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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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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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계대제 신전강화

진실한 구제의 씨앗 뿌리기

 

이상봉(고성교회장)

 

오늘, 고성교회 춘계대제에 참배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잠깐 한마디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4)

 

용재의 본분은 스스럼없이 수훈전하기

춘계대제는 1887년 음력 정월 26일 교조님께서 은신하신 것을 계기로 해서 올리게 된 근행입니다. 그 당시 교조님께서 은신하신 사정에 관해서 말씀드리자면, 어버이신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서로 대립해서 일어나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근행 때문이었습니다. 교조님께서 가르쳐주신 근행을 올리지 못하는 주변 사정과 가르쳐 주신대로 근행을 올리라고 마음작정을 재촉하는 사정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교조님 은신하시고 난 후에 크게 달라진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교조님 계실 때는 수훈의 리를 교조님께서 내려주셨는데 교조님께서 은신하신 이후에는 내려줄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때 지도말씀에 따라 별석말씀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수훈의 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훈의 리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게 되서 교조님께서 은신하신 후 10년 동안 천리교의 교세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됐습니다. 근행을 올리고 수훈을 전하는 일이 교조님께서 은신하시는 마디 속에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리교에서 용재라 하는 것은 신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즐거운 삶의 세계를 건설하는 재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터전에 돌아가서 별석을 9번 듣고 수훈의 리를 배대한 사람들을 흔히 용재라고 합니다. 용재가 해야 할 일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병이 든 사람에게 구제를 바라며 수훈을 전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리고 근행을 올리는 것입니다.

사람을 구제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에게 물질적으로 도움을 줘서 구제하는 것도 있고, 말이나 행동으로 구제하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용재는 우선 수훈을 전하는 것이 구제의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용재는 스스럼없이 수훈을 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아무리 아픈 사람에게 수훈을 전해도 수호가 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천리교에서는 마음작정 하여 시간을 정해놓고 신앙적인 실천을 해서 병이 든 사람을 구제하려고 노력합니다. 천리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신에게 기간을 정해서 특별히 소원을 비는 일은 자주 있습니다.

<교조전>에도 교조님께서 월일의 현신이 되시기 전인 입교 이전에도 근처의 젖먹이를 맡아서 기르던 적이 있었는데 이 아이가 천연두에 걸려서 생명이 위태로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교조님께서는 근처에 씨족신에게 100일 동안 맨발로 참배를 다녔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맨발로 다녔다는 것은 자신의 희생적인 행위를 통해서 자기 마음의 진실을 신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이와 비슷한 행위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희생을 통해서 신에게 소원을 비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마음작정이라 함은

우리가 흔히 마음작정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합니다. 신앙을 하지 않는 일반인들도 마음작정을 해야 되겠다.’고 하여 올해는 담배를 끊어야 되겠다.’ 라거나 술을 그만 마셔야 되겠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해야 되겠다.’ 등의 작정을 하곤 합니다. 이런 것들도 물론 작정에 속합니다만, 천리교를 신앙하는 가운데의 작정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적인 실천과 연결되는 작정이라야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담배를 그만 두어야겠다는 작정을 하면서 담배를 살 돈을 신님에게 바친다거나 하는 신앙적인 실천이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담배를 끊는 것으로 건강이 좋아지고자 하는 것에 그친다면 신앙적인 작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그만 두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시간에 교회에 참배를 하겠다든지, 혹은 가족과 함께 교회에 참배를 하겠다. 월차제에 참배를 하겠다. 월차제 근행에 악기를 연습해서 제원으로서 참배하겠다하는 여러 가지 신앙적인 것과 연결되는 작정을 천리교에서 말하는 마음작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87년 음력 정월, 교조님의 신상이 위급해졌을 때 근행을 올려라라는 교조님의 말씀이 있었지만 당시 진주님을 비롯한 선생님들은 근행을 제대로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당시 법률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근행을 올리게 되면 교조님이 연행 당하는 당시 상황 때문에 주저해서 근행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지도말씀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세상에는 나라의 법률이 있고 신님은 근행을 올리라고 하시는데 어느 쪽을 따라야 합니까? 하고 여쭤 보니까.

월일이 있어서 이 세계가 있고, 세계가 있어서 온갖 것이 있다. 온갖 것이 있어서 인간이 있고, 인간이 있어서 율()이 있다. 율이 있어도 마음작정이 제일이야.

(1887. 1. 13)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의미는 온 세계가 있어서 인간이 있고, 인간이 편하게 살기 위해서 서로 의논하여 만든 것이 법률이다. 하지만, 그 법률도 어버이신님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신님에 대한 봉사 즉, 당시 사람들에게는 근행을 올리는 일이고 그 마음을 작정하라는 의미였습니다. 법률과 신님의 말씀 사이에 끼여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부담이 상당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음의 짐이 있고 부담이 있지만 마음 작정이 없으면 근행의 실천을 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천리교에서 신앙이라는 것은 실천을 계속하여 적극적인 마음으로 즐겁게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통해서 괴로움 보다는 즐거움을 더 많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구제

우리가 땅에 씨앗을 뿌리면 싹이 올라오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습니다. 열매가 맺고 꽃이 피는 것은 반드시 씨앗을 뿌린 장소라고만 가늠할 수는 없습니다. 땅 위에 뿌린 씨앗은 새가 물어서 다른 곳으로 나르기도 하고 바람에 날려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는 일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씨앗이 싹튼다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씨앗을 뿌린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상황에서 싹이 틀 수도 있습니다. 뿌려진 씨앗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싹이 트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도움 받고 싶다고 생각해서 아무리 도와주세요하고 기원을 한다고 해도 눈에 보이는 수호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도움을 받지 못하더라도 2년 후에, 3년 후에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10년이 지난 후에라도 신님의 수호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에 걸린 사람을 구제하고자 마음작정을 해서 어버이신님께 기원을 하고 그 마음작정을 완성했을 때는 어버이신님의 선명한 수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하는 물질적인 구제는 천리교에서 말하는 근원적인 구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난한 사람에게 물질적인 혜택을 베푼다거나 하는 것만으로는 근원적인 구제라 할 수 없습니다. 근원적인 구제라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본인 스스로가 즐거워질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미약한 힘으로는 각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식이나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역시 어버이신님 이외에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이 일시적인 구제라 하더라도 그것을 계속 해 나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을 조금씩 조금씩 도와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악가>

이 터전은 신님의 전답이므로

뿌려놓은 씨앗은 모두 싹튼다 (신악가:7-8)

고 했습니다. 나르고 다한 씨앗은 언제 싹틀지 모르지만 어디서라도 반드시 싹이 트고 열매가 맺는다는 것입니다. 교조님은 자기가 도움 받고 싶다면 남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단단히 진실한 씨앗을 뿌려서 남을 도우고 그 결과로서 자기도 도움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올 한해도 일 년 동안 모두 건강하고 용솟음치면서 진실한 씨앗을 뿌려서 어버이신님의 수호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간단하게나마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