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1호
입교187년(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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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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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초대회장님 16

 

인성(人性)이 풍부한 분

이제명(부일교회장)기록

 

 

이제 한국의 이 길도 2,3대로 세대교체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이 길의 전성기는 역시 각 교회의 초대시절이 아니었던가 싶다.

물론, 교리적으로나 제의식, 근행 등은 과거보다 많이 정립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포교·구제활동에서는 그 정신과 실천면에서 초대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 상황으로 보아 더욱더 초대들의 면면들이 그리운 감정으로 문득문득 기억에 떠오르기도 하는 가운데, 이번에 고성교회 낙성봉고제를 기해 고성교회 초대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후진들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여 초대회장님에 대해 아는 바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생전의 그 분을 마음에 떠올리면서 몇 자 적어본다.

고성교회 초대회장님(이후 그분이라 표현함)은 원남성교회의 장남’(당시는 역원제도가 없어 제1역원을 장남이라 표현했다)으로서 원남성 초대교회장께 가장 신임 받는 분으로, 풍부한 외모에 걸맞게 마음이 넓고 인자하셨으며, 교만한 분위기는 전연 없는 분으로 알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사로 임명받아 강습소에 근무하면서 그분을 가까이 하는 기회가 많아졌는데, 역시 성품이 온화하고 깊고 넓으며 화를 내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성격이 불 같은 원남성 초대회장께 거의 무조건 , 하며 모시고, 심지어 그때 소문(나의 입신 전 일인 것 같다)에 의하면 원남성 초대교회장께 얻어맞기까지 하면서도 조금의 반항이 없었다 하니 참으로 대단한 분이라고 존경이 갔다.

그리고 그분과 더 가까워진 것은 고성교회 순회강습을 하면서 고성교회에서 숙박을 하면서였다. 그분은 큰 교회 교회장으로서 매일 순교에 바쁘셨는데, 조석근행 때마다 반드시 냉수욕을 하시는 것이 그분의 특징의 하나라면 하나였다.

그리고 산하 용재나 신자를 다룰 때도 조급함이 없으셨다. 교리를 전할 때나, 어떤 실천을 시킬 때도 교회장으로서 이렇게 해 보라고 했을 때, “회장님, 그보다는 저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면 , 그것도 좋겠지.” 하셨다.

그 후 제멋대로 그것을 해 본 용재나 신자가 뜻대로 안되어 그 분을 찾아와서

회장님, 그때 회장님께서 시키는 대로 해야 된다고 왜 강제로라도 이끌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고 원망 섞인 목소리로 물으면

, 그것은 강제로 해서는 진정한 신님의 수호라 할 수 없고 스스로 깨달아 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좀 늦더라도 그렇게 한 것이야.”하며 빙그레 웃으셨다고 전해진다.

참으로 대기만성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분이셨다고 여겨진다. 또 인정도 많고 사리에 밝아 언제나 따뜻한 향내를 풍겨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늘 따랐다.

고성교회 순회강습 때의 일이다. 산하 모교회 월차제인데, 바쁜 일이 있어 순교를 못 가실 형편이었다. 나를 조용히 부르시더니,

이선생, 내일 바쁘시지 않으면 OO교회에 나 대신 좀 가 줄래요? 가 준다면 모시러 오도록 시킬테니.”

회장님만 좋으시다면.”

해서 이튿날 아침 OO교회 교회장이 직접 모시러 왔다. 그 교회장에게 초대회장님은 이선생님 잘 모시고 대접도 후히 하도록 해라. 알겠제, 알겠제.” 하시며 당부에 당부를 거듭 하셨다.

그전에 OO교회 교회장님께서 비슷한 요청을 한 적이 있다. , 산하교회에 순교를 가면서 이선생, 오늘 OO교회에 같이 갈래요? 가서 밥값도 좀 하고.’ 하시며 신전강화를 부탁할 때 밥값 좀 하시요하던 분에 비하면 참으로 인격이라고 할까, 인성이라고 할까, 신앙심이라고 할까, 여러 면에서 그분의 인품이 더욱 돋보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초대회장님을 떠올리면서 그분처럼 깊고, 넓고, 바윗덩이처럼 무겁고, 믿음직스러운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초대회장님의 으뜸하루

 

기무라 미찌고(겡와 3대분교회장) 구술

남상우 기록

195269.

큐슈발() 나라행() 야간열차 안.

열차가 히로시마 역에 도착하자 웬 남자 한 분이 열차 안으로 급히 올라탄다.

여기에 혹시 나라(奈良)시의 기무라 히데오씨 계십니까?”

일순 소리가 나는 쪽으로 열차 안 손님이 고개를 돌렸다. 히로시마역 역무원이었다.

다급하게 누구를 찾는 듯 연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아무런 응답이 없자, 역무원은 다시

나라시의 기무라 히데.”

그때였다. 저쪽 출입구 편에서 누군가가 역무원 쪽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여자였다.

, 제가 기무라 히데오입니다만.”

, 다름이 아니오라 히로시마 역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선생님을 찾는 분이 계셨어.”

기무라 히데오는 자기를 찾는다는 말에 히로시마에서 나를 찾을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기 짐을 챙겨 열차에서 내렸다.

역무원의 안내를 따라 개찰구를 지나쳤다.

히로시마역 안은 손님으로 붐볐다. 역무원은 그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고 나가더니 멈추어 섰다. 40대로 보이는 남자들 앞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한 사람은 자그마한 키에 얼굴에 병색이 만연했고, 다른 한 사람은 건강해 보이는 얼굴에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럼, 이만 저는 실례를 하겠습니다. 기무라 히데오씨, 용무가 끝나면 나중에 역무실에서 저를 찾아 주십시오. 나라까지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하는 말을 남기고 역무원은 총총히 사라졌다.

서먹한 고요가 잠시 흘렀다. 연신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던 신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많이 놀라셨죠. 저는 히로시마 가우고죠(庚牛町)에서 기독교 OO교회(그 당시 그 곳에는 3개소의 교회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교회명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에서 목사를 하고 있는 OO(이름도 마찬가지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이영수라 합니다. 인사하시죠.”

저는 히로시마 가우고죠에 사는 한국인 이영수라 합니다. 미리 약속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와 죄송합니다. 저는 원폭으로 인해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1시간 간격으로 진통제 주사를 맞아가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해 기독교를 찾아가 매일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하루는 여기 계시는 목사님께서 당신의 병은 기독교에서 나을 수 있는 질병이 아닙니다. 소바죠 근처에 있는 천리교에 가면 혹시 모를까하는 말씀에 포교소를 목사님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교회장님은 큐슈에 순교를 가고 계시지 않는다며 그 곳에 계시던 누군가가 나라시에 있는 당신의 교회(겡와(元和)분교회)에 전화를 걸어, 당신이 큐슈발 야간열차를 타고 나라로 오신다는 이야기에 이렇게 초면에 실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천리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목사님이 천리교를 믿으면 온갖 질병이 다 낫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만 믿고 이렇게 당신을 찾아왔습니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튼 두 사람 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두 분 다 겡와분교회로.”

그 당시 겡와분교회는 지금의 분교회 위치(나라역을 내려 좌측편으로 1500미터)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나라공원 쪽(나라역을 내리면 정면으로 1500미터 · 나라시 와끼도죠 16번지)에 가까웠다.

교회 크기는 신전이 다다미 6, 배전도 6, 헌찬실이 4.5, 마루가 3장 정도였다. 거기서 30명 정도가 숙식을 같이 했는데, 기어들어갔다가 기어나오는 다락에서 생활을 했다.

겡와분교회를 찾은 뒤에도 이영수 선생은 고통을 호소했다. 기무라 히데오 겡와분교회 초대교회장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지내도록 하세요.”라는 말씀을 전한 뒤, 수훈을 전했다.

그날 밤 이영수 선생을 위한 특별 기원근행도 올렸다. 이영수 선생에게 수양과 입학을 권유, 허락을 받은 겡와분교회 초대회장님은 그 당시 교회관련 서류작성 일을 하고 있던 나에게 이영수 선생의 교회본부 수양과 접수를 위한 서류작성의 일을 시키셨다. 그때 내 나이 19살이었다.

수양과 제135기생들의 접수 마감일에 맞춰, 나중에 원남성 초대교회장이 되는 최재한 선생이 수양과 입학을 시킬 학생들 다수를 데리고, 저녁 무렵 겡와분교회를 찾았다. 핫삐를 입고 저녁근행을 보고 있는 이영수 선생을 최재한 선생은 그때 처음으로 만났다.

최재한 선생은 처음 보는 이영수 선생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니 처음 보는 얼굴인데 도대체 어디서 왔노.”

, 히로시마에서 온 이영수라고 합니다.”

그래, 한국사람.”

628, 이영수 선생의 수양과 입학서류를 챙겨 접수를 시켰다. 71, 교회본부 수양과에 입학을 했다. 927일 제135기로 수양과를 수료하고 순서참배(야기대교회, 미쯔야마분교회, 야스히로분교회)를 마친 이영수 선생이 저녁 늦은 시간에 큰 보따리를 들고서 겡와분교회를 찾았다.

3개월 전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수고 많았다는 겡와 초대회장님의 인사가 끝나자, 조금 전 들고 들어왔던 큰 보따리를 분교회장님 앞으로 내놓았다.

회장님, 신님을 천리에서 사가지고 왔습니다.”하며 보따리를 풀었다. 신각이었다. 천리 혼도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그마한 신각이었다.

이영수씨, 신님은 시장에서 흔히 사고 팔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님이 아니고, 이 속에 신님을 안좌해야.”

겡와 초대회장님은 서둘러 시장에 가서 제물을 준비한 후, 근행을 보고서 그 속에 신님을 모셨다.

고맙습니다. 신님 말씀을 영원히 마음에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즉시 이것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한국에는 아직도 저를 기다리는 어머니와 집사람, 그리고 애들이 있습니다. 많이 건강해졌지만 아직 이 몸으로 이 곳에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이영수씨 당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리고 곧 최재한 선생도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그분을 도와 한국에서 천리교 포교·전도에 더 한층.”이라는 협조당부를 하셨다.

그리고 회장님, 이것도 받아주십시오.”

하며 보따리에 싼 무언가를 내밀었다.

금덩어리였다. 금덩어리가 보따리에 가득했다. 그것을 나중에 재일(在日)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오사카 즈루하시에 있던, 전당포 게이깅(慶金)에서 팔아 정성금으로 올렸다.

신님을 모시고 한국으로 돌아간 이영수 선생은 그 후에도 상급과의 연락(그 당시는 전화가 흔치 않은 세상이라 주로 편지를 이용했다)을 끊지 않고 신앙을 계속 이어나갔다.

선생님, 그동안 별고 없습니까? 이번에는 이런 이런 신상자가 입신을 했는데, 어떻게 하면 수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좋은 가르침을 바랍니다.”는 지도(指導)를 바라는 편지가 주()를 이루었다.

1주일이 멀다 하고 그런 편지가 왔다. 어머니(겡와초대교회장)께서 일러주는 대로 회답편지를 적어 보내는 수고까지 내가 도맡아 했다. 그 많았던 편지가 몇 차례의 고성교회 역사와 이사 등으로 한 통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 와중에 최재한 선생은, 그 분의 행적을 일본 언론에서 떠드는(그 당시 최재한 선생은 이 길에 입신하기 전 행적으로 인해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 전국 수배령이 내려져 있었다. 수배범이 천리교에서 유명한 포교사로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었던 게 신문지상에 버젓이 실렸으니) 바람에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미 이영수 선생도 한국으로 돌아가 이 길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도 돌아가 같이 열심히 이 길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말만 남긴 채 1954년 드디어 최재한 선생은 밀항선을 타고서 한국으로 되돌아갔다. 이것을 시작으로 한국 천리교는 해방 이후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 작년 입교175년은 고성교회가 포교 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5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책 오직 근행뿐이야를 조금씩 나눠 싣고 있습니다. 이영수 초대 회장님을 그리며 으뜸하루를 되새겨서 한 걸음 더 성인하기를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