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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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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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초대회장님 15

 

유일한 취미

박융자(고성3대교회장) 구술

남상우 기록

 

시대가 어려웠던 때라 그런지 초대회장님께서는 취미가 달리 없으셨다. 물이 교회 가까이에 있어서 그런지 물고기 잡는 것을 퍽이나 즐기셨다.

어떤 때는 나를 데리고 다니기도 하셨다. 그런 날이면 초대회장님은 아침근행을 보시고, 아무도 몰래 투망을 지프차 뒤에 손수 실어두셨다. 그리고는 아침 밥상을 들고 들어오는 나에게, 초대사모님 몰래 눈을 깜박거리셨다. 그것이 사인(sign)이었다.

그러면 나는 초대회장님께서 식사를 하고 계시는 동안 된장, , 초고추장, 김치를 싸서 미리 대문간 뒤에 갖다 놓아둔다.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시치미를 뚝 떼고서 아침 밥상을 물리러 방으로 들어가면, 초대회장님께서는 물고기를 잡는데 나를 데리고 가려고 며느라, 오늘 누구네 집에 내 심부름 좀 갔다 오라며 거짓 심부름을 시키셨다.

언젠가 그렇게 해서 아무도 몰래 순교를 같이 갔다 돌아오는 길에 초대회장님께서는 바다를 쳐다보시면서, “수많은 강과 냇물, 계곡물이 함께 큰 바다에 모이면 한 가지 맛이 되듯이 사람도 천 사람, 만 사람이 각각 생각이 다르지만 마음을 넓히면 누구나 큰 바다 같은 심성, 즉 단노에 이를 수 있다.

단노를 못하고 들끓으면 좋은 게 일시에 다 없어져 버리거든. 들끓음은 불이라 다 태워버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도 들끓음을 한 번 내고 나면 다 끝이야. 그러니 항상 단노해야 돼.” 하며 단노에 대해 들려 주셨다.

냇가에서 투망으로 고기를 잡아 매운탕, 생선회에 밥하고 즐겨 드시다가 한번은 간디스토마에 걸려서 고생을 한 적도 계셨다.

그 당시는 간디스토마에 대한 예방약이 없었다. 경북대병원에서 약이라고 내놓았는데, 너무 독해서 다시 회수해 가는 통에, 결국에는 약이 없어 한동안 고생을 하셨다.

 

출직하시던 날

 

초대회장님께서는 이 길을 걷고부터는 감기 한번 옳게 하시지 않을 만큼 건강하셨다.

초대회장님께서 출직하시기 7,8년 전에 순교를 가셨다가 엄청나게 아파서 돌아오신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완전히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그때 아팠던 것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때도 간이 안 좋으셨다.

그때와 증세가 똑 같으셨다. 이번에도 조금 저렇다가 말겠지 생각하고서 기원도 드려보고 했었는데, 결국은 안돼서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그 때가 초봄이었다. 정월달 그러니까 설을 쇠고 나서 아파 드러누우셨다. ‘김경식 내과에 모시고 갔는데, 입원 한 달이 지나도 호전되는 기미는 없고 오히려 더 악화가 되었다.

초대회장님은 그러면서도 신앙적인 집념이 엄청나게 강해, 시계를 옆에 항상 끼고 사셨는데, 근행 시간이 되면 근행을 한 번도 빠트리지 않으셨다.

초대회장님이 출직하시고 나면 고성교회는 이제 문을 닫게 되겠구나하고 생각할 만큼 초대회장님은 절대적이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러했다.

그 당시 친구들끼리 조그마한 계를 모아서 자개장롱과 경대 하나를 장만했는데, 냄새도 채 다 가시지 않은 것을 모두 헐값에 팔아 버렸다.

그리고 시집올 때 가지고 왔던 안 입고 아껴둔 옷가지도 장롱에서 꺼내, 그 때 창녕 초대교회장이 헌옷 등을 섬으로 돌아다니면서 팔고 다녔는데, 그 당시에 나는 우리 아버님만 살릴 수 있다면 장롱이고 옷이고 다 필요 없다 싶어서 다 꺼내서 팔아 정성금으로 다 올렸다.

지금처럼 의학이 좋아 마지막 수단으로 수술을 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주위에서 재첩이 좋다고 하면 재첩을 해 드리고, 당근이 좋다 해서 매일 당근을 갈아 드리기도 해 보았지만, 차도가 없어 결국에는 고성교회로 모시게 되었는데, 뒷방에 머무르셨다.

고통 때문에 의식을 자주 잃으셨는데, 그럴 때면 알부민 주사를 놓았다. 마침 주위에 아무도 없는 날에는 내가 직접 주사 바늘을 찌르기도 했다.

그때는 하룻밤에 7번씩 냉수목욕을 2대교회장님과 하면서 기원근행을 드리고 있을 때라 깊은 잠은 생각도 못할 때였다. 그 와중에 살짝 새우잠이 들었는데, 꿈에 초대회장님께서 옛날에 입으시던 바지를 주섬주섬 입고서 바지끈을 묶으시더니, 나를 쳐다보면서 인자 내 갈란다하셨다. 그 말에 깜짝 놀라 퍼뜩 깨어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새벽 530분이었다. 꿈이 너무나 생시 같아서 초대회장님을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주로 옆으로 누워 계셨는데, 반듯이 누워계셨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숨소리를 들어보니 고르지 않으셨다.

놀란 마음에 얼른 일어나 초대사모님에게 알리고 초대회장님을 그 방으로 모셨다. 그리고는 신전으로 향했다. 마침 아침 근행시간이라 신전에 모여 있던 교신자들에게 이 사실을 급히 알렸다.

모두들 급히 초대회장님 주위를 빙 둘러앉아 다같이 팔수를 불렀다. 그 속에서 행복하게 초대회장님게서는 우리들 곁을 떠나셨다.

그때가 1976413(양력) 오전 615분이었다. 향년(享年) 66세였다.

 

중매, 결혼

 

남근기(삼양포교소장) 구술

남상우 기록

하루는 어디서 듣고 오셨는지 부모님께서 천리교 가면 돈 없이도 온갖 질병이라도 다 낫는다는데 심장병으로 고생하지 말고 너도 거기나 한번 가봐라하셨다.

군대를 심장병(부정맥)으로 의가사제대를 했지만, 가족들의 살림을 혼자서 도맡다시피 했던 나는 내 몸 하나 돌볼 여유도 없이 고성 수산업 협동조합에서 급사로 일을 하고 있었다.

지금 같으면 무슨 그런 종교가 있습니까하고 들은 척도 하지 않았겠지만, 그때는 천리교와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솔깃했다.

도대체 천리교 고성교회가 어떤 곳이기에 업혀서 들어갔던 사람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발로 걸어 나온다는 말인지 그 말이 믿기지 않아 내 발로 찾아갔다.

1, 2백명 정도가 기숙을 하면서 근행을 보는데, 근행을 보러 온 사람 누구나 참배가 끝나면, 지금도 그러하지만, 여러 사람들 앞으로 나가 아침에는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저녁에는 반갑습니다. 저녁식사 하셨습니까하며 인사를 나누는데, 그 모습이 낯설어 망설이다가 집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서 내 신상에 대한 인연판단도 들어보지도 않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워 천리교를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심장병을 앓게 된 인연이라도 알고 그만두자는 속셈으로 다시 초대회장님을 찾아갔다.

오랫동안을 심장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라도 알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 (초대회장님은 말씀하기에 앞서 항상 ~’하며 한참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으셨다)

가족들을 맞추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군. 건강이나 복은 종교나 천지자연이 주는 것이 아니야. 각자 타고난 성품을 밝게 하면 건강도 주고 복도 주는 것이야. 짧은 한 생에 해야 할 일 가운데 선후가 있으니 타고난 성품을 밝게 바꿔 놓는 것이 가장 먼저라네

이 말씀뿐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남에게 말하기를 꺼리는 이야기 한두 개쯤은 있다.

나에게는 의붓어머니가 계셨다. 내 나름대로는 어머니에게 한다고 했지만, 서로 마음이 안 맞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인연판단을 들은 나는 깨달은 바가 없지는 않았지만, 나 혼자 벌어서 온가족이 입에 풀칠을 하던 그 당시로서는 고성교회에 머물면서 내 인연을 다스릴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더 큰돈을 벌겠다고 마산에까지 나가서 제지공장을 다녔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큰 가르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늘 마음이 불안하고, 사람 만나는 게 겁이 나고. 음식에서 송장냄새가 나는 등, 이번에는 일종의 정신질환까지 앓게 되었다.

그때 진전교회 초대선생(하달필)의 친정이 자취집 바로 앞에 있었다. 그 당시 고성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고 있던 하선생은 친정에 들렀다가, 내가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웃집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나를 찾아와 자신이 천리교를 믿어 수호받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내 나이 27살 되던 해(1962)였다. 삶의 갈림길에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천리교의 인도가 있었다. 내가 살 길은 이 길밖에는 달리 없겠다 싶어 그 분을 따라 나섰다.

마침 교회가 역사 중(2차 교회역사)이라 가자마자 히노끼싱에 정신이 없었지만, 우리 집에 비해 먹을 것도 풍부했으며, 2층 기와집이라 비가 와도 지붕이 샐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야말로 귀한 것이 없는 부자집 가운데 아들마냥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그 길로 차츰차츰 좋아지더니 심장병도 정신질환도 말끔히 나아 건강한 모습으로 19635, 29기 순회강습을 고성교회에서 받았다.

그러다가 내 나이 서른 살 되던 겨울(19651210)에 만인구제의 길을 걷겠다는 포부를 품고서 미숫가루 5되에 고구마 몇 개 삶아서 바바리코트 하나만 달랑 들고 삼랑진으로 단독포교를 나갔다. 내 인생에서 가장 추운 겨울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대회장님이 조용히 부르셨다. “니 나이도 있고 이제는 결혼을 생각해 볼 때가 안됐나.”

동생 때문이라도 결혼을 하긴 해야겠는데 가진 것도 없는 나에게 누가.”

정말이지 결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런 내 앞으로 사진 몇 장을 내려놓으며 이 중에서 한 사람을 골라 봐라 하셨다. 누구를 고를 형편이 아니었다. 보다 못한 초대회장님께서 지금의 집사람을 추천(?)해 주셨다.

일사천리였다. 이듬해 120, 고성교회 신전에서 초대회장님의 주례로 부자집 맏아들마냥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만일에 초대회장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홀아비로 평생을 살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난한 포교사였다.

결혼 후에도 인덕(人德)이 없었던 나는 만인구제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전도 · 포교에는 많은 실패를 거듭했다.

하지만 나를 낳아주신 혈육의 부모들조차도 어쩌지 못한 건강과 천생배필을 구해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초대회장님! 참 감사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 작년 입교175년은 고성교회가 포교 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5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책 오직 근행뿐이야를 조금씩 나눠 싣고 있습니다. 이영수 초대 회장님을 그리며 으뜸하루를 되새겨서 한 걸음 더 성인하기를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