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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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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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초대회장님6

 

 

비단옷 입고 밤길 걷기

 

공상용(전 구만교회장) 구술

남상우 기록

 

내 고향은 경남 고성군 상리다. 상리에 포교소장이 한 분 계셨는데(이름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였다. 하루는 그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속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큰며느리가 생각나 아버지께 물었다.

아무개야, 우리 큰며느리가 속병으로 저리 고생을 하고 있는데 어떡하면 좋겠노.”

그러면 교회 한번 보내봐라. 그런 것은 고성교회에 가면 당장 도움 받는다아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야야, 천리교에 가면 니같은 병은 금시 낫는단다. 한 번 가봐라.”

답답한 사람이 샘 판다고, 하루는 저녁밥을 먹고 잠시 쉬고 있는 나에게 집사람이

천리교에 가면 무슨 병이라도 다 낫는다 하는데 한 번 가볼래요.”

천리교?”

그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면사무소 공무원이라면 배웠다면 배운 사람인데, 병을 교회서 낫게 해준다는 말은 들어보질 못했다며 처음에는 시끄럽다며 들은 척도 안했다. 그런데도 몇 번이고 집사람이 간곡하게 부탁도 하고 해서 못이긴 척하고서,

그리 소원이라면 한번 가보라모.”했다.

그래서 나보다 먼저 집사람이 천리교에 발을 내디뎠다. 집사람에게 들었던 이야긴데, 초대회장님을 월차제때 만났는데,

어디가 아파서 왔노.”라는 말씀에 어떻게 아프다고 하니까,

그래. 처녀 때는 안 아팠제.”하고 묻는 말씀에 안 아팠다고 하자,

그래 내 이야기 잘 들어봐라. 니 운명은 비단옷 입고 밤길 걷기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니가 아무리 잘해줘도 잘못된 원망은 니한테 다 돌아온다는 말이다. 그것이 비단 옷 입고 밤길 걷기다. 결국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 이 말이라. 그러니까 남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니가 인덕이 없어서 그런기라. 상대가 나쁜 것이 아니고 니가 덕이 없어서 그렇다. 니는 힘들게 시갓집에 손발이 닳도록 열심히 해주고 있지만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이다. 내 말 맞제.”

하는 말에 내 속마음을 남편에게도 말한 적 한번 없는데, 시집살이 하는 새댁 마음을 어찌 이렇게 잘 아는가 싶어서 자신도 모르게 난생 처음 보는 초대 회장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맞십니더, 맞습니더.”하자

그래, 그 사람들이 나쁜 것이 아니고, 니가 인덕이 없어서 그렇다. 인덕이 있는 사람은 절대 안 그렇제. 그러니까 한 번 잘 다녀봐라. 다녀보면 될끼다.” 그러면서

너거 집에 농사 많이 짓제.” 많이 짓는다고 하자,

다른 거는 시집 살면서 안되는 기고, 니가 밥을 하니까, 쌀을 조금 떠내가지고 월차제때 하든지, 조석으로 올리는 신미를 하든지 한 번 단디 해봐라.”는 마음 작정을 시키셨다.

시키는 대로 몇 개월을 하고 나니까, 사흘을 못 넘기고 아픈 사람이 열흘만에 아팠다가, 한 달만에 아팠다가, 일 년에 한 번, 그러다가 나중에는 통증이 오는 횟수가 길어지더니 그 길로 차츰 수호를 받았다.

아픈 사람이 수호를 받았으니까 얼마나 즐거웠는지 여자 혼자서 3킬로미터쯤 되는 길을 하루도 안 빠지고 조석근행을 다니는데,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면 여자 혼자서 더구나 가는 길에 공동묘지도 있었는데.

초대 회장님은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늘 그런 식이었다. 그 사람 마음을 들여다 본 것처럼 죄다 이야기 해 주었다.

 

첫 만남

 

나는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던 조카들과 함께 살았었다. 어머니는 손자들이 병으로 고생을 하자, 무당을 데려와서는 굿을 했다.

1960년대만 해도 시골에서는 의사보다는 무당이 아무래도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시골에서 자랐지만, 공부를 조금 했다는 이유만으로 미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면사무소에서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니 굿 준비에 온 집이 난리였다. 집사람은 천리교를 다니고부터는 굿하는 것을 참 싫어했다.

저녁밥상을 들고 들어오는 집사람에게, ‘그래, 천리교를 믿어 굿을 싫어하는 그건 참 좋네. 어머니께서 굿을 하든 말든 모른 척하고 우리는 그냥 누워잡시다하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큰아들과 한편이 되어 큰며느리가 초저녁에 누워 자버렸으니, 어머니는 신경을 돋우다 돋우다 새벽에 갑자기 미쳐 버렸는데, 옷을 훌훌 벗고서는 새끼줄을 꼬아 만든 빨랫줄을 타고 올라가서는 옥황상제가 지금 현재 내려와서 지금 하늘로 올라가는데 네 이놈들하며, 보이는 사람마다 네 이놈이라 했다.

주위에 있는 누구를 봐도 욕을 해대는데, 굿하는 사람들이 다 놀라서 굿하다 말고 다 내팽개치고 도망을 칠 정도였다. 굿하는 새벽에 그런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어머니 고함소리에 놀라 밖을 나온 나는 무심결에 그 광경을 보았다. 당황스럽고 놀란 나는 어머니께 싹싹 빌고서 조용히 옷을 입혀 안방으로 모셨다. 그리고는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러 다녔다. 침을 맞아보라는 말에 여기저기 알아도 보았지만 어디에도 침을 놓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그냥 닷새가 지나갔다. 그때 나를 집사람이 꼬드겼다.

여보, 천리교에 가야 어머니 문제가 해결되지, 그렇지 않으면 해결 될 때가 없소.”

그러면 이 미친 것도 가면 된다 말이가?”

가 보면 알거아이요.”

추곡검사 때문에 근 1년간을 교회에 보내지 않았던 때라 어렵게 집사람이 교회이야기를 건넸다.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너무 달랐다.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그래 우찌 데려 갈거고. 저렇게 날뛰는데.”

동네매를 맞으면 정신이 돌아온다고 해서 동네사람들이 다 모여 이 사람이 한번 때리고 저 사람이 한번 때리고. 그때 어머니 나이가 53세였다. 이 사람이 주먹질을 하고 저 사람이 회초리로 때려 얼굴이 퍼렇게 멍든 모습을 보려니까 자식된 도리로 무슨 이런 일이 있는가 싶었다.

알고 보면 굿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밤새도록 우리들 때문에 혼자서 열을 올린 때문이다. 이 년놈들이 조카가 아파 이렇게 바깥에서 난리(굿)를 치는데도 방안에서 나와 보지도 않는다고 심술을 부리다가 그만 신경이 올라버린 것이다. 잘못은 분명 우리에게 있었다. 미치게 만든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머니를 미치게 만들었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이라도 꼭 낫게 해야만 했다.

그러나 미친 사람을 어떻게 해서 고성교회로 데리고 갈까 막막했다. 그런 게 여자들이 퍼득 아이디어 내는 것은 남자보다 한참 낫다.

그때 외숙모가 통영에 있었는데, 집사람이

그래, 통영 외숙모에게 가자 하며는 분명 순순히 따라 나설 것입니더.”했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해 보자. 차만 태워가지고 가다가 고성에 가서 억지로 끌어내려 교회만 들어가면 되니까, 그래 해보자.”

대화만 들어보면 무슨 군작전 같지만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어머이, 저기 통영에 있는 외숙모한테 한번 가봅시더. 가 본 지 오래되었는데...”

오냐, 그라자.”

거의 1주일을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도 기운이 어디서 그렇게 나오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러면 어머이 머리라도 감고 갑시다.”하고 물을 데워 드렸더니 혼자서 머리를 감고와서는 머리를 빗겠다며 거울 앞에 앉는 듯 하더니 털썩 쓰러졌다.

숨 죽음 파김치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힘이 펄펄 했는데... 그러나 그런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축 늘어져 있는 어머니를 끌고 가다기피 해서 버스 타는 데까지 갔다. 택시가 자주 있는 도시도 아니고, 한참을 가디리다 완행버스를 탔다.

다행히 고성 갈 때까지 일어나지 않던 어머니를 내가 어머니 다 왔습니다. 여기서 내립시다.”하고 흔들어 깨우니까 벌떡 일어나더니 버스에서 혼자 내렸다.

이쪽으로 들어갑시더.”하니까, 아무 저항(?)없이 교회로 잘 따라왔다. 마침 그때 초대회장님이 교회에 계셨다. 말로만 듣던 초대회장님을 그때 처음 만났다. 나를 보면서 하신 첫마디가

부모가 병이 나면 자식이 부모의 병을 고칠 의무가 있고, 자식이 병이 나면 부모가 자식의 병을 고칠 의무가 있제.”, 그렇습니다.”

부모가 병이 났으니까, 더구나 너거 어머이는 신경질환으로서 정신을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기고, 니가 정신 써가지고 너거 어머이 병을 나사바라.”

, 그렇게 하려고 안왔습니꺼.”

이렇게 대답을 하고는 물러나왔다. 천리교 교리에 대해서는 일체 말씀이 없으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흔히 저지르기 쉬운 것이 처음 오는 신자들에게 교리를 억지로 주입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대회장님은 절대 그런 법이 없으셨다. 언제나 시간을 두고서 차츰차츰 천리교에 물들게(?)하는 남다름이 있었다.

그날 하루저녁을 어머니와 같이 자고, 다음날 이불하고 식량하고 가지러 나온다고 교회를 나와 집에 와서 이것저것을 챙기고 있는데, 어머니가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더구나 어머니는 내 혼자 거기 뭣하러 있을꺼고. 교회 갈꺼면 내가 요기서 다니면 되지.”하는 말에 기가 막혔다. 할 수 없이 그라면 그리 합시더.”하고 저녁에 갔다가 낮에 왔든가, 낮에 갔다가 다음날 아침에 왔던 확실치는 않지만, 한 열흘 동안 그렇게 교회를 다녔을까.

그 이후로는 아무렇지가 않았다. 신기하긴 했지만, 어머니의 가르침이 낫고나서부터 또다시 나는 고성교회를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혹이 하나 더 붙어 어머니께서 틈만 나면 함께 교회에 가자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일 때문에 조석근행은 물론이고 낮에 하는 월차제에도 갈 수가 없다며 변명을 늘어놓자, 부인회(그때는 교조제라 했다)라도 가자고 했다.

그때는 부인회를 저녁에 지냈는데, 교회에서 누워자고 아침에 면사무소로 바로 출근하면 된다는 논리였다. 어쩔 수없이 억지춘향이 격으로 한동안 고성교회 부인회를 다녀야 했다.

 

포교작정

 

그때가 1962년쯤 될 것이다. 그동안 하던 면사무소 일을 집어치우고, 정치운동이나 하는 재향군인회 분회장직을 소일거리로 하고 있을 무렵이다.

하루는 어머니가

야야, 요번에 교회에서 참 좋은 기회가 있어 거기에 너를 신청해 놓고 왔다.”

밑도 끝도 없는 어머니 말에 나는

뭘 말입니꺼?”하고 물었다.

저기 다른 데(진해) 가서 할 거를 이번에는 고성교회에서 한다고 하데, 그래 맞다. 순회강습회라 하더라. 그 신청서를 내고 왔다아이가. 우리가 이왕에 천리교를 믿을라 하면 너거 처가 글을 아나, 내가 글자를 아나, 니는 글을 잘 아니까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말고 다들 주위에서 시키라고 해서 니 이름 올려놓고 왔다.”

아이고, 어머이 괜한 짓을 했네요. 내가 거기 갈 시간이 어디 있습니꺼.”하니까

아침 9시에 시작해서 오후 1시에 끝난다고 하니, 니 볼일은 저녁때 보면 안되나.”했다.

괜한 짓을 해놓고는 자꾸 권하는데, 나중에는 내가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자유인인데, 효도하는 셈치고 한번 해보자 싶어 다녔다.

그래서 통학 강습을 받는데, 그때는 지금처럼 좋은 교리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신악가 하나뿐 이었다. 그런데 한 달을 다니고 나서도, 팔수 손춤을 집에 와서 혼자 해보니 영 되질 않았다.

그때 내 나이라 해본들 30대였다. 이제 두 달만 지나면 선생이라는 명칭이 붙는데, 누가 손춤을 물어보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월차제 때, ‘공선생, 상단에 올라가서 손춤하소.’ 누가 이렇게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속으로 이래가지고는 안되겠다.’싶었다. 앞으로 두 달 남았는데, 다른 것은 글을 쓸 줄 아니까 다 노트에 받아 적어두면 되지만, 손춤 이것은 실제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보니까 지금 해두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배울 수 없다는 생각에 걱정이 슬쩍 되었다.(그때는 지금처럼 손춤교본이 따로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집에서 천천히 내 혼자 익힐 수도 없었다)

그게 걱정이 되어 결국에는 양식을 싸 가지고,(그때 쌀 20되를 가지고 가면 먹고 자고 배우고 했다) 고성교회에 던져 놓고는 기숙 강습을 받았다. 그때서야 겨우 선생들 이야기하는 것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데, 지난 한 달은 헛것 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달 동안에 옳은 교리가 사정없이 들어오는데, 수료를 하고 나니까 아이고, 참 사회에서 헛것 살았구나. 나는 남한테 여태 죄지은 것은 없지만, 내 인연을 모르고 헛것 살았구나. 그야말로 멋모르고 깨춤(?)을 추었구나는 생각에 밤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강습동안 저런 마음을 쓰니까 저런 신상이 왔다는 인연풀이를 조금 듣고 나니, 천리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 신상과 사정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까, 모든 것을 훤하게 알 것만 같았다. 틀림없는 길이다 싶어 전도를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누구도 근행보라는 말이 없었지만, 수료해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때 우리집이 3칸집이었는데, 가운데 방에서 저녁이 되면 식구들 전부 앉으라해서는 근행을 보기 시작했다. 신님을 모시지 않았고 신자도 없었지만, 그 당시만큼 즐거웠던 적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상리에 강습 동기생이(도천교회 소속) 포교를 나온다는 소리에 얼마나 좋아했던지 모른다. 조그마한 방을 하나 얻어가지고 포교를 나왔는데, 신도들이 그 때만하더라도 많이 모여드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산에서 나무를 베어 방 한 칸을 더 만들 정도로 그때는 지금보다 전도가 쉬웠다면 쉬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 당시만 해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아들지상주의자들이 많았다. 우리 부모도 예외는 아니었다. 딸만 연달아 다섯을 낳자, 이제나저제나 하며 아들을 원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아들 하나를 주셨는데, 8개월만에 뇌막염으로 고성교회에 보냈다. 숨이 끊어진 애기를 홑이불에 덮어 놓고 매정한 아버지라 욕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삽들고 히노끼싱을 하러 나갔다. 삽들고 히노끼싱을 하고 있는데, 고성교회 노할머니가 내 뒤에 와서,

공서기, 일이 눈에 비나. 방금 아가 죽었는데, 머슴아가 또 있는 것도 아니고, 딸 다섯 다음에 아들 하나 낳아, 8개월을 옥이야 금이야 하고 길렀는데, 그 죽은 것을 눕혀 놓고.”

할매, 내 자슥이요. 천신님 자슥을 천신님께서 데려갔는데.”

그래, 그래, 그래.”하며 위로를 해주셨다.

그날 밤에 초대회장님께서 가만히 부르셨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말씀을 해주셨다.

키워놔본들 니한테 애먹일 자식이라, 니가 신앙을 열심히 하니까 일찍 데리고 간기라. 하지만, 니가 지금 하는 평신앙 가지고는 올바른 자식 얻기가 힘이 들끼다.”

결국 평신앙을 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포교를 나가야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우리집 가정 형편에 내가 포교를 나갈 형편이 도저히 안 되었다.

할머니, 아버지, 여동생, 남동생에다 내 밑에 애들이 다섯이나 있었으니, 부양가족만 열 명이 넘었다. 포교 나갈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초대회장님 그 말씀 한마디에, ‘맞다, 동생한테라도 맡겨놓고, 단지 아들을 얻을 거라고 나갈 것이 아니고, 이 집안의 운명을 바꾸자는 마음으로 포교작정을 했다.

 

 

* 올해 입교175년은 고성교회가 포교 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입니다. 그래서 지난 5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책 오직 근행뿐이야를 조금씩 나눠 싣고 있습니다. 이영수 초대 회장님을 그리며 으뜸하루를 되새겨서 한 걸음 더 성인하기를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