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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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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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초대회장님 14

 

참 예쁘게도 생겼네

박융자(고성3대교회장) 구술

남상우 기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쯤일 것이다. 하루는 무심결에 옆집에 사는 언니를 따라서 30평 정도의 목조 건물에 첫발을 내디뎠던 게 천리교와의 첫 인연이었다. 그것도 교회신전에서 그날 처음 시아버님이 되시는 초대회장님을 뵈었다.

건물(신전)을 들어서자, 초대회장님께서 신전 벽에 걸려 있는 거울 앞에서 비누 거품을 얼굴 가득 바르고 면도를 하고 계셨다. 첫인상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었으며 인자롭게 보였다.

신전을 들어서는 우리들을 초대회장님은 언제 보셨던지 언니를 거울너머로 쳐다보시면서 저 아이는 누구 집 아이고.”하며 물으셨다.

그 언니가 거짓말로 제 동생인데예.”하니까 , 그래. 참 예쁘게도 생겼네.”하면서 참배를 하라고 시키셨다.

처음 온 천리교라 낯설었지만, 옆집 언니를 따라 참배를 했다. 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갑자기 갈증이 느껴졌다. 물이 먹고 싶어졌다. 옥수물을 한 모금 마셨다. 마시자마자 눈에서 불이 번쩍 하는 경험을 했는데, 지금도 옥수물을 마실 때면 그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속으로 참으로 이상한 일도 다 있다며, 모르긴 해도 이곳에도 신비로운 신님의 활동이 계시는구나 하고 신발을 신으면서 신전을 한 번 더 쳐다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도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근행을 보러 갔는데, 그 때마다 초대회장님께서는 나를 반기시며 할 줄도 모르는 손춤을 자꾸 하라는 통에 옆 사람들이 하는 손짓을 곁눈질로 쳐다보면서 따라 하곤 했다.

 

옷이 다 어디로

 

지금이야 고성·부산 간 도로가 좋아 자동차로 2시간 30분만 하면 갈 수 있지만, 초대회장님 시절만 해도 고성에서 부산까지 비포장 도로라서 그런지 5시간씩 걸렸다.

그래서 지금처럼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순교는 흔하지 않았다. 순교 한 번 나가시면 1주일씩을 다녀오셨는데, 그럴 때면 옷을 다려 가방 잔뜩 넣어 드리곤 했다.

초대회장님께서 순교갔다 돌아오시는 날에는 그동안의 더러워진 옷들을 씻으려고 가져갔던 옷가방을 뒤져보면, 가져갔던 옷들의 3분의 2가 없는 날이 많았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라 아버님, 옷이 다 어디 갔습니까.”하고 물었다.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초대회장님을 이상히 여겨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옆에서 그 말을 듣고 계시던 초대사모님께서 어른이 돼 가지고 밖에서 옷도 칠칠 내버리고 다닌다.”는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 후에야 순교지의 포교소장들을 통해서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단독포교를 나간 사람들은 잘 때도 없고, 옷도 넉넉지 못한 때였다. 그야말로 거지 중에도 상거지 생활을 하고 있는 때라 순교를 가서는 그들을 위해 다 벗어 줘 버리고 오셨던 것이다.

그 후로는 초대회장님에게 두 번 다시 묻지 않았다.

 

만물을 귀중히 여겨야

 

원남성 초대회장이 급히 돈을 해오라 하면, 초대회장님은 주로 나에게 지금 바로 읍내에 나가 돈을 급히 빌려오라고 많이 시키셨다. 나중에는 급전이라도 내어서 해오라고까지 하셨다.

그것을 구해 갖다드리면, “어른이 오시면 즐겁게 해 드려야 수호가 난다고 하시며 상급의 말씀이나 부탁에 없던 것도 간혹 해 드리곤 하셨다.

그러나 당신한테만은 늘 지독하셨다. 아무리 나쁜 일을 당해도 원체 말이 없으신 분이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시달림을 많이 당하셨다.

그 당시는 사회가 어려워서 그런지 술 먹고 주정하는 사람들이 교회 근처에도 참 많았다. 그들 중에는 교회를 찾아와서 당치도 않는 요구를 하기도 했는데, 그 같은 일을 당하시고도 얼굴 한번 찌푸린 적이 없으셨다.

이런 일로 속이 상할 때면 아주 가끔 맥주로 달래곤 하셨다. 입신이후에 술을 끊은 초대회장님은 한 잔을 마시고 나서는 남은 술을 그냥 버리는 게 아깝다 하시면서 매번 맥주병 주위를 고무줄로 잘 묶어 촛물로 봉해 냉장고에 넣어 두고는 뒤에 또다시 부어 드시곤 하셨다.

그리고 고성교회 역사 현장을 쭉 둘러보시다가 벽을 바르고 조금이라도 땅에 흘려 버린 시멘트가 있으면, 손수 흙손으로 쓸어 담아 재사용하도록 시키셨다.

검소하고 만물을 귀중히 여겨야 된다. 그래야 천신님 수호를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것을 늘 몸소 실천하셨다.

그리고 얼마나 돈을 아껴 썼던지 원남성 초대사모님이 맥주를 좋아하셨는데, 고성에 원남성 초대교회장과 같이 순교를 오는 날이면 미리 맥주 살 돈을 주시며는 좋을 텐데, 꼭 오신 뒤에서야-돈이 없어서 그러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돈을 주시면서 교회 앞에 뛰어가서 맥주를 사오라고 시키셨다.

 

원남성 초대교회장의 생신 때 일이다. 그 당시 내가 임신을 해 오늘 내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상급 교회장의 생신이기 때문에 아무나 보낼 수가 없었던지 나를 원남성교회에 심부름을 보내셨다.

언제나 심부름을 보낼 때는 딱 차비만 주셨는데 그날도 그러했다. 노할머니께서는 내가 부산에 간다고 하니까, 시누이집에 쌀 두 말을 갖다 주라며 내손에다 쥐어주었다. 시누이집은 당감동이고, 원남성교회는 청학동이었다.

임신을 한 데다 차멀미까지 했지만, 버스비밖에 없었던 나는 그 쌀부대를 머리에 이고서 가다 서다를 계속했다. 나중에는 어쩔 도리가 없어 시내버스를 타고 당감동까지 가려고 교통부앞에서 지게꾼을 불렀다.

지게꾼에게 쌀을 당감동 버스를 타는 곳까지 부탁을 하고서야 당감동 시누이집에 가져다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그것을 내려놓자마자 내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놀란 시누이가 핏기 하나 없는 내 얼굴을 보고서는 산딸기를 내놓았는데, 지금도 산딸기 철이 되면 그때 생각이 난다.

그렇게 해서 쌀을 갖다 드리고, 자갈치 시장에 들러서 돔을 사서 원남성 초대교회장 생신에 갔던 일이 생각난다.

이런 일이 있을 정도로 돈을 너무나 안 주셨다. 항상 돈을 주시더라도 딱 맞춰 주셨다. 하지만, 초대회장님 자신부터 모든 것을 아끼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으니 달리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근행을 보다가···

 

초대회장님께서는 수양송(좌근)이 끝나고 나면, 배전을 한 바퀴 쭉 둘러보고서는 누가 왔는지 한 번씩 확인하는 일이 참 많으셨다.

또 손춤근행 전에 꼭 배전에 나가 근행을 보러 오신 신자들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려 주면서, “왔나, 누가 많이 아프다고 들었는데 어떻노하며 이것저것을 물어본 뒤에야 손춤근행을 시작하곤 하셨다. 그렇게 하는 근행이었지만 근행에 쏟는 정신만은 남다르셨다. 근행을 진짜 생명처럼 여기셨다.

순교를 갔다 오시는 날에는 배둔쯤에서 근행시간이 7시 같으면, ‘내가 7시까지는 못 가겠으니, 오늘은 30분 늦춰서 근행을 보자.’며 좀 기다리라는 전화를 자주 주셨다. 그러면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아무 불평없이 다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아침근행도 마찬가지였다. 그 전날 아침근행 때부터 내일 아침근행은 다른 날하고는 달리 30분 빨리 봅니다.”라고 미리 알리고 나서, 30분 빨리 아침근행을 보고서 순교지를 향해 출발을 하셨다.

순교를 갔다 조금 늦게 오는 날이면 교회 있는 사람들끼리 볼 텐데 싶어 전화는커녕 저녁근행 시간에 맞추어 오려는 노력조차 안하는 용재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대회장님은 그 점만큼은 남다르셨다.

한번은 초대회장님께서 발을 다치셨다. 걸음을 못 걸을 정도였는데도 붕대를 감고서 상단을 기어 올라갔다 기어 내려오면서도 근행에 열중하셨다.

나는 속으로 아버님은 신자들, 특히 초신앙자들 앞에서 부끄럽게 저렇게 기어 올라가면서까지 근행을 볼 필요가 있을까. 그만 다른 사람한테 보시라 하고 자신은 밑에서 봐도 될 텐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하실까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으며, 용재로서 얼마나 부끄럽지 않은 길이었는지 마음 깊이 느낄 수가 있다.

내가 시집와서 보니까 냉수목욕을 하루에 3번은 꼭 하셨다. 순교를 나가서도 그렇게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집에 계실 때는 꼭 그렇게 하셨다.

저녁 근행 보기 전에 한 번, 아침 근행 보기 전에 한 번,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밤 1시에 기원근행을 꼭 보셨는데, 그 당시는 지금처럼 목욕탕도 없어 장독 뒤-우리 방 바로 뒤-에서, 그 곳은 특히 한낮에도 응달이 져 얼음이 잘 녹지 않았는데, 그 얼음을 깨어가면서 냉수목욕을 하셨다.

냉수목욕과 밤 1시 기원근행 등을 빠트리지 않고 계속해서 해 오신 것이 다른 사람과 크게 달랐다. 다른 사람처럼 단식을 한다든지 하시지는 않으셨다. 오직 냉수목욕과 근행 안 빠트리고 보는 것만을 실천하려 애쓰셨다.

내가 교회일로 몸살이라도 앓아 드러누워 있으면 늘 옆에 찾아와서는 항상 신님에게 의탁하고, 나 믿고 그렇게 살아라는 말씀을 자주 해주셨다. 그 말씀에 힘을 얻어 일어나곤 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내가 어리고 이 길을 잘 몰라 조금만 어렸고 힘들면 초대회장님에게 이 길을 못 걷겠다고 하소연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다.

왜 못 걷겠는 데···.”

감화를 못해서 못 걷겠습니다.”

감화는 안 해도 괜찮다. 근행만 보면 그것도 저절로 된다. 그러니까 근행만···.”

뒤를 쳐다보고 신자들에게 인사하는 것조차도 옳게 못하겠습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인사하다 보면 그것도 저절로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 때문인지 내가 근행만 보면 그렇게 좋아라 하셨다. 그리고 나한테는 늘 입버릇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이 길을 꼭 걸어야 한다. 이 길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신자들에게 일일이 신상에 대한 인연개유를 많이 했다. ‘너는 운명이 이러하니까 신앙을 안 하면 안 된다뭐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도 순교를 다니면 초대회장님 말씀하신 것을 그 당시는 참 이상한 소리 하시네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는데, 지금 와서 재어 보니 꼭 맞더라는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

첫손자(고성 4대교회장)를 낳았을 때는 그래, 신님 일을 볼 사람을 낳았구나하시며 그렇게 좋아하셨다.

손자를 무릎에 앉혀 놓고 상봉이가 이다음에 커서 신님 일을 볼 때에는 엄청나게 번창이 될 거라는 말씀을 하시며 그 날의 온갖 피로를 푸시곤 하셨다.

(다음호에 계속)

* 올해 입교175년은 고성교회가 포교 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입니다. 그래서 지난 5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책 오직 근행뿐이야를 조금씩 나눠 싣고 있습니다. 이영수 초대 회장님을 그리며 으뜸하루를 되새겨서 한 걸음 더 성인하기를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