. 그래야지!’ 하며 맞장구쳐 주시는 것 아닌가.

그리고 삼가는 공손함이고, 겸허고 겸손이다. 어떠한 물건도 함부로 쓰지 않고,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물건만이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떤 입장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도 제대로 아끼고, 있을 자리에 모시고, 귀하게 대접하는 태도다. 가진 것 못 가진 것으로 차별하지 않고 오롯이 존재 그 자체를 경이롭게 바라보고 모신다. 이것이 삼가이고 겸손이다.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단 하나 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현명한 사람은 누구에게도 배울 것을 찾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리 현자가 이야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은 각기 다르다. 성품이 다르고, 관심이 다르고, 기울이는 정성이 다르다. 경험한 세상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 다르다. 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똑똑하고 현명하더라도 이 세상 모든 일을 다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다. 누구에게라도 배울 점이 있다는 말이다.

농사일은 농부에게 배워야 하고, 장사는 장사꾼에게 배워야 하고, 학문은 학자에게 물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혼자 다 알 수도 없고, 다 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고개를 쳐들고 뻣뻣하게 농부를 만나고, 장사꾼을 만나고, 학자를 만나보라. 그들이 고분고분하게 들어주고 자기가 아는 모든 지식을 일러줄 턱이 없다. 그들을 제대로 대접하고 공손히 받들지 못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깊은 지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결국 현명한 사람이란 삼갈 줄 아는 사람이다.

지도말씀에

삼가는 것이 리야. 삼가는 것이 길이야. 삼가는 것이 세계 제일의 리. 삼가는 것이 한길인 것이니. (1892. 1. 4)

고 했다. 삼가는 것이 세계 제일의 리, 삼가는 것이 한길이라 했다. 삼갈 줄 모르는 현대 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는 말씀 중 하나다.

현대인들은 함부로 쓰고,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버린다. 귀한 줄 모른다. 삼라만상이 다 어버이신님의 혜택이고 선물인 줄 모른다. 단지 자기 잇속을 챙기기에 바쁘고, 자기 능력을 과신하며 오만 방자하게 군다. 감사를 모르고 삼가라는 의미조차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여기에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감사는 삼가를 낳고, 삼가는 서로돕기로 이어진다.

 

 

(3) 서로돕기

서로돕기란 서로 세우고 서로 돕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관계가 유지되는 바탕이고 관계가 완성되는 마지막 관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남을 도우며 살아갈까.

서로돕기란 자기 형편, 자기 입장을 앞세울 때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단 한 순간인들 자기 형편 자기 입장이 없는 때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돕기는 자기를 먼저 도우려는 마음으로는 어림도 없다. 오히려 남의 고통, 남의 어려움, 남의 괴로움을 마치 자기의 고통, 자기의 어려움, 자기의 괴로움으로 알아야 상대를 도울 수 있다. 서로돕기는 자기 형편이나 자기 입장을 내려놓고 발 벗고 나설 때 가능한 일이다. 시간이든 마음이든 물질이든 내 놓지 않고서는 남을 도울 수는 전혀 없다.

그러므로 삼갈 줄 모른다면 남을 돕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먹을 걸 다 먹고 언제 남에게 먹이며, 쓸 것 다 쓰고 언제 남에게 베풀 것이며, 할 것 다하고 언제 남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있겠는가.

먹을 것을 삼가고, 쓸 것을 삼가고, 할 것을 삼가야 비로소 남을 도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물질이든 마음이든 시간이든 마찬가지이다. 삼가지 않고 어찌 남을 도울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주기만 하는 관계, 받기만 하는 관계, 주고받는 관계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주기만 하는 관계란 상대에게 주기는 하되 상대로부터는 일체 받지 않는 관계다. 이것은 상대를 마치 거지로 취급하는 태도다. 상대는 불쾌하고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

받기만 하는 관계는 무엇이든지 상대로부터 받기만 하지 줄 생각이 없다. 자기 스스로를 거지로 여기는 태도다. 스스로 자존감을 낮추고 비굴하게 만든다.

주고받는 관계는 나는 너에게 주고 너는 나에게 주는 관계다. 언젠가는 되돌려 받겠다는 전제로 주고, 받았으면 언젠가는 주어야한다는 부담을 안는다. 세상에 거의 일반화되어 있는 암묵적 약속이 있다. 이것은 거래다. 일을 매개로 한 노사관계든, 물건을 매개로 한 상거래든, 집안 대소사를 매개로 한 경조사든 가장 널리 퍼져있는 거래다. 거래인 까닭에 이것이 원활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흐를 때 불편한 관계가 형성된다. 줄 수 없을 때는 피하거나 무시하고, 받지 못할 때는 짜증이 나고 분하고 화가 난다.

 

하지만 이길에서는 주고받는 관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단지 도울 뿐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서로돕기라고 표현해도 상대에게 바라거나 기대하지 말로 그냥 기쁘게 주기만 하라고 가르친다. 내가 줄 수 있으니까 주는 것이다. 물 불 바람으로 살게 해 주시는 어버이신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주는 것이다. 그래서 기분 좋게 주고, 안 받아도 좋다. 그저 도울 뿐이다. 물론 상대가 뭔가 되돌려주면 흔쾌히 받지만, 안 준다고 시비꺼리로 삼지 않는다. 어버이신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어버이신님께 보답하듯이 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했지만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버이신님께 한 일로 여기기 때문에 여기에는 섭섭함이 없고 분함이 없고 억울함이 없다. 어버이신님의 수호를 기뻐하면서 아무런 대가나 기대없이 서로가 서로를 도울 뿐이다.

각자가 내어놓고 도울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르다. 절대 같을 수 없다.

나는 a를 내놓고, 너는 b를 내놓고, 그이는 c를 내놓고, 이이는 d를 내놓고 얼씨구나, 즐겁고 좋구나하며 노래 부르고 악기치고 잔치를 벌인다. 이것이 서로돕기다. 이것이 바로 근행을 삶의 현장으로 옮겨놓은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것도 있다. 나는 너를 돕고, 너는 그이를 돕고, 그이는 이이를 돕고, 이이는 나를 돕는다. 이것이 서로돕기다. 그러니 내가 너에게 주었다고 해서 구태여 너에게 받으려고 애 쓸 필요가 없다.

또 이런 것은 어떤가. 1억 있는 사람은 1000만원 내고, 1000만원 있는 사람은 100만원 내고, 100만원 있는 사람은 10만원 내고, 10만원 있는 사람은 만원 내고, 만원 있는 사람은 1000원 내고, 1000원 있는 사람은 100원을 낸다. 형편도 다르고 사정이 다른데 똑같이 분담하는 식으로는 하지 않기. 그리고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 이것 역시 서로돕기 아닌가.

또 이런 것은 어떤가. 누군가 외출을 간다. 나는 새 옷을 주고, 너는 새 신발을 주고, 그이는 밥값을 주고, 이이는 차를 태워준다.

누구 집 아들이 대학 간다면 나는 공책 사주고, 너는 책 한권 사 주고, 그이는 교통비라도 주고, 이이는 등록금이라도 해 준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그 아이를 위해 기원 근행이라도 열심히 드려준다. 이것 역시 서로돕기다.

또 이런 것도 있다. 신상 사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너도 그이도 이이도 나선다. 신상 사정자들은 마음이 탁하고 차갑고 답답하고 쭈글쭈글하다. 나는 물 같은 마음으로 맑혀주고, 너는 불 같은 마음으로 녹여주고, 그이는 바람같은 마음으로 시원하게 해주고, 이이는 다림질 같은 말로 주름진 마음을 펴준다. 이것이 서로돕기다. 무엇이 이러니 저러니 훈계하려 들지 말고 그냥 돕고 돕자. 만 사람은 한 사람을 돕고, 그 한 사람이 만 사람을 돕는다. 진실로 도움받는 모습을 보고 주위에 한 사람 두 사람씩 도움받는 길로 따라온다.

아무런 대가나 기대 없이 단지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 얼마나 기분 좋고, 얼마나 흥겹고, 얼마나 즐거운 세상이 될 것인가.

 

우리는 남이 아니다. 이 세상에 남이라곤 전혀 없다. 특히 이길을 신앙하는 우리들은 형제 중에 형제 아닌가. 어버이신님을 으뜸인 어버이로 모시고 사는 우리들은 형제 중에 형제다. 그러니까 서로 돕고, 또 돕고, 끝까지 돕는다. 도울 것이 없을 때까지 돕는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어버이신님의 지상명령 절대명령이지 아닌가.

그런데 우리들은 이런 저런 이유와 핑계를 둘러대며 서로 돕는 일에 눈 감아버리고, 귀 닫아 버린 게 얼마나 많을까. 정말로 부지기수다. 알고도 그렇고 모르게도 그러했을 텐데. 남 말이 아니다. 이글을 쓰는 나부터 부끄럽기 그지 없다.

남이 남이 아니고 가족이 가족이 아니다.

이것 하나 분간한다면 어떤 사정도 다 알게 된다. (1894. 1. 22)

앞으로 온 세상이 한결같이

만가지를 서로 도와간다면 (12-93)

월일도 그 마음을 받아들여서

어떤 구제도 할 것이라 생각하라 (12-94)

무엇이든 온갖으로 서로도웁기

가슴속 깊이깊이 생각하여라 (신악가 4장 일곱에)

 

나와 남을 차별하지 않고, 내 가족과 남의 가족을 차별하지 않고, 계통과 계통을 차별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 여기에서 비로소 한마음 한뜻이 완성되는 것 아닌가.

서로돕기는 삼가에서 나오고 삼가는 감사에서 나온다. 감사를 알 때 이글거리는 욕망에 현혹되지 않고, 삼갈 줄 아는 힘이 나온다. 삼가는 스스로 절제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드는 마음가짐이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서로돕기로 이어진다. 이렇듯 감사와 삼가와 서로돕기는 따로 국밥이 아니다. 한 통속이다.

한마음 한뜻!’ 바로 여기에 어버이신님의 온전한 수호가 내려지고, 세상은 곳곳마다 즐거운 삶이 활짝 피어난다.

4. 마무리

한마음 한뜻의 조화는 누군가 끌고 간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그냥 남 따라 간다고 이루어지는 일도 아니다. 충분히 대화하고 의논을 하는 가운데 분위기가 조성되고, 감사 삼가 서로돕기를 통해 완성된다. 이러한 바탕 없이 한마음 한뜻이 되자고 백번 천번 만번을 외쳐본들 그것은 그냥 말장난일 뿐이다. 내 식대로 하고 싶으니 단지 군소리 하지 말고 따라 오라는 말 밖에 안 된다. 한마음 한뜻이 될 수도 없고, 즐거운 삶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실 따져보면 한마음 한뜻을 이루는 모든 과정이 수행(修行)이다.

서로 맞추는 과정이 수행과 다름 아니다. 대화와 의논을 하는 과정이 수행이고, 감사 삼가 서로돕기로 이어지는 과정도 모두 수행이다. 수행하는 마음 없이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없다. 제 멋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서 언제 한마음 한뜻이 되겠는가. 이것이 바로 수행이지 않고 무엇인가. 홀로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만이 수행이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나는 이 사람들과 한마음 한뜻이 되기 위해 대화하고 의논하고, 매 순간 감사하고, 삼가고, 서로 돕는 일이야말로 더 철저한 수행이지 않는가. 만약에 스스로 수행하려는 의지 없이 한마음 한뜻을 들먹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씨 뿌리지 않고 열매를 얻으려는 심보이고, 남을 희생시켜서 자기 이익을 얻으려는 강욕이다.

그래서 한마음 한뜻을 이루기 위한 수행의 모든 방향은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되 자기중심은 확고히 세우는데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상대도 바르게 세워줘야 한다.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맞춰줄 수 없고, 자기중심이 없으면 맞춰올 수도 없다. 자기중심이란 무엇인가. 잘 할 수 있고, 좋아하고, 그것을 하면 행복할 수 있는 일이다. 즉 천성이다. 천성이란 무엇인가. 자기도 남을 위해서도 행복하게 쓰라고 어버이신님이 각자에게 주신 선물이다. 이것을 희생시키고서 어떻게 한마음 한뜻이 되겠는가. 자기에게도 전체에도 손해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욕심과 집착을 버린다는 것이고, 자기중심을 세운다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는 어버이신님 교조님을 가슴에 품는 일이다. 이것이 각자 주어진 역할을 분명히 하면서 전체와 호흡을 같이 하는 근행 보는 모습과 같은 것 아닌가.

한마음 한뜻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백 사람 천 사람 만 사람의 마음을 다 맞추고 한뜻이 되라는 것은 아니다. 나부터 어버이신님의 가르침과 교조님 모본에 마음을 맞추고,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상대와 한마음 한뜻이 되고, 점차 세 사람, 다섯 사람, 열 사람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나로 시작해서 부부, 가족 그리고 인연이 닿은 사람들로 확대해 나가고, 더 넓게는 미생물 동식물을 포함한 대자연과 공생공존을 이루어 간다. 한 가정을 맑히고, 이웃을 명랑하게 하고, 온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

하지만 아무리 확장해 간다하더라도 매 순간 순간마다 지금 만나는 이 존재들과 한마음 한뜻이 되지 않는다면 세상의 참 평화, 신인화락의 즐거운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에 만나는 사람과 한마음 한뜻이 되지 않고서 어찌 백 사람 천 사람 만 사람과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을까. 바로 이 순간에 만나는 이 사람이야말로 실재이며, 이것을 떠나 한마음 한뜻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너와 나는 참으로 다르다. 같은 것이라곤 눈을 닦고 또 닦고 보더라도 좀체 보이지 않는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거부하고 회피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그 다름을 존중하고 그 다름을 살려서 하나가 되는 것 여기에 한마음 한뜻의 진정한 뜻이 있다. 한마음 한뜻을 이루는 과정은 길고 지루하고 때로는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미움에 원망이 불타올라 어찌 할 줄 모를 때도 있다. 무시당하고, 짓눌리고, 억울할 때가 왜 없으랴.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춘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서로 맞추고 맞춘다.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열이면 열. 그 누구라도 예외 시키지 말고 모두 맞추고 맞추어서 한마음 한뜻이 된다.

이것이 되고 안 되고는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신이 아닌데 어떻게 하겠는가. 다만 이것을 이루기 위해 수행하고 또 수행할 뿐이다. 여기에 우리가 나아갈 길이 있고, 모든 문제의 답이 있고, 행복을 여는 열쇠가 있지 않을까.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지 않으면 다스리려 해도 다스려지지 않는다. (1899.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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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176년11월][기초교리강좌 제61회]교조님의 숨결 2 –우리도 교조님처럼! - 박용매 2013.11.02
26 [176년10월][기초교리 강좌 제60회]친필에 담긴 어버이마음 1 - 전인수 2013.10.07
25 [176년09월][기초교리강좌 제59회] 재미있는 인연이야기 2 - 정선일 2013.09.05
24 [176년08월][기초교리강좌 제58회]재미있는 인연이야기 1 - 정선일 2013.08.07
23 [176년07월][유달강습회 2]구제한줄기의 이정표-교조 130년제(2) - 서용석 2013.07.11
» [176년06월][기초교리강좌 제56회]‘한마음 한뜻’의 조화 3 - 이영수 2013.06.07
21 [176년06월][유달강습회 1]구제한줄기의 이정표-교조 130년제 - 서용석 2013.06.07
20 [176년05월][기초교리강좌 제56회]‘한마음 한뜻’의 조화 2 - 이영수 2013.05.09
19 [176년04월][기초교리강좌 제56회]‘한마음 한뜻’의 조화 - 1 - 이영수 ▣동영상강연 포함▣ 2013.04.03
18 [176년01월][기초교리강좌 제46회]정성 3 - 이상봉 2013.01.04
17 [175년12월][기초교리강좌 제53회]교조님의 숨결 1 - 박용매 2012.12.23
16 [175년10월][기초교리강좌 제51회] 리를 무겁게 - 김위태 2012.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