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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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이룬 33년만의 쾌거

 

김영미(광신포교소)

 

1992815일 어느 여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오랜 기간 동안 간경화를 앓으셨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해본 일이 없어서 너무 갑작스러웠고 충격 그 자체였다. 온 집안은 눈물바다에 통곡으로 꽉 차서 내 귀가 멍멍했고, 나도 모르게 울다가 잠드는 일을 반복했다. 그래서 아버지 3일상을 치를 때 기억은 너무 희미하다. 솔직히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 딱 한 가지 이 많은 짐과 빚을 나 혼자 어찌 안고 가라고 이렇게 허무하게 가나.”라는 엄마의 서러운 울음소리와 하소연이었다. 12살의 어린 나이었지만 엄마의 짐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 많은 짐과 빚, 엄마가 어찌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엄마가 우릴 버리고 가면 어쩌나? 걱정하다가 잠들어버렸고 아버지는 멀리 가셨다.

아버지 장례 후, 우리집에는 갑작스럽게 많은 일들이 들이 닥쳤다. 늘 웃어주고 친절했던 사람들이 화를 내기 시작했고, 포악스럽게 변했다. 빚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변화는 어쩔 수 없었지만 솔직히 무서웠다. 그런 일들이 한동안 반복되고, 엄마는 늘 약을 달고 살았고 빚쟁이에 시달리면서 몇 년의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15살 때, 엄마는 나를 붙잡고 진솔하게 이야길 해주셨다.

엄마는 사실 살아가는 게 너무나 힘들어서 자살을 시도하려 했어. 지금껏 버텨온 삶이 너무 버거워서 죽고 싶었단다.”라는 말에 솔직히 놀랐지만 덤덤하게 엄마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그런데 순간 네 오빠랑 네가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면서 내 새끼들! 내 새끼들은 나 없이 살면 그 고통 어찌 감당할까. 내 짐 다 껴안고 살건 데 내 새끼들 불쌍하잖아.’라는 생각에 엄마가 자살시도를 하다가 말았어. 우선 엄마가 나쁜 맘먹은 거 미안하게 생각해. 그리고 엄마가 단단히 각오한 게 있어. 너희들에게는 어려움을 피하는 방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부딪히고 극복하는 방법을 꼭 가르쳐 줄게. 늘 옆에서 너희들 지켜 줄 테니 지금 힘들어도 견뎌내자. 언젠가 이렇게 버티고 살아온 삶은 우릴 알아줄 날이 있을 거야.” 엄마의 말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왜냐하면 엄마의 말은 아주 비장했고 뭔가 단단히 결심한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엄마와의 대화를 늘 기억하면, 힘든 환경 속에서도 오빠와 나를 버리지 않고 엄마가 버텨 와 주신 것만으로도 늘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엄마 어린 시절부터 해오던 천리교를 다시 찾기 시작하셨고, 맘 먹은 것은 실천으로 옮기시곤 했다. 그 중에 하나가 내 친할머니, 즉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 나는 멋모르고 엄마한테 할머니 장남(아버지)이 이젠 없는데 다른 자식들이 모셔야 되는 게 아니냐면서 따진 적이 있다.

그런데 엄마는 나에게 너희들 어렸을 때 너희들을 키워준 분은 할머니이시고, 난 삼촌들과 고모들에게 물질적으로 힘들게 한 사람이야. 엄마는 할머니께 너희들을 맡겼던 큰 신세를 졌고,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아빠가 살아계실 때처럼 할머니를 모시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난, 또 엄마한테 설득을 당했지만, 무엇보다 엄마의 신념이 확고했고 당연한 것이라고 나에게 인지를 시켜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만약 할머니에게 함부로 했거나, 할머니를 진짜 자식들에게 보냈다면 그 순간은 홀가분했을지라도 나도 엄마를 무시했을 거란 생각이 가끔 들곤 한다.

난 엄마가 늘 희생하고 고생해오던 모습을 지켜봐서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늘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엄마는 내가 불만을 품지 않도록 늘 가르쳐 주셨고 왜 이런 어려운 상황을 겪어야 하는지 설명을 하나씩 해주셨다. 그래서 난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설명이 없었다면 천리교에서 말하는 팔계명을 인색한/탐내는/편애하는/미워하는/원망하는/분노하는/욕심내는/교만한 마음을 품자로 거꾸로 실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효심을 발휘한 에피소드다.

우리가족이 물질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생활보호대상자 신청을 해야만 했다. 신청과정 중에 늘 걸렸던 것은, 등본 상에 할머니 때문에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회복지 담당자는 할머니의 친자식의 월 소득이 책정되어있기 때문에, 할머니는 우리들 등본에서 빼서 친자식들 등본에 다시 올리고, 우리만 생활보호대상자를 신청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 엄마는 담당자에게 돈 몇 푼 때문에 자식으로서 불효를 하라 치면, 생활보호대상자 같은 거 필요 없으니 없던 일로 합시다.”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나로선 그때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며칠 후 사회복지 담당자는 다시 엄마를 찾아와서 할머니를 친자식 등본에 올리지 않고 우리 가족과 같이 올려져 있어도 모두 생활보호대상자 혜택을 받도록 해주셨다.

그 당시 담당자가 나에게 우리 가족이 어떻게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 있었는지 과정을 설명해주셨고 무엇보다 엄마 효심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하셨다. 남들은 생활보호대상자가 되기 위해서 온갖 편법을 다 쓰는데 엄마 같은 경우는 솔직하시고 진실하셔서, 그것이 마음을 움직이게 하셨다고, 훌륭한 엄마를 둔 것에 늘 감사하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위에 언급했던 것처럼 엄마는 삶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 종교에 의지하여 열심히 노력하셨다. 그 종교는 천리교이다. 엄마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온 종교이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와 같이 널리 알려진 종교도 아니라, 딸인 나도 솔직히 처음엔 이질감이 들었고, 엄마를 사이비 종교인으로 볼까봐 엄마가 믿는 종교를 늘 숨기고 살았다. 하지만 엄마는 가족에게 종교에 대해서 억지로 강요하지도 않았고 다만, 종교의 교리에 맞도록 당신 스스로 늘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천리교에서 늘 언급하는 것은 근본에 충실하고 실천을 통한 인간 구제를 모토로 삼고 있었다.

, 한 사람이 주어진 환경 속에 진실하게 살아가다보면, 그 사람을 중심으로 사돈 팔촌, 즉 주변인들의 삶도 같이 바뀐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이 말을 나의 큰 외삼촌(양보교회장)을 통해서 들었다.

큰 외삼촌은 많은 사람들을 한 번에 구제하려는 것도 욕심이니, 집안의 가족, 내 피붙이와 같은 내 근본에 충실하다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야. 진실하게 가족 한 사람을 위해 살아도 언젠가는 그 진심어린 정성을 알아줄 날이 있을 거야.”라고 말씀해주셨다. 머리로만 이해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몸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철학적인 이야기였다. 그런데 얼마 전에 엄마가 그것을 실천했고 딸인 나도 체감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겨버렸다.

 

올해 3월 말경에 할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할머니가 병원에 실려 왔다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했으며 동시에 무덤덤했다. 늘 집안에 우환이 많아서 거기에 무뎌진 것이다. 그래서 수련에 참가하고 있던 엄마한테 침착하게 연락해서 엄마. 할머니 다치셔서 병원응급실에 있으시데. 빨리 삼촌고모 모든 가족들에게 알려. 엄마혼자만 껴안으면 안 돼!”라고 이야길 했다.

할머니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저러다가 돌아가시면 어쩌나 맘이 좀 묘했다. 하지만 엄마, 오빠,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에 대처했다.

할머니를 친 분들이 직접 할머니를 모셔 와서 솔직하게 진술한 듯 보였으나, 할머니가 부상당한 상태와 뭔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오빠가 직감을 했다. 그래도 그냥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그 이후로 신기한 일들이 일어났다.

할머니 상태가 아주 심각하다보니, 할머니를 간병하기가 힘들 것 같아 엄마가 간병인을 불렀다. 근데 간병인이 오더니 ! 어제 그 할머니다! 엄마야.!”하면서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가버렸다. 그 때 그 순간 오빠가 ? 어제 할머니 모셔왔던 분들 중에 한분인데?”라고 말했다. 분명히 할머니가 신호등을 건널 때 파란불 신호가 끝날 쯤에 건너다가 차 문에 치여서 할머니가 사고가 난 것이라는 그들의 진술을 의심케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경찰 조사를 시작하면서 할머니가 직접 말 못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오빠와 올케가 할머니 교통사고 현장에 직접 가보니 할머니의 혈흔과 빠진 이가 그대로 있었고, 할머니 사고 당시 목격자들이 하는 말-할머니는 파란불일 때 건너다가 사고를 당했다-을 들은 근처 식당 장어집 사장님의 진술, 그리고 도망간 간병인의 명함을 가지고 있었던 다음 번에 온 간병인 아줌마의 태도, 이 모든 심증 및 물증들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발로 뛰어준 교통계 조사자의 도움으로 가해자가 신호위반을 했다는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

엄마와 그분이 직접 만나 합의를 하는 상황에서 그분은 우리가 왜 이런 악연으로 만났을까요. 죄송합니다.”라고 진심으로 사과를 해주셨다. 가해자 분이 진심으로 사과를 해주셨고 합의도 잘해주셔서 일을 더 크게 만들지 말자는 것이 어머니의 확고한 결심이었다.

합의금이 손에 들어오고 이 돈을 어찌 활용할지, 난 솔직한 심정으로 욕심을 냈다. 철없는 나는 오빠랑 내 빚 정리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엄마한테 권했다. 근데 오빠와 엄마는 생각이 달랐다. 오빠는 할머니가 아프시니 물이 따뜻하게 나오고 난방이 되는 투룸을 구해서 살자고 권했다고 한다. 난 부끄러웠다. 오빠도 지금 물질적으로 힘든 상태인데 장남은 장남답게 할머니 건강을 위한 집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엄마의 생각은 확실히 달랐다.

이 돈도 갑작스럽게 들어온 큰 돈이고 이건 확실히 할머니 돈이야. 이 돈으로 가족들끼리 불화를 부추길 수도 있으니 이 돈을 할머니께 보여드리고, 돌아가시기 전에 할머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정리해드리고 싶어. 할머니 백내장도 고쳐드리고 싶고, 부러진 이도 정리해 드리고 싶고, 귀도 고쳐드리고 싶고 그래. 할머니를 위해 쓰자. 할머니 돈 우리한테 쓰는 거, 쓸 땐 좋지만 나중엔 맘의 짐이 될 거야.”

난 또 할 말이 없었다. 한편으론 참 지극히 부처님과 같은 맘의 엄마가 이해가 안 되었고, 난 급해 죽겠는데 또 살아가면서 이 짐을 언제까지 지어야 하나 걱정하며 순간적인 원망도 들었다. 그리고 약간 비꼬듯이 엄마의 현명한 판단대로 하길 바래.”라고 말했다.

그 때의 나를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미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확실히 그 당시의 나를 반성하게 만든 일이 또 생겨났다.

그것은, 아빠의 형제들과 친가 친척들이 엄마의 노고와 진심을 알아주시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에게 네가 저번에 엄마한테 엄마 모든 짐을 혼자지지 말고 가족들과 함께 나누고 아빠형제들도 할머니한테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하지 않을까? 엄마만 효도하면 그것도 욕심이야라는 말을 듣고 실천을 해봤어.”라고 말씀하셨다.

그 실천은 할머니 간병을 아빠형제들이 돌아가면서 한다는 것이었다.

간병인을 쓰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효도해보는 게 어떻냐고 가족들에게 제안을 했어. 물론 강요와 의무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사람은 하자고 제안을 했어. 그래서 고모와 작은 숙모가 우선 도와주고, 울산에 있는 숙모와 삼촌은 직접 오는 게 힘드니 물질적으로 도와준다더구나. 그리고 네 올케 언니가 엄마 대신해서 신전에 재물도 차려주면서 엄마를 많이 도와주고 있어. 오빠도 뭔가 맘이 변했는지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해. 할머니로 인해서 가족들이 화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확실한 것 같아. 이 상황을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해.”라고 엄마가 다시 한 번 나에게 진실하게 살아온 삶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 시켜주셨다.

더 기뻤던 소식은 둘째 고모가 할머니에게 맺혀 있는 서러움이 많아서 발길을 끊었었는데 엄마가 근행을 본 후 형님이 오셨으면 더더욱 좋겠지만, 안 오시면 안 오시는 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고모께 연락을 드렸더니 바로 달려와 주셨다고 한다. 엄마는 평소에 모든 형제들에게 천리교를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고 늘 각자의 종교를 가지고 의지하라고 조언을 해주신다. 그래서 둘째 고모도 막내 고모를 따라 교회(기독교)에 다니시는데, 엄마는 고모께 형님 다니시는 교회에서 첫째로 중시하던 게 뭐던가요?”라고 여쭈었더니 가족 형제자매에게 잘하라고 하지.” “그렇죠? 형님. 특히 부모에게 잘하라고 하지 않던가요? 형님이 믿으시는 하느님께 진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면 어떨까요? 이왕이면 하느님 욕보이게 하지 말고 하느님의 자식으로 최선을 다하고 즐겁게 살아보는 게 어떨까요?”라고 엄마가 고모께 말씀드렸더니 나 그럼 이번 주엔 조금 힘들고 다음 주 주말부터 엄마 간병할게. 그때 꼭 올게라고 직접 약속을 하셨다. 엄마는 그 말씀을 특별한 기대도 없이 그냥 잊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약속한 날짜에 고모가 할머니 간병하기 위해서 찾아오셨다. 가족한 사람 한사람에게 찾아오는 변화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가 없었다.

 

무엇보다, 할머니의 변화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병원이 갑갑하다며 집에 가고 싶다고 우시기에 엄마가 할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온 적이 있다. 그런데 할머니가 집에 오셔서는 아픈 다리로 신전에 넙죽 절을 하시면서 엄마에게 아이고. 내가 여태까지 너에 대한 고마움, 신님에 대한 고마움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 미안하다. 이런 나를 이토록 정성스럽게 데리고 살아주는 네가 너무나 고맙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왜 여태껏 몰랐을까 내가 바보다. 내가 못났다. 나를 이렇게 안아주는 건 너뿐인데. 아무도 없었는데 내가 왜 몰랐을까. 진짜 미안하고 고맙다.”라고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계속 반복하셨다.

사실 할머니는 개신교를 믿는 삼촌의 끈질긴 권유에 3년 전부터 개신교에 다니고 계셨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다녀오시면 할머니는 엄마에게 견디기 어려운 온갖 악담과 욕설을 퍼붓고는 했단다. 사탄이고 마귀라고 했을 거니까 할머니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르지만 엄마는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할머니가 신전에 엎드려 잘못했다고 엄마를 붙잡고 사과하고 참회하는 모습. 엄마가 전화를 통해 나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는데 엄마의 두 어깨에 짐이 덜어지고 가벼워지셨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 엄마 맘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애.”

. 엄마가 네 아빠가 죽고 나서 이 집안을 어찌 살려낼까 늘 막막했었는데 33년 동안 늘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니 세상이 그 정성과 진실을 알아주는구나. 큰 외삼촌이 엄마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자릴 지킬 수 있도록 늘 지켜주신 덕분이고 네 이모가 힘든 상황에서도 엄마를 뒤에서 보호해준 덕분이야. 그 덕으로 살아보고 버텨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엄마는 이 이상 행복한 일이 없어. 너무나 감사한 일이야.”

그러네. 외삼촌이 한사람만 인생을 잘 살아도 사돈팔촌, 주변 사람들 인연도 다 정리된다더니 진짜 그 말이 맞네. 엄마 너무 대단하다.”

진심으로 엄마가 너무 대단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딸로서 자식으로선, 남들과 다른 삶을 사는 듯한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에 진해 강습소에서 만난, 지금은 청주 원덕포교소 소장님 부부 최상현, 이의숙님(사적으론 이모부, 이모라 칭함)이 나에게 엄마는 진짜 열심히 닦아오셨고 홍길동처럼 실천해오셨어. 엄마는 그만큼 자신의 인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하고 계신거야. 그런 엄마를 넌 이해할 날이 분명 있을 거야. 그리고 어려운 일도 늘 전화위복이 될 테니 당황하지 말고 기다려봐라고 말씀해주셨다. 두 분은 내가 엄마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잡아주셨다.

두 분의 말씀처럼 진짜 이번 일로 엄마를 이해하는 날이 왔고, 물질적인 부자가 되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손가락질하고 원망해도 엄마가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한 자리를 지켜내시면서 나와 오빠를 보호하며,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깨달아가고 마음이 열리도록 인간구제에 대한 실천을 33년 동안 해 주신 쾌거를 눈과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니 엄마를 이해 안 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엄마가 이룬 33년만의 쾌거란 몇 년이 걸리더라도 항상 그 자리를 지켜낸다면, 언젠가는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어 가벼우면서도 사람을 얻고, 마음이 든든한 부자가 되어간다는 뜻이고, 무엇보다 인간구제란 어떠한 것인지 실제로 보이시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탄력을 받아 더 열심히 실천하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난 자식으로서 겉보기엔 훌륭하게 잘 되어 있는 자식은 아니다. 그래도 엄마가 보여주시는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내 자신을 채워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고, 행복하고 즐거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고 있으며, 때에 따라 교만하면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자식인 것은 사실이다.

자식으로써 부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물질적으로 돈을 잘 벌어 공부를 잘해내도록 뒷받침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에서 현명하게 대처하고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습득하게 해 주는 일이 아닐까. 이런 모습만 보여주어도 자연스럽게 따라하게 되고, 그런 부모가 감사해서 존중하고 효도해 드리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기 때문에 자식의 근본이 튼튼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크게 잘되는 것에 욕심내는 자식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도 지혜롭게 현명하게 즐겁게 잘 살아가면서 훌륭한 자식으로 성장하는 길을 엄마로부터 배우게 되었다.

확실한 것은 15년 전 엄마가 어린 나를 앉혀두고 어려운 상황을 피하지 않고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라는 약속을 엄마는 지켜내셨고, 나는 아직 어설프지만 그 엄마를 통해 배우며 따라가려 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있어서 하소연 하면

너만 진실하다면 굳이 변명 안 해도 언젠가는 세상이 알아 줄 날이 있을 거야.” 라고 조언해주시는 멋진 엄마를 둔 것이 너무 자랑스럽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현실을 잘 이겨낸 엄마를 하버드 대학교수보다 더 훌륭한 인생대학 인생과 최고의 교수라고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