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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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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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대제 신전강화

옛길이 있어서 새 길이 있다.

 

이상봉(고성교회장)

 

여러분 반갑습니다. 고성교회 추계대제에 참배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 지난 7일에는 포교60주년 기념제를 용솟음치는 가운데 올리고 무사하게 행사를 치룰 수 있었던 것도 다 고성교회로 이어진 여러분들 정성 덕택이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말씀 전해드립니다.

이 달은 교조님께서 어버이신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월일의 현신이 되어 우리들에게 이 길의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한 입교의 달입니다. 전석에서 상급회장님께서 좋은 말씀을 해 주셨기 때문에 좀 많이 준비했지만 줄여서 요지만 몇 가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4)

 

이 길에서 옛길은 교조님 모본

교조님은 18381026일 신의 현신으로 정해지신 이래, 현신을 감추신 1887년 음력 정월 26일까지 인간들에게 즐거운 삶을 누리게 하려는 어버이마음에서 가르침을 전하시고 모본의 길을 걸어 주셨습니다.

이 모본의 길이야말로 우리들 신앙의 토대이며 생명입니다.

이전 옛 사정, 옛 길이 있음으로 새 길이라 한다. 어버이가 있어서 자식이 있다고 하는 리를 생각하면 알게 될 것이다. 자아 어버이의 길을 지나면서 어버이의 길의 리를 알지 못한다. 옛길이 있기 때문에 새 길이 있다. 옛길은 어버이, 새 길은 자녀라 한다. 자아 자아, 차츰차츰 새 길을 걸으려 하기 때문에 옛길을 잊는다. 잘 분간해 듣거라. 옛길이 있기 때문에 새 길이라 한다.

옛길이란 이전부터 충분히 다져져 있다. 새 길이란 비가 내리면 붕괴된다고 하는 것이 새로운 리. 50년 이래 차츰 차츰 충분히 다져진 길, 새로운 길은 어느 때 무너질지, 이것 모르는 거야. 옛 리가 이것 제일이라 한다. (1889.10.9)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조모본 50년의 길이 옛길이라고 하고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을 새 길이라고 한다면 부모의 길을 걸으면서 부모의 길을 모른다. 스스로는 부모의 길을 걷는 것처럼 생각하면서도 부모가 걸어준 길의 리를 모른다고 깨우쳐주시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지금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자신의 마음을 맑히고 혼을 닦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조전일화편>을 읽어보면 교조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전생과 진실된 모습, 마음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돈이나 재산, 지위나 명예, 직함이나 옷차림에 의해서 사람을 대하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안에 있는 마음을 보시고 한 사람 한 사람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조님이 활동해 주시기를 바란다면 자신의 마음을 맑히고 혼을 정화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교조전일화편 105, 여기는 기뻐하는 곳>

1882년 가을, 우노 젠스께(宇野善助)는 부인과 아이, 그리고 신자 가족 등, 일곱 명을 데리고 터전으로 돌아왔다. 부인 미사가 산후병으로 죽을 목숨을 도움받은 데 대한 사례참배차였다. 새벽 4시경 집을 나서 걷다가 오구라이께(巨掠池)못을 건널 때는 배를 타기도 하고, 또 인력거를 타기도 하면서 밤 8시경 터전에 닿았다. 이튿날 야마모또 리사브로오의 주선으로 일동은 교조님을 뵙게 되었다. 일동의 감격은 비할 데 없을 정도였는데, 특히 오랫동안 앓던 병을 도움 받은 미사의 기쁨은 한층 더하여 기쁘다 못해 흐느끼기까지 했다. 그러자, 교조님은

왜 우는 거야.”하고 말씀하셨다. 미사는 여전히 훌쩍이면서 산신님을 뵙게 되니 고마워서 고마워서 눈물이 쏟아집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교조님은 터전은 우는 데가 아니야. 여기는 기뻐하는 곳이야.”라고 말씀하셨다.

다음에 교조님은 젠스께를 향해

“3대째는 청수(淸水)처럼 맑아질 거야.”하고 말씀하셨다.

젠스께는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말씀을 드렸으나, 과분한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송구스러웠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고마운 일이야. 오래오래 영원토록 이 길을 위하여 일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던 것이다.

 

교조님은 1838년 신의 현신이 되신 이후로는 어렵고 고생스러운 길을 걸으시고 인간이 참으로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는 모본의 길을 50년의 세월에 걸쳐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난에 빠져라는 어버이신님의 말씀에 따라 온갖 물질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푸시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지내셨습니다. 고깡이

어머님, 이제 쌀이 떨어졌습니다.”

고 말하자, 교조님은

세상에는 머리맡에 먹을 것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도 먹으려야 먹을 수 없고,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고맙잖아. 물을 마시면 물맛이 난다. 어버이신님이 고맙게 보살펴 주고 계시는 거야.”

라고 타이르시고,

아무리 서글퍼도 서글프다 하지 마라. 거지 노릇은 안 시킬 테니.”

하고 격려하셨으므로, 자녀들도 쓰러지려는 마음을 되살려 교조님을 따랐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변함없는 어버이마음

1838년부터 20여 년간은 누구 한 사람도 교조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순산허락의 진기한 수호가 나타나자 다른 신상구제로 신기한 수호가 잇따라 나타나자 쇼야시끼 마을에는 순산신님이 계신다지. ()신님인 모양이야.” 하는 소리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사람들이 줄을 이어 신기한 도움을 받으러 모여들 뿐만 아니라, 중병을 앓는 사람들도 도움을 청하러 왔는데, 많은 사람이 오게 되자 경찰이나 관헌의 박해 탄압도 더 엄하게 되었습니다. 교조님은 80세를 넘어서부터 십 수 차례에 걸쳐 경찰서나 감옥서에서 노고하셨습니다.

당시 교조님은 마중 오는 경찰관이나 취조하는 관리에 대해서도 귀여운 자녀로서 차별 없는 어버이마음으로 대하셨습니다. 교조님은 어디에 계셔도 그 태도나 마음 씀씀이는 평소와 조금도 변함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제한줄기의 어버이마음으로 대하셨습니다.

<교조전일화편 146, 수고 많아요>

1884년 봄, 당시 23세였던 사지 도끼지로오(佐治登喜治郞)는 나라시에 있는 마스야여관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여관 별채에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는데, 여관 주인이저분이 쇼야시끼의 산 신님이야.”하고 붉은 옷을 입으신 교조님을 가리키면서 이 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윽고, 교조님이 도끼지로오가 서 있는 바로 곁을 지나실 때, 도끼지로오는 말할 수 없는 감동에 사로잡혀 정중히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교조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수고하십니다.”하고 응답해 주셨다.

도끼지로오는 교조님을 뵙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숭고한 생각에 사로잡히고, 또 음성을 듣는 순간 신비로운 가운데도 그립고 반가워 따라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훗날, 도끼지로오는 늘 사람들에게 나는 그때 이 길을 걷기로 마음을 작정했다. 어려운 사정이나 괴로운 신상도 없는데 입신한 것은 오로지 그때의 깊은 감명 때문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교조전일화편 195, 수고하십니다>

교조님처럼 차별 없이 자비심이 깊으신 분은 없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조금도 차별하는 마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집터로 찾아와도 모두 귀여운 자녀로 생각하셨다. 어떤 훌륭한 사람이 와도, 수고하십니다. 거지가 와도, 수고하십니다. 라고 인사를 하셨다. 그 태도라든지 말씨에 있어서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모두 귀여운 내 자녀로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라도 한 번 교조님을 뵙기만 하면 교조님의 어버이마음에 감동하여, 단번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교조님의 자비심에 감동한 때문이리라. 그래서 단속하러 온 경관이나, 혹은 지방의 건달패까지도 모두 신앙을 하게 됐던 것이다. 그것도 단번에 입신했고, 또는 개심(改心)했다.” 이것은 다까이 나오끼찌의 회고담이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고생스러운 가운데 항상 즐겁고 용솟음치며 걸으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구제한줄기의 어버이마음을 베푸시며 걸어가 주신 교조님. 사지 도끼지로오 (佐治登喜治良)씨도 교조님의 그러한 태도에 감동을 받아 사정이나 신상도 없었지만 입신해서 현재의 호동대교회(湖東大教会)를 이루게 됩니다.

 

이 길의 토대는 교조님 모본

교조님 모본의 길이라는 것은 마음이나 혼을 어버이에게 다가가게 하는 길입니다. 그것은 옛길입니다. 옛길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길 즉 지금의 시대, 앞으로의 시대에 토대가 되는 것, 21세기에 활용해야 할 토대이자 뿌리입니다.

어려운 것은 말하지 않는다. 어려운 일을 하라고도, 터무니없는 일을 하라고도 하지 않는다. 모두 하나하나 모본의 길이 있다. 모본의 길을 걷지 못한다고 해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

모본의 길을 걷지 않으면 모본은 필요 없다. 모본을 고치면 아무것도 안 된다.

50년 동안의 길을, 50년이나 30년이나 걸어라 하면 안될 테지. 20년이나 10년을 걸어라고도 안 한다. 그저 10년 가운데 셋이야. 사흘 동안의 길을 걸으면 되는 거야. 기껏 천 날의 길을 걸으라고 하는 거야. 천 날의 길이 어려운 거야. 모본의 길밖에 길이 없는 거야. 아무리 서둘러도 서둘러도 안되는 거야. 모본의 길밖에 길이 없는 거야. (1889.11.7)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큰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기초가 되는 토대가 필요합니다. 큰 나무를 키우기 위해서는 그만큼 굵은 뿌리가 필요한 것처럼 이제부터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교조님의 옛길 모본의 길이 중요합니다. 이 교조님 모본의 길을 우리 용재들은 인생의 가늠자로 삼아 규범으로서 구제한줄기의 일을 해나갔으면 합니다.

<친필>

높은산에서 살고 있거나 골짜기에서

살고 있거나 같은 혼인 거야 (13-45)

라고 나옵니다. 혼은 높은 산에 살고 있는 것도 골짜기에 살고 있는 것도 상하차별이 없고, 남녀구별도 없으며 모두 같은 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송남송 차별없다 고도 말씀하시는 것처럼 남녀평등을 말하시는가 하면

부모자식간 부부간 형제간이라도

모두 각각으로 마음 다른 거야 (5-8)

라고 하셨습니다. 부모자식간에도 부부 형제간에도 모두 각자 마음 다른 거야 라고 하셨습니다. 부모자식과 같은 가까운 사이라도 부부처럼 같이 사는 사이라도 형제처럼 피를 나눈 사이라도 마음은 모두 다릅니다. 남이라면 더욱더 다릅니다. 자신의 마음은 자신이 의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나쁜 마음 씀씀이를 쓰는 것도 혹은 좋은 일을 생각하는 것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의식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리가 따라서 나타나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리가 따라서 나타난다라고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혼은 우리가 느낄 수 없습니다. 혼은 무의식입니다. 스스로는 알 수 없지만 엄연히 활동하고 있는 것이 혼입니다.

<하서>

대저 인간이란 몸이란 것은 신의 대물차물, 마음 하나가 나의 리. 마음의 리란 것은 나날이라 한다, 항상이라 한다, 나날이 항상 어떠한 사정 어떠한 리, 겹친 사정 어떠한 리, 어떠한 리라도 나날이 모두 받아들인다. 받아들이는 가운데 오직 하나 자유자재라는 하나의 리. 자유자재란 리는 어디에 있다고는 생각 말라. 오직 각자 정신 하나의 리에 있다. 나날이라 한다, 항상이라 한다. 나날이 항상 정성 하나라고 한다.

라고 나와 있듯이 대물차물의 교리가 이 길의 토대라고 합니다만 육체를 빌리고 있는 주체는 혼이지 마음이 아닙니다. 이 길에서는 죽는 일을 출직이라고 가르치고 육체를 돌려드리게 됩니다만 혼이 없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혼만큼은 계속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육체를 빌려 환생을 거듭하면서 즐거운 삶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이 길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뿌린 씨앗은 반드시 싹이 난다

집터에 있는 사람은 좋은 것 먹고 싶다, 좋은 것 입고 싶다, 좋은 집에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 못 있는 곳이야. 좋은 것 먹고 싶다, 좋은 것 입고 싶다, 좋은 집에 살고 싶다고만 생각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부자유하지 않는 집터야. 이것이 세상의 부자 집터인 거야.” <교조전일화편:78, 부자 집터>

라고 들려주셨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어버이에게 의지하는 생활이야 말로 부자의 생활입니다. 육체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무엇보다 고마운 부자유함이 없는 부자의 생활입니다.

<지도말씀>

리는 보이지 않아도 모두 장부에 적어둔 것과 같은 것, 다달이 해마다 남으면 돌려준다. 모자라면 받는다. 평균계산은 분명히 한다. (1892.1.13)

라고 나와 있습니다.

저도 초대선생님이나 부모님이 신앙을 한 덕분으로 하늘의 장부에 저금해 주신 덕분으로 오늘까지 건강하게 이 길의 일에 쓰여지고 있습니다.

초대로서 동중앙대교회를 이룬 카시와기선생의 말씀에 항상 교회는 리의 부모에게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는 길을 걷는다면 반드시 교회는 번창한다. 리가 뻗어나간다. 역시 이 길은 부모를 즐겁게 하는 길 외엔 수호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이 길도 대를 거듭해서 2, 3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초대분들도 계십니다만 이 길의 초대들은 거의 모두 자신의 신상을 도움 받아 입신했습니다. 도움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오로지 신한줄기에 철저했습니다. 그런 신념이 있기에 그들은 어버이신님에게 마음이 통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신앙하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교회장이 됐다거나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신앙한다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를 통해서야만 그 뿌리가 어버이신님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결합수호의 리의 이치는 인간 몸에서는 여자하나의 도구, 세계에서는 금전, 연담, 만 가지 연결의 수호입니다. 이끌어 들인 도구는 거북입니다. 거북처럼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라도 어버이신님에게 잇는 마음이야말로 구제받는 생명의 연결이라고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긴 것은 앞으로 낙이 있다. 짧은 것은 낙이 없다. 갑자기 피는 꽃은 꺾어서 화병에 꽂아 둔 거나 같은 것, 이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 자아 자아, 뿌리가 있는 꽃은 늦게 핀다. 그러나, 해마다 핀다. , 가지에 가지가 뻗는다. 뿌리로 버틴다. 이 이치를 단단히 생각해 보라. (1891.11.1)

라고 나와 있습니다. 화려한 형태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남의 눈에 띄지 않더라도 뿌리가 있는 신앙 속에 살아야 합니다. 뿌리만 있으면 가지에서 가지로 번성해지고 뿌리도 더욱 굵어집니다. 꽃이 피고 열매도 열립니다. 이것이 이 길의 신앙자세로서 이래야만 어버이신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없어서는 안 될 이 길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바위 위에 씨를 뿌린다. 바람이 불면 날려간다. 새가 먹어 버린다. 싹트지 않는다. 마음으로 진실을 다하여 뿌린 씨앗은 묻혀 있다. 괭이로 뒤집어도 거기서 싹트지 않으면 다른 데서도 싹이 튼다. (1890.9.30)

남들이 보는 데서 남의 눈을 의식하면서 씨앗을 뿌려서는 어버이신님이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남이 보든지 말든지 진실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어버이신님을 위해 다한 씨앗은 마치 흙 속에 뿌린 씨앗과 같은 이치로 남이 모르고 들춰내도 장소만 바뀔 뿐, 한 번 뿌린 이상은 반드시 싹이 납니다. 이 길은 나르기 다하기를 해서 손해를 보는 일은 없습니다.

 

전석에서 하신 상급회장님의 수훈에 관한 말씀도 우리가 교조님의 모본을 따라가는 데 있어 어버이마음을 각자 각자의 마음에 살려서 구제하는 데 실천해 간다면 지금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교조님이 걸어가신 옛길을 토대 삼아서 즐거운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간단하게나마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