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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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회 기초교리강좌

 

한마음 한뜻의 조화

 

이영수(저산포교소장)




 

1. ‘한마음 한뜻이란

우리는 흔히 마음을 하나로 모아 잘 해보자든지 어떻든지 마음을 하나로 해서 잘 해 보라고 한다. 소위 한마음 한뜻이 되라는 거다. 어디에서든 이런 말을 하고 듣는다. 이길 안에서나 밖에서도 이런 말이 결코 빠지지 않는다. ‘한마음 한뜻이야말로 모든 수호를 받는 바탕이고 행복을 여는 열쇠인줄 아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길에서 만큼 한마음 한뜻을 강조하는 곳이 달리 있을까.

이길의 가르침 속에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는 식의 고독한 수행을 요구하는 게 없다. 자연을 다스리고, 다른 문화를 무시하고, 세계를 정복하라는 식의 독단 아집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적과 아군을 구별해서 투쟁하고 쟁취해야한다는 식의 처절한 투사가 되기를 몰아가지도 않는다. 편 가르기가 없다. 1등주의를 조장하지도 않고, 몇 몇 인재를 앞세운 엘리트를 우대하는 가르침도 아니다.

단지 한마음 한뜻이 되라는 거다. 처음도 중간도 끝도 오로지 한마음 한뜻이 되라는 거다. 두 사람이면 두 사람, 다섯 사람이면 다섯 사람,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라는 거다. 혼자만 하지 말고, 편 갈라 끼리끼리만 하지 말고, 누구 한 사람도 제외하거나 소외시키지 말고 한 마음이 되어 함께 하고 함께 가라는 거다. 그렇다고 전제주의나 공산주의처럼 개성이 무시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박탈된 채, 억압받는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한마음 한뜻이 아니다.

 

한마음 한뜻이란 제 각기 천성을 살리고 역할을 충실히 하는 가운데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모두가 조화를 이루어나가는 것을 말한다. 한마음 한뜻이라고 해서 너와 내가 마음이 똑같아야 하고,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같은 목적을 공유하되 각자 특성을 살리고, 전체로서 유대를 살려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가 그토록 소망하는 일인데도 쉽지가 않다.

그렇다면 이길에서 말하는 한마음 한뜻이란 무엇이며, 과연 어떻게 하면 이룰 수 있는 것인가.

각자 성품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고, 덕이 다르고, 인연이 다른 데 말이다.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는가. 자기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없다. 한 집안에 같이 살고 있는 가운데, 부부라도, 부모 자식 간이라도, 형제간이라도 입장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고, 관심이 다르고, 정성이 다르고, 가는 길이 다르다. 그 외 사람은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있는가.

그런데도 한마음 한뜻이라니. 어떻게 한마음 한뜻이 되라는 말인가.

2. 한마음 한뜻인가

 

이길의 모든 가르침의 시작과 중간과 마지막까지 관통하는 것이 한마음 한뜻에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 수행이나 개인 실천보다 더 중요시 하고 있다.

진주님께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한마음 한뜻을 강조하신다. 유달 제3호 첫 문장에 바로 입교179, 교조130년제를 거행함에 앞서 생각하는 바를 밝혀, 모든 용재가 마음을 작정하여 성인을 이루고, 한마음 한뜻으로 활동하는데 도움을 주고자한다.’고 유달 발포 취지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지난 312일 제15대 한국전도청장 취임봉고제 인사말씀에서도 수차례나 반복하여 한마음 한뜻이 되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한마음 한뜻을 말씀하시는 그 뿌리는 무엇인가.

으뜸인 리와 근행에 담긴 사상 속에서 찾아보게 된다.

 

1) 으뜸인 리

이길에서는 태초이야기가 담긴 으뜸인 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감히 어떻게 태초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워서 할 수 있을까. 인간을 창조한 어버이신님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 만큼 이길은 인간이 낸 길이 아니라 신이 직접 낸 길임을 당당하게 시사해 주고 있지 않는가. 만약에 어버이신님이 직접 일러준 가르침이 아니라면 태초이야기는 은근 슬쩍 넘겨버리지 전면에 내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으뜸인 리를 잠시 살펴보자.

어버이신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만들어서 그들이 즐거운 삶을 누리는 것을 보고 함께 즐기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여러 본과 도구를 불러 정하시면서 먼저 납득을 시킨 후 받아들였다고 했다. 납득을 시키는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정하거나 명령 강제로 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판단과 협조를 바라셨다는 점이다. 그리고 역할을 부여하실 때는 그들을 먹어서 그 특성을 먼저 살펴보았다고 했다. 아무렇게나 역할을 맡긴 것이 아니라 특성대로 성품을 살릴 수 있는 역할을 맡겼다는 말이다. 여기서 먹어서라는 표현은 실제로 먹어서 삼켜버렸다는 의미보다 세심하게 따져서 역할을 맡기시는 모습을 비유로 설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남자추형종자의리와 여자묘상의리에는 몸소 듭시어 인간을 창조하시게 되었다고 했다.

어버이신님께서는 몇몇 도구는 먹고, 본이 되는 도구에는 스며들어갔다고 했다. 혼연일체가 되었다는 말이다. 자기 존재를 내세우거나 뽐내지 않고, 그리고 별도로 떨어져서 지시하거나 거들먹거리는 게 아니었다. 어버이신님과 본과 도구가 흡수 동화가 되어서 즉 혼연일체가 되어서 새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내용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에서 의논, 한마음 한뜻이라는 중요한 교의의 원형을 만난다.

친필에서도 이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세상 태초는 진흙바다 그 가운데는 미꾸라지뿐이었다 6-33

그 속에 인어와 흰뱀이 섞여 있어 잘 살펴보니 인간의 얼굴 6-34

그것을 보고 착상한 것은 진실한 월일의 마음인 거야 6-35

이들에게 도구를 끌어들여 차츰차츰 수호를 가르치게 되면 6-36

이 도구 결합수호와 지탱수호 이들을 몸속에 끌어넣어 가르친다면 6-37

수기승강수호와 풍기수호와 인출수호와 절단수호를 끌어들이면 6-38

것으로써 확실히 세상을 창조하려고 신은 의논을 했다 6-39

 

2) 근행의 정신

우리가 매일 혹은 월차제마다 올리는 근행의 핵심 정신은 무엇인가. 한마음 한뜻이다. 9가지의 서로 다른 악기를 다루고, 손춤을 추고, 노래 부르면서 조화를 이루어낸다. 각자 맡은 역할을 분명히 하되 티내지 않으면서 서로 맞추어 나간다.

남자와 여자가 골고루 올라가고, 나이 든 사람 젊은 사람이 고루 들어가고, 건강하거나 질병이 있거나, 많이 배우거나 적게 배우거나 가리지 않고 참여한다. 이 근행의 모습은 불교 예불이나 가톨릭 미사나 개신교 예배와는 사뭇 다르다. 엄숙 경건함과는 거리가 멀다. 흥겨움이 있고, 밝음이 있고, 평화가 있고, 용솟음이 있다.

유아영세를 받고 20여년 가톨릭 신앙을 하던 내가 천리교 근행 올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너무 놀라웠고, 적응이 되지 않았다. 성당에서는 색색으로 꾸민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의 환상적인 모습, 경건함이 있었다. 이게 참 좋았다. 미사는 신부님이 혼자서 주관한다. 서고 앉고 서고 앉고를 반복하고 때로는 성경 몇 줄 읽고 찬송가 부르고 강론 듣고 끝난다.

그러나 천리교에서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빛을 이용한 인위적인 분위기 연출이 전혀 없고, 엄숙 진지 경건함도 없었다. 그리고 근행은 혼자서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주관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악기 노래 춤이 있었다. 그리고 신전강화는 한 사람이 독점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이미 처음부터 한마음 한뜻의 조화라는 큰 바탕그림이 그려져 있음을 나중에 오랜 세월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

이길에서는 근행을 생명이라고 한다. 이 말은 결코 근행 자체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근행에 담긴 한마음 한뜻의 정신이 각자 자기가 처한 삶의 현장에 고스란히 녹아들어가서 즐거운 삶으로 이어가라고 하는데 있지 않을까.

월덕수기, 일덕화기, 결합수호, 지탱수호 수기승강, 풍기수호, 절단수호, 인출수호, 남자추형, 여자추형 열 가지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만물을 낳고 만물을 키워가듯이 말이다.

우리 몸으로 이야기 하자면 눈, , , , 양손, 양발, 남녀 제1도구가 서로 세우고 도와서 멋지게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는 것. 인간관계로 말하자면 경험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개성이나 나이가 달라도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부족한 것을 채워서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근행의 정신이 아닌가.

3) 남이라곤 전혀 없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어버이신님의 자녀이고 서로는 형제자매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들이 서로 세우고 서로 돕는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즐겁게 살아가는 것을 바란다. 만물의 어버이, 으뜸인 어버이인 어버이신님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 위하고 서로 세워서 모두 함께 하기를 바라실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혼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 세우고 서로 돕지 않으면 성립할 수가 없다. 상대는 바로 내 존재의 바탕이고 전제조건이다. 같은 혼으로서 높고 낮음이 없고 귀하고 천함도 없다. 서로가 형제이고 남이라곤 전혀 없는 것이다.

남이 아닌데도 남이라고 생각해서 자꾸 배제하려고 드니 문제가 생긴다. 다툼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나고, 모반이 일어난다.

친필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온 세상 사람들은 모두 형제야 남이라곤 전혀 없는 거야 13-43

이 근본을 아는 자는 없으므로 그것이 월일로서는 섭섭할 뿐이야 13-44

높은산에서 살고 있거나 골짜기에서 살고 있거나 같은 혼인 거야 13-45

그리고 차츰차츰 쓰고 있는 도구는 모두 월일의 대물인 거야 13-46

그것을 모르고서 모두 인간마음으로는 어딘가 존비귀천이 있다고 생각해서 13-47

월일은 이 진실을 온 세상에 어떻든 명확히 알리고 싶다 13-48

이것만 명확히 알게 되면 모반의 뿌리는 끊어져 버려 13-49

 

우리가 형제로서 남이 아니고 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누구라도 대화가 가능하고, 무엇이든지 도울 마음을 내게 된다. 상대를 내 삶의 고마운 파트너로 여기지 타파해야 할 그 무엇으로 여기지 않는다. 형제이기 때문에 의견이나 처지나 입장이 달라도 어떻게든 마음을 맞추려 하고, 스스럼없이 도움을 주고 도움 받게 된다. 이것이 없다면 형제라 할 수 없다.

마음과 마음을 맞추는 것이 형제의 길. 그러므로 보살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도움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만은 단단히 단단히. (1902. 7. 20)

4) 모든 수호(즐거운 삶)의 바탕

지도말씀에

한마음 한뜻으로 모두 뭉쳐 준다면 어떤 수호도 한다. (1898. 1. 19)

고 밝히고 있듯이 한마음 한뜻이야말로 어버이신님의 수호를 받는 바탕이다. 한마음 한뜻에 자유자재한 수호가 있고 즐거운 삶이 있다.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자기식대로 제 마음대로 한다면 올바르게 일이 될까. 원하고 바라는 것을 절대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주변 사람이 도와주지 않고 어버이신님도 도와 줄 턱이 없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 이리하지 저리하자 해도 자기 생각 욕심이 가득 차 있으면 아무 것도 안 될 것이다.

자기 식으로 열심히 해서 어버이신님 앞에 가면 뭐라고 하실까. 처음에야 고생이 많았구나하고 위로하시겠지만 다음 말은 왜 너 혼자 왔니, 같이 오지 않고.’ 하지 않으실까. 서로 세우고 서로 도우는 가운데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어버이신님께서도 기뻐하실 테고, 그래서 수호도 듬뿍 내려주시지 않겠는가.

 

 

3. ‘한마음 한뜻이 되기 위한 전제 조건

 

1) 맞춘다

맞추는데 한마음 한뜻이 있고 행복도 있다. 맞추지 않고 제 멋대로 제 마음대로 한다면 반드시 싸움이 있고 분쟁이 있고 분열이 있고 모반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어떻게 맞추어야 하나?

가령, (, 대표)이 되는 어떤 한 사람에게 맞추어주면 한마음 한뜻이 되는가. 교회장에게 맞추고, 회사 사장에게 맞추고, 모임 회장에게 맞추고, 아버지에게 맞추면 한마음 한뜻이 되는가. 거꾸로 심()이 신자에게 맞추고, 사원에게 맞추고, 아이들에게 맞추어야 한마음 한뜻이 되는가.

이렇게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맞춘다고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맞추게 하거나 거꾸로 상대에게 맞추어주는 식으로는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게 아니다.

나한테 맞추라는 것은 내 인연에 끌려오라는 말이고, 상대에게 맞추어주겠다는 것은 상대 인연에 휩쓸려 가는 것이다.

그럼 어디에 맞추라는 말인가.

55부로 서로가 서로에게 맞추라는 거다.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맞추는 거다. 55부씩. 마음 밑바닥에서도 걸림이 없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에게 맞추라는 게다. 한마음 한뜻은 서로 맞추는데 있지, 일방적으로 맞추는 데에 있지 않다.

고성회장님께서는 지난해(175) 1225일 덕일교회 승격봉고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자주 한마음 한뜻이라는 말을 합니다만, 사고방식에 따라 자신의 형편에 좋도록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장의 경우, ‘내가 생각하는 대로 한마음 한뜻으로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협력해 주면 된다.’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즉 자기 입장에서 한마음 한뜻인 것입니다.

 

한마음 한뜻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우리들은 보통 누구든지 자기에게 맞춰오기를 바란다. 하지만 내 식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오면 된다는 식이라면 독재이고 독단이지 아닌가.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반대로 자기주장 없이 남에게 맞추기만 하면 되는가. 이것은 공허하다. 자기가 없는 사람이다. 있을 자리에 있지 못하고, 할 것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서로 맞추라는 것이다. 자기 속에 너무 빠지지도 말고, 남에게 너무 끌려가지도 말고 서로 맞춘다. 한 번은 상대에게 맞춰주고, 또 한 번은 나에게 맞춰달라고 한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라도 그렇게 하고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이것을 거듭 반복하는 가운데 어느새 서로가 서로를 자연스럽게 맞추는 때가 오지 않을까. 억지로 맞추려 하지 않아도 맞추게 되고, 맞춰오라 하지 않아도 맞춰오는 때가 올 것이다.

서로 맞추어야 하는 저 상대는 내가 원한다고 존재하고, 원하지 않는다고 사라져주는 존재가 아니다. 어버이신님께서 인연으로 맺어준 사람들이다. 인연이 다할 때까지 서로 보고 듣고 말하는 가운데 서로 위하고 서로 도와서 행복하라고 맺어준 사람들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맞춘다는 것은 결국 뭇 생명의 근원이신 어버이신님께 맞춘다는 말이 된다. 매 순간마다 어버이신님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 의도하심에 맞추어가는 것, 교조님이었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며 모본에 비추어서 맞추어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맞춤이고, 진정으로 한마음 한뜻을 이루는 본길이다.

이게 쉽지 않다.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내 식대로 확 해버리거나 아니면 그냥 생각없이 남 따라 가버린다. 그러고도 흔쾌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누군가의 마음속에는 불평 불만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한두 번 혹은 서너 번은 내식대로 해 버리거나 남 따라 장에 갈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세상사 모든 갈등이 일어나고, 즐거운 삶은 저 멀리 달아나고, 괴롭고 고달픈 인생이 끝없이 펼쳐진다. ‘산다고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렇노?’ ‘신앙을 해도 소용이 없어, 왜 이 모양 이 꼴이고하는 소리가 절로 절로 터져 나온다.

그래서 맞추라는 거다. 맞추되 나에게 맞추는 것도 아니고, 너에게 맞추는 것도 아니다. 나 아닌 것도 아니고, 너 아닌 것도 아니다. 너이면서 나다. 동시성이다. 너와 나를 인연으로 맺어주신 어버이신님의 의도를 알고, 교조님 모본 따라 맞추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맞추어야 할 중심은 바로 여기다.

나에게 맞추라는 것은 너의 상실이면서 내 욕심이고, 너에게 맞추어오라는 것은 나의 상실이면서 너의 욕심이다. 어버이신님 교조님에 맞춘다는 것은 너를 존중한다는 말이고, 내 욕심을 비운다는 말이며, 너와 내가 함께 행복해진다는 말이다.

 

서로 맞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화와 의논이 필요하다. 힘 권위 기득권에 의지해서 일방적인 지시나 명령 통보를 하는 식이라면 한마음 한뜻이 될 수가 없다. 한마음 한뜻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대화와 의논으로 소통을 해야 하고, 납득하고 납득시키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다음호에 계속)

 

*지난 319일에 있었던 제56회 기초교리강좌를 정리해서 싣습니다. 많은 도움 되셨으면 합니다.(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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