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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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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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초대회장님 17

 

하늘신

김복련(창녕초대교회장) 구술

남상우 기록

 

내가 시집을 갔었을 때, 그때 막 초대회장님이 일본에서 나오셨다. 초대회장님은 일본에서 나오셔서 처음은 마산에서 자리를 잡으셨다.

그 당시 술을 마산에서 고성으로 넘기는 중간 상인 일을 하셨다. 그 당시에는 소주독을 큰 사기(沙器)로 만들었다. 그런 큰 사기독을 몇 개씩 싣고 가서는 고성 소매업자에게 넘기는 사업을 하셨다.

그러나 그때는 초대회장님이 그런 일을 하시는 줄은 나는 몰랐는데, 하여튼 일 때 문에 고성을 자주 오시는 줄은 알고 있었다.

그때 큰동서가 동서야 그렇게 자꾸 아픈데(나는 산후병인줄 알았는데 원남성 초대교회장은 진풍(일종의 문둥이병)이라 했다). 외갓집 아주버님께서 집에 하늘신(어버이신님을 이렇게 불렀다)을 모셔 놓았다는데, 그곳에 가서 빌고 그곳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하면 틀림없이 낫는다는데 한번 가보지.”했다.

그때는 하늘신을 모셔 놓은 곳이 천리교인 줄도 몰랐고, 아주버님이 그런 것을 하는 줄도 몰랐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한편 솔깃했다. 하지만 시집이 되어서 그런지 그럼 형님, 어디로 가면 되요?” 하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78일이 시어머니(초대회장님에게는 고모가 된다) 제사인데, 귀국 후 첫 고모 제사라고 초대회장님께서 오셨다.

큰 동서가, “동서야, 우리 아주버님에게 가서 보이고 물어보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초대회장님을 만났다.

그때는 풍채가 그렇게 좋지는 않으셨다. 2대교회장처럼 가무잡잡하면서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야윈 편이었다. 인사만 하고 시숙이라도 부끄러워서 바로 쳐다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아무리 친척간이라 하더라도 남자와 여자는 구별이 있을 때였다.

인사를 하고 바로 돌아앉아 있는 초대회장님을 슬쩍 쳐다보았는데, 뒷모습이 꼭 중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도대체 어느 절에 계시다가 왔을까?’ 하고 궁금히 여기던 차에 아주버님, 동서가 이렇게 오래 전부터....”하고 큰동서가 물었다.

내가 아프다고 하니까 첫말씀이 천리교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안하고 그냥 오보소, 오보소.”라는 말씀만 하셨다. 그래서 말도 어쩌면 저렇게 재미없이 말할꼬하며 그날은 그렇게 돌아왔다.

몇 달이 지났을까, 남편이 외출을 했다가 돌아와서는 다짜고짜 외갓집 형님이 오라카더라며 가자고 했다. 그날따라 굉장히 추웠다. 내 병은 보통의 날도 한기가 드는데, 도저히 추워서 오늘은 안 되겠습니다.” 했더니, 이불로 내 몸을 포대기로 아기 감싸듯이 해서 자전거 뒤에 앉혔다.

그렇게 해서 초대회장님 앞으로 갔다. 초대회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더러운 곳을 자꾸 쓸면 깨끗해지듯이 절을 많이 하면 좋아진다.”고 하셨다. 그 전에 절에서도 스님이 절을 많이 하라고 시켰는데, 여기서도 절을 많이 하라는구나 싶었다.

전에 다니던 절()을 생각하니까 이곳이 너무 한심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절조차 하기 싫었다. 그래도 남들도 저렇게 절을 하는데, 나혼자 절을 안 해서 되겠나 싶어, 속으로는 하기 싫은데도 할 수 없이 같이 절을 했다.

앉아서 참배를 하고 근행을 보는데, 나는 그때까지도 선생님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뒷모습이 마치 중 같은 영감(?)악한 것을 제거하고...” 하면서 박자목을 치고, 구선생이 수를 잡고,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머리를 길다랗게 땋고 앉은 본성교회 문성자(문순이) 선생이 제금을 치고 있었다. 그때 신자라고 해본들 변산댁과 문성자, 구선생, 충무교회 내외분과 충무교회장의 친척이 되는 떡집 아주머니 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아저씨가 할 짓이 저렇게 없을까. 무슨 저런 짓을 할꼬?’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당시는 참말로 서글펐다.

세가지 실천

 

1956년 정월 초엿샛날.

그때는 초대회장님을 이선생님이라 불렀는데, 이날은 회장님이 오신다고 했다. 교회장님이 오신다고 방을 치우고 문종이를 바르고 그릇을 씻고 대청소를 하는 것이었다. 교회장님이 오신다고 초대회장님은 지극정성이었다.

교회장님이 오시기 하루 전날 히노끼싱을 하러 갔다. 신자들이 그렇게 해야 내 액운을 닦을 수 있다고 해서 시키는 대로 했다.

초대회장님께서도 저 사람이 끝까지 잘 다니겠나 싶어 그랬는지, 일절 말을 안 해주셨다. 하시는 말씀이라고 해본들, “아무리 더러워도 부지런히 닦으면 깨끗해지니까 부지런히 닦아라.” 라는 말씀만 하셨다. “닦다가 안 되면 포기하지 말고 또 비누를 묻혀서 부지런히 닦으면 깨끗해진다.”라고 하시면서 부지런히 다니면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때 내 모습이 하도 답답했는지, 변산댁(도천교회장 장모님)이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다. 근행에 대해서도

어버이신님께서 밤에 편안하게 자는 동안에도 우리들이 호흡을 내쉬고 들이쉬고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은혜하는 마음으로 아침근행을 보고, 하루 종일 무슨 일을 하더라도 돌아다닐 수 있도록 우리들을 살려주시는 감사함을 은혜하는 마음으로 저녁근행을 본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 입신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열병에 걸려 머리카락이 다 빠질 정도로 석 달을 고생을 했는데, 여러 가지 치료를 해 보아도 낫지를 않아서 초대회장님에게 갔는데, 인연을 풀어서 알려주시더라고 했다.

그래서 인연을 알고 실천을 해서 나았다고 했다. 지금 당장은 이야기를 안 해줘도 당신은 남이 아니고 제수니까, 조심스러워서 인연이야기를 빨리 안 해주신다고 했다. 언젠가는 다니다 보면 알려줄 것이라고 했다.

월차제날, 교회장님(원남성 초대교회장)이라고 하시는 사람이 왔는데, 한쪽 눈이 이상했으며그때만 해도 다 낫지 않아서발가락에는 진물이 흘러서, 흰 양말을 신었는데, 양말에 진물이 배어 나와 파리가 붙어 있었다. 밥을 드는데 손 한쪽이 이상해서 가만히 보니까 문둥이였다.

초대회장님께서는 나를 얼마 전에 신상 때문에 입신한 초신자라고 원남성 초대교회장에게 인사를 시켰다. 인사를 하면서도, 무슨 대단한 사람이 오는 줄 알고 청소도 열심히 하고 준비를 했는데, 이런 문둥이를 데려다 놓고 인사를 하라고 하나 싶어 무척이나 서글펐다.(나는 그때까지도 내 병이 산후병을 오래 두어 악성피부염이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원남성 초대교회장은 내가 비참해질 정도로 말을 사정없이 했다. 그때만 해도 지금하고는 달리 남녀가 내외(외간 남녀 간에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고 피하는 일)할 때였다.

원남성 초대교회장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나를 보더니 밑도 끝도 없이 세 가지만 실천하면 되겠구만하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일어났다.

처음 보는 남자를 돌려세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회장님이라는 분이 세 가지만 실천하면 낫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밤에 잠도 안 오고, 낮은 낮대로 신경이 쓰여서 일이 손에 안 잡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할 수 없어 초대회장님을 찾아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 부엌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부엌 안을 쳐다보았다. 가마솥에서 나는 소리였다. 무엇인가 싶어 솥뚜껑을 열어 보았다. 뚝배기에 쌀 한 톨이 들어 있지 않은 시꺼먼 꽁보리밥이 놓여 있었다.

멸치도 하나 넣지 않은 된장을 까만 뚝배기에 넣어 보리밥 옆에 나란히 놓아두었는데, 물이 끓으면서 그것이 가마솥에서 부딪쳐서 나는 소리였던 것이다.

급한 김에 그것을 들어 내려놓는데 초대사모님이 부엌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것을 함께 상에 차리면서 물었다.

형님, 나보고 회장님이라는 분이 세 가지를 실천하면 내 병이 낫는다고 하는데, 그 세 가지가 도대체 뭔지, 또 어떻게 하면 되는지 모르겠는데, 그걸 빨리 알려주시면 좋겠어요.”

그래, 동서나 나나 무슨 말인지는 모르기는 매마찬가지니 이것 들고 들어가서 한번 물어보자.”

그래서 밥상을 들고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초대회장님께서는 누워계셨다. 초대사모님께서 일어나 앉아보소. 동서가 왔십니더했는데도 나를 쳐다도 안 보고 돌아서 앉으셨다.

그 당시에는 내가 신앙이 없었을 때라 그것이 무척이나 섧었다. 내가 온 이유라도 아는 듯이 그냥 밥이나 잡소하고는 자기 밥그릇의 뚜껑에다 밥을 한 덩어리를 놓더니, 거기다가 된장을 한 숟가락 떠 담아 나에게 주면서 잡숴보소. 천리교는 밥을 잘 무면 도움을 보요. 밥이 약이요.” 하셨다.

그 말을 그대로 믿고는 그것이 약이라 생각하고 주는 것을 다 먹었다. 맛이 있었다. 밥을 먹고서야 생각이 나서 초대회장님에게

아이고, 큰일났습니더. 내가 깜박하고 밥을 먹었네요. 안 먹고서 체증을 내리러 가야 하는데.”

체증 내리러 댕기요.”

, 체증 내리러 댕깁니더.”

몇 년 됐소?”

오래 댔습니더.”

그때서야 히뜩 돌아보시더니,

천리교 선생 시키는 대로 한번 해보소. 내 죽네 하고 한번 이겨내 보소. 천리교는 밥이 약이요. 도움 받을끼다.”하셨다.

오랫동안 소화장애로 괴로웠는데, 한 사나흘 동안에 어디로 갔는지 감쪽같이 사라졌다. 천신님이 있다고는 100퍼센트는 안 믿었지만, 내 속이 시원해지니까 60퍼센트는 믿을 수가 있게 되었다. 혼자말로 아침 저녁 매일 쳐다보면서 절을 하는 저 속에 진짜 뭔가 있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 세 가지를 실천하면 동서가 낫는다고 했다는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동서가 도저히 모르겠다는데, 그걸 알려주시면 안 됩니꺼? 동서가 그것이 궁금해 알고 싶다요.”하며 초대사모님이 먼저 초대회장님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초대회장님이 한 번 더 히뜩 쳐다보시면서

말하면 부족 안 살긴가. 바로 들을긴가.”

라는 해놓고는 외면을 하셨다. 나도 모르게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부엌에 나와서 울고는 얼굴을 씻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좀 안다고 잘난 척하는 건가, 내가 모른다고 괄시하는 건가 싶어서 감정이 격해졌던 것이다.

제가예, 없는 돈을 갖다놔라 하면 왜 없는 돈을 갖다놔라 하나 그렇게 생각 안 하고예, ‘못해서 죄송합니다그렇게 할께예. 그러니까 그대로 말씀 해주소.”

그때서야 돌아서 앉으셨다.

어떤 말로 해도 듣고 삭일거요?”

그 말을 듣자, 왠지 빨리 대답이 안 나왔다. ‘설마 남을 도우려고 하는 사람이 죽을 짓을 시키겠나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 . 제가 듣고 삭이겠습니더.”

대답은 참 좋다.”하시면서

“‘바치고, 버리고, 죽이고그렇게 세 가지요.”

그 말씀을 듣고 , 알겠습니다.” 하고서는 돌아 나왔다. 교회에서 집에까지 걸어 오는 내내 바치고, 버리고, 죽이고, 바치고, 버리고, 죽이고.”를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면서 집에 거의 다 이르렀을 무렵이다. ‘내 남은 여생을 바치고, 내가 가지지 못할 것은 버리고, 가족들을 마음속에서 다 죽여버려라.’는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집에 돌아와서는 , 천신님 맞습니다. 봉사가 아닌 성한 눈을 갖고도 어디 있노 어디 있노 하는 식으로 내가 안 살았습니까? 이 시간부터는 그렇게 살겠습니다.’하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그 다음날 처음으로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근행을 보러 갔다. 교회에서 냉수욕도 했다. 그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추워서 새벽에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어 했다. 그런데 냉수욕까지 하려는 나를 스스로가 생각해도 대견스러웠다.

아침근행을 마친 후, 초대회장님을 찾아가

우선 삼년천일 근행을 변함없이 보아야겠습니더. 그리고 어제 하신 말씀을 듣고 집에 가다가 생각하니까 내가 무릎을 딱 칠 정도로 깨달았습니더, 혹시 내 남은 여생을 바치고, 내가 가지지 못할 것은 버리고, 가족들을 마음속에서 다 죽여버리라는 뜻이 아닙니꺼?” 하는 말씀을 드렸다.

그 말을 듣고 초대회장님께서 하시는 첫마디가 시댁에서는 제수씨고 시숙 사이니까, 그 예의는 지킵시다. 그러나 신앙에서는 당신 생명을 다시 살려준 은인이고, 당신은 나의 지도를 받아서 살아난 신자이니까, 나는 당신을 제자라 생각하고 당신은 나를 선생으로 생각하시요. 지금부터는 부담 없이 이야기를 할 테니 잘 따라와 주시오.”하셨다.

그 당시 교회는 옛날 집이 되어서 방이 아주 작았는데, 방 다섯 개를 다 합쳐도 요즈음의 큰방 하나 크기도 안 되었다. 그리고 집은 또 얼마나 작았던지, 내가 방에 들어가려고 하면 천장에 머리가 닿아서 기어서 들어갈 정도였다.

방은 큰방, 작은방, 부엌 등이 있었고, 아래채도 있었지만 집이 워낙 작았다. 작은방에 초대회장님이 주무시고, 큰방에 산자들이 잤다.

그러던 것을 1957, 작은방하고 부엌을 터서 크게 늘리고, 부엌은 안쪽으로 옮겼다. 그때 역사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역사한다고 지금 같으면 돈을 들고 온건데, 그때는 다들 생필품을된장, 간장, 쌀 등을가져왔다. (다음호에 계속)

 

 

 

* 작년 입교175년은 고성교회가 포교 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5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책 오직 근행뿐이야를 조금씩 나눠 싣고 있습니다. 이영수 초대 회장님을 그리며 으뜸하루를 되새겨서 한 걸음 더 성인하기를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