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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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회 기초교리강좌 2

 

한마음 한뜻의 조화 2

 

 

이영수(저산포교소장)

 

2) 대화와 의논

서로 세우고 맞추어서 마음과 뜻을 하나로 만들어가는 중요한 수단이 대화이고 의논이다. 이길에서 의논이 어느 정도에 위치하고 있는 지 다음과 같은 교조님 말씀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은신 한 달 전인 1887118(음력 1225)에 하신 말씀이다.

자아 자아, 충분히 의논했다, 의논했다. 이 집터 시작한 이래 충분히 의논했다. 충분히 받아들였다.

이 한 문장에 의논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그 만큼 중요시 하고 계셨다는 말이다. 그 동안 의논을 한 두 번 한 것이 아니라는 게다. 입교 이래 50년 동안 의논하고 의논해서 이끌어 온 길이라는 것이다.

마음의 리가 제일. 어떠한 것도 의논. 한마음 한뜻으로 다스려진다. (1889. 1. 24)

는 지도말씀도 있다.

의논이 제일이라는 말이며, 이것이 한마음 한뜻이 되기 위한 관문이라는 말씀이다.

대화가 열리면 관계가 열린다. 마음의 문이 열리고 막힌 것이 뚫린다. 통하면 살고 막히면 죽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물길도 열려 있으면 아무리 탁한 물이라도 반드시 맑아지고, 물길이 막혀 있으면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반드시 썩게 마련이다.

 

말이 막혀 있는가, 아니면 말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가.

이것은 그 사회가 얼마나 열린사회인지, 아니면 닫혀 있는지 알게 한다. 말이 막혀 있으면 겉으로는 조용하고 평화로울지 몰라도, 속으로는 곪고 골병이 번지고 즐거움이 없다.

말의 잔치가 벌어지면 요란스럽고 어수선할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을 속 시원히 발산하기 때문에 봄볕에 꽃이 피듯이 화사한 웃음이 번지고 즐거움이 살아 움직인다.

이것은 가정이나 모임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나라 어디에나 다 마찬가지다.

몸도 그렇다. 피와 기가 원활하게 흐르면 건강미에 활기가 넘칠 것이고, 기혈이 순환하지 못해 막혀 버리면 활기를 잃고 여기저기 병이 나고 만다.

우리는 흔히 충분한 대화 없이 알아서 하겠지하는 말을 많이 한다.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말하지 않으면 내 속마음을 상대가 알 턱이 없다. 말을 해도 상대가 귀담아 듣지 않으면 잘못 전달되기 일쑤다. 전 세계 인구 6-70억 중에 내 속 마음을 미리 짐작하고 알아서 해 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있을까. 없다. 나도 상대 마음을 모르는데 어찌 내 마음을 상대가 다 알겠는가. 우리들은 신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가.

그래서 대화가 필요하고, 의논이 필요한 게다. 속이 시원할 때까지 대화를 하고, 충분히 납득할 때까지 의논을 해야 한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각자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고, 느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각자 살아온 삶의 과정이 다르고, 경험한 바가 다르고, 인연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사물이나 사건이라도 다르게 보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흔히 각자가 경험한 것이 최고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그 경험을 권유하고 강요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대화가 막히고 의논이 사라지고 갈등은 증폭되어 간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경험한 것이 이 대우주, 자연의 섭리, 어버이신님의 무한한 수호에 비한다면 얼마나 작고 얼마나 보잘 것 없을까. 그런데도 우리들은 우리가 알고 경험한 것에 포로가 되어 남의 이야기에 귀 닫고 사는 경우는 얼마나 많을까.

대화와 의논의 중요함을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모두가 마음을 맞추어서 하면 어떠한 일도 되는 거야. 서두를 것은 없어 없어. 모두들 마음을 이쪽에도 맞추고 저쪽에도 맞추어서 마음이 평탄하게 다스려지면 리를 내리는 거야. 모두 마음을 맞추어 의논하는 것이 제일. 평탄하게 마음이 다스려지면 선명하게 수호를 받게 되는 거야. 리를 받을 그날의 마음가짐. 거기에 대한 깨우침이야. (1888. 12. 11)

우리들은 평소에 얼마나 대화를 하며 살고 있을까.

오늘날처럼 소통을 위한 통신수단, 스마트폰, 인터넷이 기가 막히게 발달했던 적이 없다. 그리고 교통수단 역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폰이나 차 덕분에 가까운 거리에 있거나 먼 거리에 있는 사람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쉽게 만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런 반면에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같은 공간에 있는 옆 사람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으며 눈빛 하나 제대로 마주치기나 할까. 만남은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 첨단기기에 매달려 자기 세계 속에 빠져버리거나 더 멀리 있는 사람들과 채팅하기에 여념이 없다. 시도 때도 없이 오고 가는 단어 몇 개, 한 두 문장, 온갖 정보에 휩싸여버리고 만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앉아도 대화다운 대화가 없고, 의논다운 의논이 사라진 지 오래된 일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 상대에게 몇 시간이나, 혹은 하루 밤낮을 오로지 그를 위해 온전하게 시간을 내어 주었던가. 얼굴을 맞대고, 숨소리를 들어가면서 말이다. 속 깊은 이야기, 영혼에 울림을 주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말이지. 서로에게 온전하게 시간을 내어 주는 것, 여기서부터 대화는 시작된다. 딱딱한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주름진 마음은 펴지고, 어두운 마음은 밝아진다. 이러한 바탕 위에 의사를 결정하기 위한 의논도 가능해지게 된다.

의논 없이 한마음 한뜻을 이룰 수 있을까. 일방적인 지시나 명령 강제로서는 한마음 한뜻, 어림도 없다고 생각한다.

대화와 의논의 과정

시간을 내서 대화나 의논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다음 과정을 거치게 된다.

첫 번째 단계는 서로 다른 의견을 발견하는 단계다.

대화와 의논을 한다는 것은 누구나 대등한 입장일 때 가능한 일이다. 그래야 누구라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할 수 있게 된다. 어느 쪽에 힘이 실리거나 다른 한 쪽을 무시하게 되면 충분한 대화나 의논이 될 수 없다. 누구라도 대등하게 존중받고 물리적 심리적 압박이 없어야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고 의사소통이 활발하고 다양한 의견을 쏟아내게 된다. 다른 의견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대화가 건강하고 격의 없다는 말이다.

서로 다름을 확인하는 것, 이것이 의논에서 첫 번째 단계다.

만약에 서로 다른 의견이 드러나지 않고, 지시나 보고, 자기주장만 있는 자리라면 이미 대화는 죽고 의논도 사라진다.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더라도 서로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의논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의견 대립이나 충돌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화 초반부터 열 받기 시작하며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두 번째 단계는 치열한 공방이 자유롭게 오고 가는 단계다.

서로 다른 의견에는 반론이 있게 마련이고, 반론에 재반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의논이 충분하기 되기 위해서는 치열한 공방이 자유롭게 오고 가야 한다. 자유롭게 반론을 낼 수 없다면 의논은 하나마나다. 그렇다고 서로 적대적이거나 논쟁으로 치달아서도 안 된다. 자기 말을 하기에 바빠 상대 말이 전혀 들어오지 않게 되며, 듣더라도 바르게 들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상대를 공격하고 흠집을 내는 반론은 어떤 경우에서도 해서는 안 된다.

대화란 모름지기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되고, 그 다름을 존중해 주는데서 계속 유지된다. 이것은 곧, 상대에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그래야 그가 경험한 세계, 처해진 환경, 삶의 바탕을 이해할 수 있다. 왜 그렇게 생각하고, 왜 그렇게 말을 하고,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함께 하고 함께 갈 수 있겠는가.

세 번째 단계는 의견을 수정하는 단계다.

반론에 재반론이 있고 그것을 여러 차례 계속 반복하다 보면 각 의견에 대한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고, 불분명한 부분이 명확해지며, 좁은 시야가 넓어진다. 그러면서 각 의견을 수정하게 된다. 물론 중간 단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고 갈등이 일어나고 혼란이 생겨나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불분명한 것이 더욱 선명해지기 때문에 오히려 더 완벽한 결론에 도달하기는 쉽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서든 끝까지 대화를 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들은 한두 번 얘기해 보고 이게 아니다 싶어 이내 팩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당신하고는 함께 할 수 없어,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어하며 상대 탓을 하며 판을 깨버린다.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

대화의 목적이 내 주장을 기어이 관철하고 상대를 깔아뭉개는 것이 아니라면 의견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대화를 중단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시간도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다. 한두 시간이 걸리든, 하루 이틀이 걸리든, 한 달 두 달, 12년이 걸리더라도 좋다. 대화를 깨지 않고 끝까지 의논한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각자 의견들이 여러 방면으로 수정이 되면서 하나로 모아져간다.

네 번째 단계는 모두가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좋은 안이 탄생되는 단계다.

한마음 한뜻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된다. 어느 단계라도 생략하게 되면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없다. 누구나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안이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는 지극히 복잡하고 요란하고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아무런 잡음 없이 조용하게 진행되는 의논이란 있을 수 없다. 만약에 있다면 이미 어느 정도 암묵적으로 합의를 이룬 사안이거나 아니면 아예 믿을 바가 못 되는 일일뿐이다.

 

다수결이냐 만장일치냐

의사결정에는 다수결과 만장일치 제도가 있다. 다수결은 소수 의견을 희생하고서라도 다수 의견을 취하는 것이고, 만장일치는 나머지 남은 한명마저 납득할 때까지 대화하고 의논하는 것이다. 한마음 한뜻을 이루는 의논이란 만장일치에 해당된다.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하는 것은 소수 의견들을 묵살하고 입을 닫아버리게 한다. 힘의 논리가 판을 치고, 야합이 이루어지고, 폭언 폭력이 끊이지 않는다.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하는 국회를 보라. 다수의 횡포와 대항하는 사람들의 폭언 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다수결로 정하는 일은 손쉬운 일이다. 결정도 빠르고 일의 시작도 빠르다. 하지만 일의 추진이 생각만큼 되지 않는다. 참여하는 사람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절대 흔쾌하게 협력하지 않을뿐더러 기회 있을 때마다 트집 잡고 발목 잡고 은근히 방해한다.

이에 비해 만장일치는 소수 의견을 무시하는 법이 없다. 마지막 남은 한 명마저 납득할 때까지 대화와 의논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시간이 가고 에너지가 더 든다. 하지만 그 만한 가치가 있다. 비록 시작은 미루어질지 모르지만 시작 이후에는 일사천리로 일은 추진된다. 방해꾼이 없는 까닭이요, 모두 흔쾌하게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빤한 결론이 보이는 일이라 해도 인내하며 마지막 남은 한명까지 납득시켜가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권위나 통제 억압에 의한 납득이 아니라 누구라도 할 말을 자유로이 다하는 가운데 스스로 납득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상이지 않는가. 말은 쉬울지 몰라도 애당초 불가능한 일 아닌가. 만약에 그렇다면 처음부터 한마음 한뜻이란 말조차 있을 수 없는 게 아닌가. 한마음 한뜻이란 불평불만을 가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있으면 성립되지 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장일치로 의사를 결정하는 제도가 없는 것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더듬어보면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 화백제도라는 만장일치의 의결 기구가 있었다. 국가의 중대한 사건에 대해서는 반드시 많은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했고, 단 한 사람이라도 다른 의견이 있을 때는 그 일을 중지했다고 한다.

미국에는 배심원제도가 있다. 12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유무죄판결과 형량을 정하는데 만장일치로 결정한다.

네덜란드 사회경제협의회(SER)는 아무리 의견 충돌이 있어도 끝까지 대화한다. 1년 걸리든 2년이 걸리든 기간은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다.

세상에 크고 작은 생태공동체들 중에도 만장일치로 결의하는 곳이 많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2011622일 안보리 결의안 추천으로 회원국 192개국 만장일치로 재임하게 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입교174(2011) 827일에 천리교집회(集會) 70주년 기념식이 열렸는데 이때 하신 진주님 말씀 속에도 만장일치라는 합의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 일부를 잠시 살펴보자.

집회는 의논의 장입니다. 각 교구에서 추천한 집회원이 지방의 소리를 반영하면서 어디까지나 의논의 리에 따라 기탄없이 의견을 서로 교환하고, 만장일치의 결론으로 한마음 한뜻의 결실을 구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 모인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와 장소에 따라 다수결로써 일을 추진하는 쪽이 결정하기 쉽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의논할 사항도 여러 가지에 걸쳐있고, 지방의 사정도 여러 가지로 있기 때문에 모두 마음을 모아 만장일치를 이루는 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사 생각하는 방법은 여러 갈래입니다. 자신을 앞세우는 가 타인을 앞세우는 가, 이길의 상식을 앞세우는 가 세간의 상식을 앞세우는가에 따라 행동이나 판단에 어긋남이 생깁니다. 그래서 교조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세상사를 생각한다면 세간에는 통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집회의 근본정신이 신한줄기 신앙신념을 기초로 해서 만장일치를 이루는 의논의 리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더라도 자칫하면 세상의 리에 흘러 인간생각의 안이함으로 기울지 않는가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모임이 의의가 있기 위해서는 이미 서로 알고 있는 것을 재확인 할뿐만 아니라 이길의 신앙자로서, 교조님의 도구인 용재로서 신한줄기의 부동의 신념을 바르게 다져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 진주님의 말씀처럼 한마음 한뜻, 만장일치, 신한줄기 정신은 별개가 아니다. 이와 같이 이길의 가르침 속에는 끊임없이 한마음 한뜻을 언급하고 있다. 자기 생각이나 인간 중심의 판단을 내려놓고 교조님의 모본과 어버이신님의 가르침을 토대로 끝까지 의논해 간다면 반드시 한마음 한뜻이 된다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한마음 한뜻은 모든 교리의 귀결점이라고 생각한다. 각자 멋대로의 즐거움이 아니라 신이 데리고 가 주시는 즐거움, 모두가 함께 즐거워질 수 있는 신인화락(神人和樂)의 길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 역시 모든 사람들에게 맞출 수도 없다. 그러나 어버이신님의 가르침과 교조님의 모본을 중심에 세워놓고 서로 맞추게 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욕이 있겠지만 신님 앞에서는 사욕이 있을 수 없으며(신악가 5장 넷에) 억지 욕심 억센 고집을 피울 수 없는 노릇이다. 이길의 가르침을 자기 생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길의 가르침에 각자 자기를 맞추어가야 한다. 그래야 만장일치를 이루는 의논이 될 수 있고, 한마음 한뜻의 조화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한마음 한뜻이 되기 위해서는 대화와 의논의 모든 단계에서 자기 틀을 깨는 유연한 사고와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대화와 의논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어떻게 해서든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의견을 만들겠다는 중심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만장일치다. 아무리 시간이 걸리고 다른 것이 희생되더라도 모두가 납득할 때까지 대화하고 의논을 한다. 이것이 우리가 언제까지라도 지켜가야 할 중요한 마음가짐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들은 흔히 한 사람 정도야, 이까짓 거하며 소홀하게 여기기 쉽지만 한 사람 어긋나면 만사람 어긋나고, 한 사람 도움 받으면 만사람 도움 받는 리라고 하신 다음 지도말씀처럼 단 한 사람, 작은 것 하나에 담긴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한 사람 어긋나면 만사람 어긋난다. 안 되는 것 하라고는 아니 한다. 한 사람 도우면 만사람 도움받는 리,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 때를 분간하여 서로 의논 서로 의논하는 마음, 물도 새지 않도록 충분히 다하면 신의 수호라 한다. (1904. 12. 14)

 

작은 것이 어떻게 될지. 큰 것이 어떻게 될지. 이 두 가지가 어렵다. 어렵게 보면 자꾸만 어렵게 생각된다. 무슨 일이든 의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논을 하되 빠짐이 없도록. 벌써 몇 시야 몇 시야, 밤도 깊은데 하는 마음으로는 아무리 모여도 아무것도 안 된다. 모두 한마음으로 합치면 당장 그 자리에서 다스려지는 거야. (1894. 1. 22)

 

리더, 사회자, 심의 역할

대화와 의논의 중심에 리더나 장이 있다. 모임의 리더, 집에는 가장, 회사에서는 사장, 교회에서는 교회장이다. 이를 한마디로 심이라 한다. 심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모든 사람들이 맞추어오라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자기 식 자기 스타일대로 모임체를 이끌어 가도 좋은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어버이신님의 뜻을 적극 추구하고 교조님의 모본을 거울삼아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중심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심이 독단에 빠져서는 안 되며, 논쟁의 중심에 빨려 들어가서도 안 된다. 오히려 균형을 잡아야 한다. 이때 어느 쪽에도 편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심이 어느 한 쪽을 편들기 시작하면 이미 대화는 박살이 나고 의논이 성립되지 않는다. 심은 언제 어떤 경우에서나 어떻게 하면 전체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을까하는데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때 절대 흔들리지 않는 기준점 잣대는 어버이신님의 가르침과 교조님의 모본이다.

흔히 대화나 의논 도중에 심의 의지나 심의 의견이 무엇인지 묻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도 심은 자기 의지나 의견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 심이 자기 의지를 밝히고 의견을 낸다는 것은 바로 그 순간 다른 의견은 모두 차단되거나 묵살되고 심지어는 파가 나누어지고 만다.

지도말씀에

자아 자아, 파를 가른다고 한다, 파를 가른다는 것은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가. 자아 자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지가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사고방식이 전혀 다르다. 이런 것도 저런 것도 하나의 마음에서 시작된 것. 한마음 한뜻이 도리에 맞지마는, 이것이 안 되기 때문에, 이것도 나누고 저것도 나누고, 나누기 때문에 양쪽이 다 안 돼. 양쪽이 다 어렵게 된다. 한줄기의 길에 파를 가르기 때문에 걷기 어렵다. 어떤 것도 하나에서 시작된 것. 하나에서 시작하라. 이쪽저쪽 각각 하나 파를 가르기 때문에 안 되는 거야. (1907. 4. 6)

고 했다. 한마음 한 뜻이 되지 못하고 파가 나누어지면 이쪽도 저쪽도 모두 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가와라마치 초대 후까야 겐지로라는 유명한 선생님이 있다. 무엇이든 좋아 좋아해서 겟코겐상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어느 때 교회에 중요한 사안을 놓고 양쪽으로 편이 갈라져 의견이 팽팽한 적이 있었다. 한쪽에서 의견을 말하면 후까야 선생님이 그래 그래, 훌륭한 의견이야하며 기뻐하셨다. 그러면 자기 의견에 회장님이 손들어준다 싶어 한쪽에서 만족하며 매우 좋아한다. 그런데 다른 쪽에서도 의견을 낸다. 그때도 회장님은 즐거워하시며 그래 그래, 정말 좋은 의견이야, 훌륭해.’ 하신다. 그래서 다른 쪽 사람들도 의기양양하며 만족하고 좋아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양쪽 다 좋은 의견이라고 하시면 어느 쪽을 하라는 말인가. 그래서 코맹맹이 소리로 양쪽에서 어느 쪽이든 결정해 주셔야지요.’하고 요구한다. 그러면 회장님은 결정 안 해도 좋아하신다. 일동이 난처해하며 그래 가지고, 어떻게 일을 추진하라는 말입니까항의한다. 이 말에도 빙그레 웃으시며 일을 추진 안 해도 좋아라고 하신다. 아무런 망설임없이 나오는 말씀이다.

일동은 하고 놀란다. 회장님이 요구하신 것은 단 하나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일동은 다시 의논에 의논을 거듭한다. 드디어 A안도 아니고 B안도 아닌 C안이 나온다. 모두가 마음이 모인 결론이었다. 모두가 마음이 모인 결과였기에 아무런 방해도 없이 일은 일사천리로 추진된다.

 

한마음 한뜻이 되도록 모두의 마음을 모아가는 것, 이것이 심이 지닌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편 가르지 않고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모두 데리고 가는 것. 시간이 가고 힘이 들지만 이것 외에 달리 다른 길이 없다. 우리들은 빨리 결론을 내리려고 독단으로 치닫거나 다수결 원칙을 선호하지만 이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기득권자들의 이익에 봉사하기 십상이다. 이것으로는 한마음 한뜻을 결코 이룰 수 없다. 만장일치라야 한마음 한뜻이 된다.

그러므로 심이 된 사람은 어떤 차별이나 편견없이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차별하지 않는다. 차별이란 파괴의 제1원인이라고 한다. (1898. 7. 25)

 

대화와 의논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들

하지만 대화를 하고 의논을 한다 해도 한계가 너무나 많다.

선택하는 언어에 문제가 있기도 하고, 같은 말이라도 두 가지 이상 뜻을 지닌 말도 많다. 그리고 서로 다른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똑같은 말이라도 다른 뜻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 듣는 사람의 지식이나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도 전혀 다른 양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보자. ‘라고 하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가.

물건이나 사람을 실어 나르는 도 있고, 먹는 과일 도 있고, 식물의 씨눈을 라고 하며, 사람 몸에 도 있다. 여기다가 거기에 얽힌 사람들의 경험이나 지식, 감정까지 동원된다면 엄청나게 많은 뜻이 되어버리고 만다. 단어 한 마디가 이럴진대 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문장이나 대화는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말하고 상대가 듣는다고 해서 그 누구도 내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한다고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내 말에 상대가 100% 아니 80, 90%라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이다. 더구나 내 말에 바로 행동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우리들은 말을 하지만 내 인연 내 경험대로 말을 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듣는 입장에서도 자기 인연과 경험 감정대로 말을 듣는다. 내가 말하는 대로 온전하게 그가 듣는 것이 아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기 인연이나 경험에 비추어서 판단한다. 그래서 좋은 의도에서 대화를 시작했지만 중간에 대화가 어긋나고 판이 깨어져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말하는 입장에서는 같은 말이라도 한 번 말하고 두 번 말하고 기회를 봐 가며 세 번 네 번 최소한 아홉 번까지도 말한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3·3·3 아홉 번 말이다. 그렇다고 한 자리에서 잔소리 같이 거듭하라는 말은 아니다. 간격을 두고 충분히 납득을 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게다. 상대가 충분히 납득을 해야 내 마음 같이 되는 것이다.

듣는 입장일 때도 마찬가지다. 한 번 듣는다고 모두 이해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언제나 귀를 열고 기회 있을 때마다 듣고 듣고 또 들으면서 되돌아보고 확인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조님도 주변 사람들에게 가르침이 구석구석까지 스며들 수 있도록 인내를 가지고 끈기 있게 항상 거듭 거듭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이런 사정을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저 할머니는 말이야. 대물차물, 인연, 여덟가지 티끌 밖에 몰라.’하며 예사로 여기기도 했는데 무리가 아니었다.

기록으로 남긴 친필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내용들은 계속해서 반복하고 또 반복을 해서 아주 자상하고 쉽게 일러 주고 있다. 그러고도 모자라 이것을 두고두고 거듭해서 읽고 또 읽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수훈의 리를 받을 때 듣는 별석 말씀 역시 아홉 번 거듭해서 들려주는데 바로 이런 사정을 대변해주기도 한다.

포기(抛棄)라는 말이 있다. 하던 일을 중도에서 그만둔다는 말이다. 이 말의 포()자라는 한자를 파자해서 해석해 보면 아홉 번이나 힘을 다하고도 안 되면 손을 놓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 만큼 바로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고, 무슨 일이든 최소 아홉 번까지 해 보고 포기하라는 게다.

말을 하고 말을 듣는데도 그만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3·3·3. 삼 세 번에 다시 삼 세 번하는 마음으로 노력한다면 의논이 안 될 리도 없다. 우리는 흔히 한 두 번이나 서 너 번 쯤 해 보고 포기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어떤 권위자, 전문가, 윗사람, 선배, 선생이 말한다고 쉽게 믿어버리고 생각 없이 따르는 경향이 있다. 말하는 입장에서도 내가 잘 안다는 식으로 은연중에 대화를 몰아가기도 한다. 이것이 또한 의논을 어렵게 만들어버리는 요인이다. 그러나 권위자, 전문가, 윗사람이라 해서 쉽게 믿어버리고, 쉽게 따라 가도 될까. 각자 다른 인연과 배경이 있고, 여러 경우의 수가 너무나 다양하게 많기 때문에 그냥 믿어버리고 그냥 따라가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라도 그것이 과연 진실하고 합당한가, 모두에게 이익이 되고 즐거움을 주고 용솟음치게 하는가를 늘 따져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말했다고 해서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교조님의 모본에 비추어보고, 어버이신님의 잣대에 맞추어보라는 것이다. 만약에 여기에 해당하지 않으면 누가 말하더라도 새겨들을 필요가 없다. 여기에 맞는 말이라면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말하고, 아이가 말하더라도 받아들이고 새겨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무엇이든 결론을 빨리 빨리 내려는 것도 대화를 가로막는 요인이다. 대화를 하고 의논을 하는 것은 여러 단계를 거친다. 한 순간에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확인하는데도 시간이 걸리고 의견을 모아가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시간을 정해서 언제까지 해야 한다는 강박은 여러 무리수를 낳게 한다.

또한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는 것도 대화와 의논을 가로막는 요인이다. 우리들은 흔히 대화를 하면서 상대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것 같아도 어느 순간 귀담아 듣지 않는다. 다른 생각으로 빠져들거나 나와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반박할 논리를 찾느라 더 이상 귀 담아 듣지 않는다. 말허리를 자르기 위해서 기회를 옆보고, 말꼬리 잡는데 여념이 없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진다. 결국 동문서답하다가 대화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상처를 줄지 모른다는 두려움, 상처를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대화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날마다 하는 대화를 어렵게 만들고 아니면 외면해 버리게 만든다.

이렇게 해서 대화나 의논이 없는 관계가 생겨난다.

 

아무리 의논해도 마음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 것은

아무리 의논하고 의논을 해도 마음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 원인을 친필에서는

무엇이든 가슴과 입이 틀리면 신의 마음에 이것 맞지 않아 12-133

진실이 신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마음 기울여 애쓴다 해도 12-134

이것만은 아무리 누가 의논하더라도 아무래도 맞지 않아 월일 물러난다 12-135

고 밝히고 있다.

가슴과 입이 틀리면 아무리 의논해도 소용이 없고 어버이신님의 수호도 없다는 것이다. ‘가슴과 입이 틀리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가. 자기 잇속을 챙기기 위해 말하고, 힘이나 권위에 빌붙어먹기 위해 말을 치장하고, 불쾌감이나 불만족을 숨긴 채 겉으로 평화를 가장하는 것일 게다. 이러한 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가슴 속에 쌓인 여덟가지 티끌에 있지 않는가. 인색 탐 미움 편애 원망 분노 욕심 교만.

각자 이런 티끌에 쌓인 채 대화를 하고, 의논에 의논을 해본들 한마음 한뜻이 될 턱이 없다. 그래서 각자 속마음을 살피고 티끌을 터는 노력을 병행하라고 친필은 다음과 같이 일러주고 있지 않는가.

이제까지는 차츰차츰 일러주고 미리 알려 왔지만 핵심은 몰라 12-131

이 핵심은 무엇인가 하면 가슴속 반성 이것이 제일이야 12-132

진주님도 이런 사정을 알고 다음과 같이 의논에 임하는 태도로 반성의 중요성을 밝혀 주고 계신다.

어버이신님이 바라시는 의논이란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과연 교조님의 마음에 맞추고 있는가를 항상 자기 자신에게 물으면서 신한줄기의 정신을 세우고 서로가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서로 격려하는 것에 있습니다. 모본의 길에 비추어서 자기 행동이나 마음씀을 반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논하는 당사자는 같은 길의 신앙자로서 교조님의 의도에 하나의 마음이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마음을 연마하고 갈고 닦아서 한마음 한뜻의 기쁨을 수호받을 수 있도록 의논하는데 있습니다.

(입교174827, 천리교집회 70주년 기념식에서, 진주님 말씀)

 

자기를 반성함이 없이 각자 내가 옳다, 내가 잘 안다, 내가 리를 갖고 있다하는 따위 마음을 가지고서는 아무리 의논하고 의논을 해도 마음이 모이지 않는다.

이러한 리야, 저러한 리야 하고 인간이 제멋대로 신의 길에 없는 리를 끌어내기 때문에 다스려지지 않는다. 정해지지 않는다. (1889. 5. 17)

(다음호에 계속)

 

* 지난 319일에 있었던 제56회 기초교리강좌를 토대로 다시 정리해서 싣습니다. 많은 도움 되셨으면 합니다.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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