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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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년03월]구제의 시작 - 이호열

2013.03.08 20:20

편집실 조회 수:1949

2월 부인회 신전강화

구제의 시작

 

이호열(성천교회장)

 

날씨도 그동안 포근했는데 오늘 좀 쌀쌀해졌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렇게 오셔서 근행을 올려주시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셔서 경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

 

구제활동은 작은 것에서부터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지난달에는 교회본부에서 춘계대제를 올렸습니다. 춘계대제는 교조님께서 은신하신 날을 기리면서 올리고 있습니다. 교조님께서는 자녀 귀여운 어버이마음에서 자녀의 성인을 고대하시며 정명을 25년 줄이면서 은신을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잘 생각해보면, 어버이신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교조님을 월일의 현신으로 삼으신 이유와도 같습니다. 어버이신님께서는 자녀들을 구제하고 인간을 창조한 근본을 밝혀주시기 위해서 교조님을 월일의 현신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게 따져보면 우리 인간은 당연하게 즐거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사람들의 삶이란 참으로 온갖 고난과 역경, 희노애락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교어로 다시 표현하면 신상과 사정으로서 고생을 한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즐거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라고 어버이신님께서 말씀을 하셨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어버이신님께서 마음에 자유를 주신 이유로 오랜 세월 제멋대로 마음 쓰기를 했기 때문에 빌려주신 대물에 신상과 사정을 만난다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 길은 인간 본연의 삶으로 살기 위한 깨우침의 길입니다. 인간 본연의 삶이란 먼저 말씀드린 것처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즐거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어버이의 창조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희노애락의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의 본질로 따지면 우리는 즐겁게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용재들의 사명입니다. 이 길에서는 남을 구제하면 내 몸 구제받는다.’라고 합니다. 남을 구제하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조건은 정성입니다.

지도말씀에

정성처럼 강한 것은 없다. 정성은 하늘의 리이다. 정성만 있으면 세상에서는 참으로 훌륭하다고 한다. (1888. 6. 2)

정성은 변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항상 정성스런 마음을 지니면 집안이 화목해지는 수호가 나타나고 세상에서도 참으로 과연 그렇구나, 훌륭한 사람이구나하는 리가 나타납니다. ‘과연 그렇구나하는 리를 받아들이는 거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구제하는 마음은 우선 남을 배려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라고 <유달 제3>에서 진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해서 구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뜻대로 안 되는 냉정한 면이 많습니다. 하고자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이어지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참 냉혹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어려운 현실이라도 남을 돕고 세워주고 구제하는 마음에서 수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나날이 항상 실천하는 것, 변함없이 하는 것 그리고 지금 당장 하는 것 나날이 항상 씨앗을 뿌리는 가운데서 싹이 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용재들은 나날이 실천해야 하다는 것이 사명이라는 것을 잘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데 머뭇거립니다. 용재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분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고 들어보면 너무나 큰 뜻, 큰 목표, 큰 구제를 꿈꾸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앞으로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현재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든지,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 등을 돕는 것과 같은 일들이 곧 구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구제활동을 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바꿔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지난 대교회 춘계대제 때 유달강습회에서 강사선생이 구제는 지금 각자 각자의 입장, 위치에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 지금 실천할 수 활동이 구제다.“라고 했습니다.

하루의 날은 평생이라고 깨우친 리, 무리한 일을 하면 생애를 하루로 줄이는 거야. 그래서 처음은 작은 것에서, 작은 것에서 시작하면 아무래도 이리하자, 이리하자 하며, 저절로 되어가는 것이 정성이야. (1889. 2. 15)

라고 했습니다. 구제활동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하는 것이 구제의 시작입니다. 특히,

한마디의 말씀은 히노끼싱

가르침만이라도 전하여 두자 (신악가:7-1)

라고 하셨습니다.

남에게 진실한 말을 전하는 것이 정성이며 히노끼싱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구제의 첫걸음입니다.

모두 오는 자에게 부드러운 말씨를 써 다오, 써 다오. 말은 이 길의 거름, 말의 단노는 이 길의 거름, 거름. (1901. 6. 14)

라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말씨는 재앙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 말씨는 남을 구원하는 동아줄이 되기도 합니다. 말씨는 각자 각자 마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 ‘은 흔적 없이 모양도 없이 형체를 만드는 것이 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로서 주변에 계신 분들에게 밥 뭇나?”, “잘 잤나?”, “요즘 어떻노?” 하는 것과 같은 가벼운 인사말을 건네는 것이 구제의 첫걸음, 교조모본을 실천하는 첫걸음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구제활동이라는 것이 굉장히 쉽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일단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안녕하십니까?”라고 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라는 겁니다.

물론, 먼 길을 걷거나, 단식을 하고 냉수욕을 하는 것도 굉장히 고결하고 숭고한 실천정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앙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앞에 얘기한 할 수 있는 쉬운 것부터 하지 않으면서 그런 어려운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요즘 TV 같은 매체를 보면, 물질적인 풍요, 지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가깝게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가족 간의 유대의 끈이 끊어져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작지만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고 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먹는 것도 중요하고, 입는 것도 중요하고, 높은 지위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다른 어떤 것도 우선이 될 수는 없습니다. 혼자서 무인도에 가서 먹을 것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좋은 것 가져다 놓고 살면 재미있겠습니까? 하루 이틀이야 재미있겠죠. 저도 한 달 정도는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헌데, 사람 냄새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본부 춘계대제에서 진주님께서 하신 신전강화 중에

자아 자아 월일이 있어서 이 세계가 있고 세계가 있어서 온갖 것이 있다. 온갖 것이 있어서 인간이 있고 인간이 있어서 율이 있다. 율이 있어도 마음작정이 제일이야. (지도말씀:1887. 1. 13)

사물의 옳고 그름에 순서를 세우기 전에 먼저 근행을 신한줄기의 마음으로 한마음 한뜻으로 올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마음 한뜻이란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각자 각자의 역할을 확실하게 완수함과 동시에 전체의 조화를 유지하는 공덕이다.

부부사이에서 상대에게 니 왜? 내 마음하고 안 같노?”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부부라면 온전한 가정을 꾸미자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함께 각자 각자의 나름의 노력을 하는 것이 한마음 한뜻이지 너와 내 마음이 똑같아야 한마음 한뜻이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같은 목적을 향하여 그것에 관여하는 사람 전원이 그 목적을 인식하고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스스로의 역할을 마음에 새기고 완수함과 동시에 서로 서로의 관계를 인식해서 연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봤을 때 우리의 목표는 구제를 통하여 그 사람도 함께 구제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즐거운 삶의 세계를 이룩하는 것이 우리 이 길을 신앙하는 사람들의 공통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다시 시작을 해야 합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씨앗을 뿌리고 조금 눈높이를 낮춰서 다시 시작하면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고성교회에서는 교회장님께서 교회목표로서 세운 교회내용 충실을 실현하기 위해 온 가족이 함께 참배하기’, ‘근행과 수훈에 정성을 다하기’, ‘전도 구제에 최선을 다하기로 활동방침을 정하셨습니다. 이것을 수년 전부터 해 오고 있습니다. 올해도 별도로 발표는 안 했지만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활동은 용재가 당연히 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너무나 안 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만가지 구제의 토대는 오로지 근행

고성 초대회장님께서는 오직 근행뿐이야라는 신념으로서 구제한줄기의 활동을 하셨습니다. 이 길에 있어서 수호를 받을 수 있는 기원은 어디에 있느냐 라고 생각해 봤을 때 그것은 오직 근행뿐입니다. 그것은 교조님의 말씀들에 근행을 통해서만 구제받을 수 있다.’라고 확실하게 나와 있습니다. 근행을 통해서만 우리가 원하는 완벽하고 온전한 수호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내 몸을 희생해서 실천을 많이 한다고 해서 수호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실천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근행이 최우선입니다. 근행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교조님께서 은신하셨던 것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면, 교조님께서 은신하셨던 가장 큰 이유는 근행의 완성이였습니다. 오직 근행을 통해서만 귀여운 자녀들의 구제로 이어지기 때문에 근행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교조님께서 은신하셨던 이유는 그냥 정명을 25년 줄여서 은신하신 것이 아니라, 정말 귀여운 내 자녀들이 구제를 받았으면 좋겠다. 그 구제를 받기 위해서는 근행 밖에 없는데 인간의 형상을 하신 교조님의 몸이 보이면 경찰들이 자꾸 잡혀 간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근행을 안 봐서 구제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몸을 감추신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인 것을 외면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기성종교나 국가 단체에서 복지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과 이 길의 구제활동을 비교해 보면 왜소하고 참담하다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부유한 나라라도 복지정책만 가지고는 모든 국민이 즐겁고 기쁘게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즐겁고 기쁘게 살 수 있는 길은 누구도 대신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런 정책 없어도 누구나 다 서로 돌보고 함께 즐겁게 살 수 있는데 그런 마음이 없이 정책적인 제도를 통해서 그런 것들을 하려고 하니까 거기서 또 처지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이런 것들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제활동을 위해서는 월차제, 조석근행에 참석하지 않고 수호를 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처음 입신을 해서 신앙을 했던 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근행에 참여를 해야 됩니다. 정성스럽게 올린 근행을 통해서 성숙한 마음을 만들 수 있고 어버이신님께서 바라시는 마음성인을 이룩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교회장으로서 만 5년을 지나오고 있습니다. 굉장히 짧은 기간입니다만 한 가지 마음작정한 것은 근행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정성스럽게 올리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다른 실천은 상당히 부족합니다. 하지만, 근행을 통한 기원만으로도 신님께서 제게 할 일을 가져다주십니다. 그것만 해도 아직까지 인간으로서 제 역할을 어느 정도 다할 수가 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제는 작은 것에서부터 실천하고 특히 근행에 철저히 해서 근행을 통해서 기본적인 신앙의 본질을 키워나가야 됩니다.

여러 가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고성교회장님께서도 여러 번 언급을 하셨듯이 고성교회라는 전체를 살펴보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기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본인 근행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밖에는 다른 제도나 종교들과 경쟁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돈이 많아서 기성종교와 복지 경쟁을 하겠습니까? 사람이 많아서 사람 숫자로 하겠습니까? 가장 기본적인 것, 사람으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마음으로써 서로와 소통하고 구원할 수 있는 활동들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며칠 안 남은 설 명절 가족들과 함께 즐겁고 풍요롭게 보내실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것으로 간단하게나마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4) (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