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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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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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40

 

터전에서 받은 보물

 

박지수

 

416움틈근행이 올려진다는 소식을 듣고 터전으로 달려갔다. 움틈근행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무척이나 설레이는 일이었다. 제지를 무릅쓰고 무릎을 세워 월차제때 신악근행을 살짝 구경을 한 적은 여러 번 있지만 순산근행이나 움틈근행은 얘기만 들었을 뿐이었다.

비행기 시간이 올해에는 30분 늦어져서 움틈근행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시작 직전에 남예배장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신전에는 많은 참배객들이 있었다. 그래도 비집고 앞으로 들어가 자릴 잡았다. 움틈근행, 얼마나 궁금하고 보고 싶었던가.

근행의 지가인 신악가 1절의 내용이 달랐다. “부디 확실히 움트도록(싹트도록) 도와주소서하고는 세 번 연달아 나무 천리왕님을 불렀다. 월차제때는 장엄한데 비해서 움틈근행에서는 그 음조와 가락이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롭고, 감동적이며, 아름다웠다.

둘째 날, 교조전 뒤쪽에 있는 기념건물을 견학했다. 기념건물은 휴식소와 최초 근행장소, 중남의 문간채, 곳간이었는데 100년도 넘은 건물이지만 잘 보존되어 있었다. 15년 전 검정강습 전기(지금의 교인강습회) 때 견학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물인지 별로 관심이 없었던 탓에 중남의 문간채와 휴식소, 최초 근행장소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 후 평소에 교조전과 일화편을 자주 보다가 그 건물들이 궁금하고 그곳에서 교조님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일화편과 교조전에서 잠시 이 건물들에 대해서 살펴보면

<일화편> ‘128 교조님의 거실

교조님께서는 1883년까지 중남의 문간채 서쪽, 즉 들어가자면 왼편에 있는 다다미 열 장 방에서 기거하고 계셨다. 그 방에는 창문 쪽으로 다다미 석 장 정도 크기의 단이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앉아 계셨던 것이다. 그 단은 두 자 다섯 치 정도의 높이로서, 아래는 벽장처럼 되어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면, 거기서 과자 등을 꺼내어 아이들에게 주시곤 했다.

1883년 이후부터는 휴식소에서 거처하셨다. 그곳은 다다미 넉 장과 여덟 장의 두 칸으로 되어 있었는데, 넉 장 방 쪽이 한 단 높게 되어 있었다. 교조님께서는 그 넉 장 방에서 기거하셨다. 휴식소가 세워졌을 당시, 사람들은 커다란 거실을 갖게 된 즐거움을 서로 나누었다 한다.

고본 천리교 교조전(p169)에서는

휴식소 준공 그해 가을, 역사 중이던 휴식소는 내부공사가 완성되었다. 18자에 24자인 건물로서 4, 8첩 방 두 칸이었다.

교조님께서는 1125, 즉 음력 1026일 밤에 어버이신님의 말씀에 따라 각한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중남의 문간채에서 새로 지은 휴식소로 옮기셨다.

그날 해질 무렵, 교조님께서는 저녁을 잡수시고 의복을 갈아입은 다음, 조용히 각한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셨다. 그때 전갈인이 준비가 다되었습니다.”라고 알리러 왔다. 마당에는 벌써 교조님을 모시려는 사람들이 등을 밝히고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러나 교조님께서는

그래, 준비가 다됐느냐. 그럼 각한이 오면 옮기도록 하자.”

라고 말씀하실 뿐, 그대로 가만히 자리에 앉아 계셨다.

준비는 다되었다. 사람들은 이제나저제나 하고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조님께서는 오로지 각한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인간 마음으로는 지금 당장 옮겨 주시면 일이 일찍 끝날 텐데.’ 하고 생각하겠지만, 어버이신님의 의도 앞에서는 다른 어떤 일도 돌아보지 않는 교조님이셨다. 그러한 교조님의 태도에서 월일의 현신으로서의 면모를 역력히 엿볼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몇 시간이 지났다. 이윽고 교조님께서

자아, 각한이 왔다. 옮기도록 하자. 다마에야 오너라.”

라고, 손녀 다마에에게 말씀하신 것은 한밤중이었다. 지나가실 길 양쪽에는 신자들이 각각 신메이조, 메이신조 등 여러 강명이 적힌 등불을 켜 들고 마당 가득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를 그해 86세의 교조님께서 일곱 살 난 손녀 다마에의 손을 잡고, 다마에의 다른 한 손은 외손인 가지모토 히사가 잡고, 양쪽 등불 빛을 받으면서 조용조용히 앞으로 나아가시자, 줄지어섰던 사람들 사이에서 배례의 박수 소리가 일어나고, 그 소리는 교조님께서 걸음을 옮기심에 따라 차례차례로 옮아갔다. 훗날 다마에는 그 당시에는 영문을 모르면서 할머니 손에 이끌려 따라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짧은 거리지만, 그날 밤은 상당히 긴 것 같이 느껴졌다.”라고 술회했다.

이윽고 휴식소에 도착한 교조님께서는 조용히 상단 방에 앉으셨다. 그리고는 신노스케와 다마에에게

이리 와, 여기 앉아 봐.”

하며, 그들을 좌우에 앉히셨다.

그로부터 인사가 시작되었다. 일일이 장지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이번에는 신메이조입니다.” “이번에는 메이신조입니다.”라는 전갈인의 소개에 따라 사람들은 차례차례로 인사를 올렸다. 그런 일이 얼마나 계속되었던지, 그날 밤은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말았다. 사람들의 정성이 깃든 휴식소에, 각한을 기다려 비로소 듭신 교조님을 뵙자, 사람들의 마음은 서리가 내리는 추운 밤인데도 불구하고 밝은 감격으로 불타올랐다.

우메따니 시로베에선생이 몰래 집터를 나가려다 교조님의 기침 소리를 들었던 문간채, 본석님이 오야마토신사 마디를 겪으면서 어렵게 이룩한 최초의 근행장소, 그리고 위에서 인용한 교조전에 나오는 휴식소.

원래 그 건물이 있었던 장소는 지금의 감로대가 서 있는 바로 주변이었지만 지금은교조전 뒤쪽으로 건물만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래도 여기서 교조님이, 여기서 본석님이, 여기서 선배선생님들께서...’ 상상하면서 가만히 교조님과 선배선생님들을 느껴본다. 몸이 떨릴 정도로 감동이 밀려왔다. 지금도 교조님께서 존명으로 우리를 보고 계시면서 기뻐하고 계실 거 같다. 이곳은 조용하여 교조님의 숨결을 느끼기에 참 좋은 장소다. 터전귀참을 할 때마다 이곳에 와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셋째날은 418일 교조탄생제날. 탄생제 근행 후 신전강화를 들었다. 인상적으로 들었던 내용은 구제활동을 하는 용재에겐 항상 교조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이야기로 강화담당 선생님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셨다. 포교하는 용재에게는 교조님께서 언제나 함께 해 주신다는 체험담을 두 가지 이야기를 주셨다. 기억나는 대로 옮기자면

[교조 90년제를 앞두고 교회 본부에서 청년들 10명씩 한 달 동안 포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포교지역에서 호별방문을 하던 중의 일인데 다섯 집을 거절당하고 여섯 번째 집에 갔을 때 60대 중반의 아저씨가 나오셨습니다. “천리교에서 나왔습니다만.” “나는 천리교를 잘 알고 있네.” “어느 교회 소속이십니까?” “신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 내가 자네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걸. 실은 나는 나라현 출신이라네. 우리 할아버지가 순사를 하셨지. 그 때 나까야마 미키라는 할머니가 자주 끌려왔다더군. 그런데 그 할머니는 감옥에 와선 단식을 했다고 하네. 길게는 보름씩 잡혀 있는 동안 단식을 해서 그런 연세에도 잘도 버틴다고 생각하셨다네. 이제 힘이 많이 약해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가시오라는 말을 들으면 청년처럼 벌떡 일어나 힘차게 걸어 나가셨다고 해. 할아버지는 정말 신기한 할머니라고 말씀하셨지. 나는 그것을 듣고 천리교가 지금처럼 번창한 것은 그 할머니의 노고 덕이라고 생각하네. 자네는 그것을 알고 있는가? 그러니 더욱 힘을 내 주게.”

뜻하지 않은 곳에서 교조님의 이야기를 듣고 정말 교조님께서 먼저 와서 활동해 주시는 구나.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교조 100년제를 앞둔 1980년 경 오사카의 포교의 집에서 매일 전도포교를 할 때 경험이었습니다. 어느 날 본부의 월차제에 참배하려고 주우산또게를 넘어가려고 나미마쯔마을의 상점가를 지나다가 도자기 가게 앞에서 어느 부인을 만났습니다. 그 부인은 천리고등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분으로 도자기 가게의 주인이었습니다. “차 한 잔 드시고 가라권해서 들어가 차를 대접받던 중 이것 좀 보세요. 저희 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고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교조님의 직필로 쓰여진 친필 호외였습니다. 교조님께서 야마무라 고뗑의 노고를 겪으신 다음날 몇 몇 분에서 친필 호외를 직접 써서 나눠 주신 적이 있는데, 도자기 가게에도 내려주신 것이었습니다.

나날이 마음 다하여 뿌린 씨앗은 신이 확실히 받아들이고 있다

진실로 신이 받아들이는 씨앗은 언제까지라도 썩지 않는다

차츰차츰 뿌려진 이 씨앗이 싹트게 되면 이것이 영원한 고오끼인 거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교조님께서 직접 쓰신 친필 호외를 보는 놀라움과

감격, 그리고 그 내용은 그 때 저를 향해 들려주는 말씀 같았습니다.

이 두 가지 경험으로 저는 확실히 포교하는 사람 곁에서 교조님께서 항상 함께 해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신전강화를 들으면서 교조님께서 우리 용재들 곁에서 항상 함께 해주시는구나하는 확신이 내게도 조금씩 전달되는 게 느껴졌다.

 

오후엔 미리 신청하였던 기초강좌를 들으러 갔다. 기초강좌는 3번째로 듣는다. 예전에도 들었던 내용과 비디오였지만 새로웠다. 그리고 그때 듣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교조님께서 존명으로 활동해주신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이야기들이었다. 강사님께서 수훈의 리를 배대받은 날이 언제냐는 질문을 하셨는데 생각이 순식간에 과거로 휙 날아간다. 언제였던가?

수훈의 리는 아홉 번의 별석을 거친 뒤 10번째 달에 받는다. 이 의미는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10개월의 임신기간을 지나 탄생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게 수훈의 리를 배대받은 날은 용재로서 새롭게 태어난 날이다. 자신이 탄생한 생일도 중요하지만 제2의 생일인 수훈의 리를 받은 날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구제를 위해 다시 태어난 그날을 꼭 기억하라. 용재로서 자각을 잊지 마라.”고 강조하신다.

내가 용재로 태어났던 그 날, 그 생일날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는다. 별석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래의 친필

앞으로는 길에 비유해서 말한다 누구 일이라고 새삼 말하지 않아 1-46

산언덕 가시밭 낭떠러지 비탈길도 칼날 같은 험한 길도 헤쳐 나가면 1-47

아직도 보이는 불속 깊은 물속을 그것을 지나가면 좁은 길이 보이느니 1-48

좁은 길을 차츰차츰 넘어가면 큰길이야 이것이 확실한 본길이니라 1-49

이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닌 만큼 신한줄기로서 이것은 자신의 일이야 1-50

의 내용이 나오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듣곤 하였다. 왜 눈물이 줄줄 흐르는지 잘 몰랐지만 3석부터 9석까지 울면서 별석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마침 그 내용을 듣는 시간은 교조님 은신 시간인 2시 무렵이어서 터전 어디서든 들리는, 가슴을 파고드는 팔수 한 소절을 들으며 눈물을 훔치곤 했던 기억이 어제인 듯 떠오른다.

교조님께서 우리들 용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다시 받고, 용재로 태어난 제2의 생일을 기억하며 하루를 보냈다. 저녁 근행이 끝나고 모두들 돌아간 뒤 신전에 남아 기원을 드린다. 그리고 회랑을 따라 한 바퀴 돌다가 교조전에 들렀다. 교조님께 하소연도 하고 기원도 드린다. 다시 신전으로 가서 기원을 드리고 이젠 숙소로 돌아가야지 생각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다시 교조전으로 가는데 수훈의 리를 배대받고 나오는 오늘이 두 번째 생일인 새내기 용재들이 우르르 나왔다. 축하 하러 온 선생님들과 껴안기도 하고, 손을 잡으며 기뻐하는 모습들, 하서말씀을 가슴에 꼭 안은 상기된 표정의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모습을 보게 하시는 이유 역시, 오늘 들은 신전강화나 기초강좌 말씀처럼 존명의 교조님을 느끼며, 용재로서 재탄생을 확인시켜주시는 것이라 싶으니 흔감하다.

교조전 앞 합전에서 한참 엎드려 있는데 졸린다. 그래서 , 고단하다, 어서 돌아가자고 생각해도 뭔가가 붙잡는 것 같았다. ‘교조님, 뭔가 제게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제 발길이 떨어지질 않습니다.’하고 가만있자니 갑자기 주위 분위기가 좀 어수선하다.

당번을 서시는 선생님들이 일어서시더니 합전에서 교조전을 향해 정면으로 앉으시고, 어디서 한분이 더 오셔서 세 분이 앉아계셨다. ‘뭐하시는 거지?’하며 보니 다른 참배자들도 고개를 들고 쳐다보고 있었다. 합전 안쪽인 교조전에서 교조님의 시중을 드시는 부인이 한 분 더 나오셔서 참배를 하고 제단 쪽으로 올라가셔서 길다란 제단을 들고 내려오시는데 그 모습이 교조님을 모시고 오는 듯 조심스럽고 정성스러웠다.

아하! 저녁 8시 반, 교조님께서 지금 안방으로 들어가시는 시간이구나. 저 단에 교조님께서 앉아계시는구나.’ 싶었다. 그 모습을 보니 존명으로 계신 교조님을 직접 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찌 보면 그냥 제단을 들고 가는 것이라 볼 수 있겠지만 오늘 하루 교조님의 존명을 확신하고, 교조님 제자인 용재로 자각을 다시 하면서 맑아진 마음이라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교조님께서 마치 그렇게 멀리서 와 놓고, 내가 들어가기도 전에 돌아간다니 서운하지 않으냐. 한 번도 내가 들어가는 걸 보지 않았잖니? 오늘 만이라도 내가 들어가는 걸 보고 갔으면 좋겠다.’하시며 내 발길을 잡으신 것 같다. 교조님이 들어가시는 걸 기쁘게 배웅하고는 돌아오며 이렇게 터전에 돌아온 것을 교조님께서도 기뻐하시며 지켜봐 주시는구나.’ 싶어 흐뭇했다.

기초강좌를 들을 때 터전에 돌아오셨으니 어버이신님, 교조님께 보물을 많이 받아 가시라고 자꾸 강조하셨는데, 뭐가 보물일까? 싶었다. 사실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수훈의 리를 받은 날을 잊지 말자, 용재로서 자각을 새롭게 하라, 존명하신 교조님을 확신하라. 교조님을 느끼고 기쁘게 살아라. 남을 도울 마음을 다져라.’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것들이기에 보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선생님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보물이란 저런 것인가?

그러면서 내가 참 교만하고, 어두워져 있구나. 보물을 당연하게 여기다니싶은 생각이 퍼뜩 들었다. 보물을 당연하다 여기는 교만이, 은혜를 망각하는 어두운 마음이 죄송해졌다.

터전에 돌아와서 얻는 깨달음, 기쁨, 감동들이 하나하나 영롱한 보물이 아닌가? 내 마음이 맑아지고 밝아져서 즐거워지는데 어찌 보물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겠는가?

이렇게 4월 움틈근행과 교조탄생제에 참배하는 터전귀참을 잘 마쳤다. 이번 터전귀참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시순이라는 자각을 일깨우게 되었다. 마치 새 봄을 맞아 만물에 새 움이 트듯이, 내 신앙도 굳건히 뿌리내리고 새움이 트는 시순이라고 어버이신님께서 격려를 해 주시는 것 같다.

움틈근행, 기념건물 견학, 탄생제 참배, 그리고 기초강좌들을 통해서 존명하신 교조님의 따스한 숨결을 느끼며 보물을 한가득 가슴에 받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