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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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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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월차제 상급교회장 인사말씀

겉모습보다 영혼을 멋지게

 

최정욱(원남성교회장)

 

마무리 달입니다. 원단 지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너무 빨라서 벌써 마무리 달이 되고 며칠만 있으면 새 원단을 지내야 할 정도로 시간이 총알 같이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금년 한해 신님께서 마디를 많이 보여주셔서 많이 보고 듣고 느끼면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교조님 말씀에 신이 목표인가 사람이 목표인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산하들이 겪는 마디를 통해서 그 말씀이 용재들에게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흔히 정에 이끌려 리를 망각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가슴에 신이 목표인가 사람이 목표인가를 물어보고 나는 과연 어떤 신앙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의 정에 따라서 리를 저버릴 것인가, 리를 세워서 인간의 정을 버릴 것인가를 잘 판단해야 합니다. 두 가지 다 되면 좋은데 그렇지 못할 경우도 생깁니다. 그럴 경우에는 용재로서 자각을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를 알고 보은하는 마음

지난달 부인회 날에 저에게 전화가 한 통 왔습니다. 어떤 여자분한테서 전화가 왔다고 사감선생님이 통보를 해서 전화를 받았더니, 대뜸 강원도에서 쌀을 좀 보냈는데 받으셨습니까?” 하는 거예요. 그때까지 쌀이 온 게 없어서 도착 안 했다 하니까. “강원도에서 쌀을 두 가마 보냈는데...” 하면서 말끝을 흐리는 거예요. 저는 처음에는 산하에서 보냈는 줄 알고 어디 산하이신데요?” 하고 물었습니다. 근데, ‘산하라는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래서 어디로 보내셨어요?” 하니까. “혹시, 최정욱씨 아니세요?” 하면서 제 이름을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 맞습니다.” 하니까. “... 혹시 내 잘 모르겠나?” 하는 거예요. “누군데?” 이러니까. 자기이름을 얘기하는데 들어보니 중학교 동창인 거예요. 35년 전에 같은 반 했던 동창이었던 거예요. 너무 놀랬어요.

저하고 제 남폄은 포교를 시작하면서 신 한줄기로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미 옛날에 사회 친구를 모두 정리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친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느닷없이 35년 만에 중학교 동창이라면서 전화가 왔는데 너무 깜짝 놀래서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았냐?”라고 물어보니까, 어릴 때 태종대 근처 동삼동에 원남성교회가 있는 걸 봤는데 동삼동에 있는 건 기억을 못하고 태종대 근처 어디라고 생각을 해서 태종대에 갔던 참에 근처에서 교회를 찾으니까 없더랍니다. 그래서 교회가 없어졌나 생각을 하다가 이후에 인터넷에 천리교하고 제 이름을 검색을 해보니까 천리교 고성교회라고 있더랍니다. 거기에 신전강화 한 부분에 제 이름이 올라와 있더라는 거예요. 그렇게 알아서 저한테 전화가 왔던 거예요.

그래서 제가 쌀은 갑자기 왜 보냈는데?” 하니까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니 기억나는가 모르겠는데 내가 사춘기 중학교 때 싱숭생숭해서 너희 집에 가끔 놀러 가면 따로 연락을 하고 가는 것도 아닌데도 한 번도 네가 불편한 기색 없이 언제든지 가면 잘 왔다고 받아주고, 그때 당시 일본식 공기에 담은 하얀 쌀밥을 얻어먹은 적이 몇 번 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그랬던 게 너무 고마워서 그 고마움을 갚기 위해서 쌀을 보냈다는 거예요. 지금도 그때 받은 쌀을 신전에 올렸다가 먹고 있는데 강원도에서 보냈다는 그 햅쌀이 너무 맛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그 친구가 어느 종교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어린 시절에 얻어먹은 쌀밥에 대한 고마움을 갚기 위해서 쌀을 두 가마나 보냈다는 게, 참 신앙을 하는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어버이신님, 교조님께 살리워지는 은혜 속에 감사한 폐를 끼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런 감사함에 대한 은혜 갚는 마음이 되어져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참으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신앙이라는 게 딴 게 아니고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상대의 고마움을 알고 거기에 대한 표시로 실천에 옮겨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뒤에 물어보니 강원도에서 고등학교 일어 선생님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친구하고는 중학교 당시에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고 그저 조금 아는 정도였어요. 이 친구 쓰는 마음씀이 남달라서 그 자식들도 잘 돼있지 않겠나 싶어서 그래, 자식들도 잘 돼있지?”하고 물어보니 그 친구가 그저 별 거 없다고 하는데, 더 물어보니까 한 아이는 서울에 있는 과학고등학교 나와서 서울대 공대에 다니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저렇게 마음을 잘 쓰니까 아이들도 잘 안 되겠나?’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화려한 겉모습보다는 혼을 멋지게

우리 이 길의 용재들은 남을 구제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남을 구제하기는커녕 자기 자신 조차도 구제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자신도 구제 못 받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구제하겠습니까? 이 길은 자기 자신을 갈고 다듬는 각성이 있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어떤 나쁜 일이나 마디를 당하면 자신을 원망해야 함에도 상대를 탓하고 원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한테 안 좋은 일을 당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따져보면 자신의 인연이 맞는 것 같아요. 나한테 그런 인연이 있지 않으면 절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좋을 때야 다 좋은 것 아니겠어요?

신앙인이라면 어떤 마디를 만나고 남에게 말 못하는 고민으로 괴로워할 때 자기 자신이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왔으며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가? 내가 어떠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가? 잘 깨달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껏 어버이신님께서 주신, 우리를 벌하기 위해 주신 게 아닌, 마음을 갱생하라고 주신 이 갚진 마디를 썩혀 버릴 수도 있습니다. 마디에서 싹을 틔우지 못하고 썩혀 버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번에 진주님께서 유달3호를 발포 하셨습니다. 그 중에 삼가할 줄 모르는 욕망은 …… 분쟁을 일으키고 …… 조화를 무너뜨리고 …… 가족 간의 정리마저 없애고 …….’ 하시는 말씀을 되새기며 우리 용재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걸어가야 하겠는가 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다른 종교의 종교인과 좀 다릅니다. 우선 보이는 모습에서부터 다릅니다. 가령 수녀님이나 스님, 신부님들 같은 경우는 각각의 제복이 있기 때문에 바로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천리교의 용재들은 밖에 그냥 걸어 다니면 표시가 안 납니다. 우리들은 그냥 평상복을 입고 다니니까 천리교인을 떠나서라도 종교인인지 아닌지 조차 구분이 안 됩니다. 어버이신님이 마지막 가르침이라 했는데 우리는 어째서 평범한 모양새로 다녀야 하는가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어버이신님은 우리에게 마을의 선인이 되라고 했거든요. 그것은 참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일 겁니다. 스님 같으면 차라리 산속에서 도를 닦으면 좀 외로울 줄은 몰라도 유혹하는 게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집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면 맛있는 냄새가 나고 좋은 게 눈에 보이는 등의 유혹이라는 게 따릅니다. 우리가 신이 아니고 사람이다 보니 그런 건 어쩔 수 없어요. 그런 욕망마저도 없애라 하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우리는 교직자이면서 가족이 있어요. 그렇다보니 아이들 공부를 시킨다거나 하는 최소한의 생활은 해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것은 어버이신님께서 탓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경계선이 있는데 그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 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종교인인데 친구가 몇 백만 원 하는 명품 시계를 하고 있다고 하면 저도 사람인데 그게 안 좋아 보인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런데 멋있어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에서 끝나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처지와 입장이 틀리니까요.

우리는 그런 겉모습과 달리 영혼(내면)이 멋있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버이신님 교조님께서 바라시는 게 바로 그런 겁니다. 그 유혹을 물리칠 자신이 없으면 사회에 나가서 장사하고 사업하고 살아야죠. 그런 유혹에 현혹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 용재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안 된다면 과감하게 직업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계선을 자신이 정해서 자기가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용재의 자질이 필요합니다. 유치원생들은 제복을 많이 입습니다. 대학생들은 제복 잘 안 입잖아요. 그렇지만 유치원생하고 대학생을 비교하면 누가 더 마음의 성인이 되어 있습니까? 당연히 대학생 쪽이죠. 우리는 남이 봐도 제복 같은 것도 입지 않고 자유롭게 보이지만 그 속에서 스스로 절제하는 최고의 마음의 성인을 이루라고 이렇게 제복 없이 자유롭게 다니라고 만들어 놓으신 것 같아요. 제복 같은 것으로 강제로 제약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천리교 용재들은 담배, 술도 허용됩니다. 하지만 그런 담배에 먹히면 안 되고, 술에 먹히면 안 되는 겁니다. 선을 지켜야 하는 겁니다. 그런 것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정말로 분쟁을 일으키고 조화를 무너뜨리고 민폐를 일으키게 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자기 자신을 엄격하게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용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자신의 절제심이 없는 데 어떻게 남을 구제하겠습니까?

 

리를 먼저 세움으로 인정을 다스려야

우리가 진주님에 대해서 참으로 불효를 많이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주님께서 유달3호의 내용에 실어 놓으신 내용들이 모두 우리 한국내의 교회의 사정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을 계기로 공부를 하라고 어버이신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을 보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마음을 다져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여러 가지 일을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은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고 하는 것은 모두 신님의 이치입니다. 신님이 하시는 일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신님을 의지해서 리를 세워나가는 마음을 갖지 않고 사람의 꾀대로 해서는 이 길은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고성교회 산하의 여러분들은 모두 신앙적으로 성숙하고 성인되고, 순직하신 분들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리를 팔아서, 리를 죽여서 인정을 앞세우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은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그 씨앗이 올라오게 됩니다. 그럼 굉장히 낭패를 보게 됩니다. 리를 무너뜨리고 인정에 이끌려서 하지 말아야 될 행동을 할 때,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는가를 저는 많이 봐 왔습니다. ‘리 즉 신이라고 했습니다. 리라는 것은 목숨이라는 겁니다. 리를 무너뜨리면 사람의 목숨이 갈 수도 있다는 겁니다.

대교회120주년과 다가오는 교조130년제의 시순에 리를 바로 세우고, 용재로서 남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서 가깝게는 교우나 상급, 산하에게, 멀게는 터전에 계시는 진주님 등에게도 정말 안심할 수 있는 신앙이 되어서 어른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용재들이 되어주시기를 부탁드리면서 오늘 이야기는 요 정도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