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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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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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초대회장님5

 

남을 도와야..

 

한한수 선생 구술

남상우 기록

 

아버지는 위궤양 때문에 젊을 적부터 고생을 했는데, 하루는 나를 부르더니, ‘천리교라는 데 가면 무슨 병이라도 다 낫는다는데, 내일 그 곳에 가서 몇 달 간 수양을 좀 하고 오려는 데 니 생각은 어떻노?’하고 물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종교라 내심 걱정은 되었지만, 아버지가 좋아진다는 데 자식된 입장에서 어쩌지를 못하고 ,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하고서는 몇 달 간 갔다 온다는 소리에 이것저것 준비를 했다.

그때만 해도 먹을 것이 귀한 때라 아버지와 내가 먹을 밥값 정도는 가지고 가야 되지 않겠나 싶어 보리쌀과 장작을 싸들고서 아버지를 뒤따라간 것이 천리교, 아니 고성교회와 첫 만남이다.

1959423, 그때만 해도 고성교회가 옥골에 있었는데 내 나이 그때 18살이었다. 천리교라고 찾아가 보니, 폐가나 다름없는 초가집을 사서 재작년에 교회 역사를 했다고는 했지만, 볼품이 없었다. 5,60명 정도가 수양을 하고 있었는데, 건강한 사람이라고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신상이 있든 없든 간에 그 좁은 데 다 같이 기거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이지 여기서 무슨 병이 낫겠나 싶었다. 오히려 병이 더 들면 들었지, 나아서 돌아가기는 틀렸구나 싶을 정도로 영 형편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버지 성품에 허튼 소리를 듣고서 오실 분이 아니다 싶어 아무 말 없이 신상자들과 뒤섞여 하룻밤을 보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어제 분명 날씨가 좋지 않아 신고 갔던 하얀 운동화가 온통 진흙투성이었는데, 아침에 신으려고 보니 신발이 깨끗하게 씻겨 있었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눈을 씻고 봐도 주위에 건강한 사람이라고는 나 혼자밖에 없었는데, 이 중에 누군가가 내 신발을 이렇게 깨끗하게 해 놓았나 싶어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이 조그마한 친절(?)이 결국에는 나를 천리교로 인도했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3일째 되던 날은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신경을 곤두세워 지켜보았다. 밤 한 12시쯤이 되었을까. 같은 방에서 자던 몇몇 분이, 남들이 깨지 않게 살며시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나이 드신 분들이라 소변이 마려워 변소에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10여분이 지나도 들어오는 기색이 없었다. 하도 이상해서 귀를 쫑긋 세워 들어보니 방문 앞을 왔다갔다 하는 인기척이 들렸다.

문을 빠끔 열어 바깥 동정을 살펴보았다. 희뿌연 사람 그림자만 몇 몇 보이는데, 물을 길어오는 사람, 변소청소, 신전청소들로 다들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야심한 밤에 일을 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누군가 시켜서 한다면 다 같이 해야 하는데, 방에서 그냥 누워 자는 사람은 편안히 자고 있고, 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매일 정해진 청소 당번이 있어 하는 걸까하고 달리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아침 일찍(?) 일어나 부산을 떨 필요까지 없을 텐데 라며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던 몇 켤레 신발을 들고 가는 게 보였다.

말이 쉽지, 매일같이 자기 신발도 아니고 남의 신발을 깨끗하게 씻어 신발주인이 새벽에 신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불가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말리는 일은 보통 정성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다.

그때 문득 느낀 것이 저들이 저렇게 불편한 몸을 가지고도 남을 돕겠다고 잠을 설쳐가며 저렇게 애를 쓰는데, 나는 허우대가 멀쩡해가지고 저들의 도움을 받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천리교의 천()자도 몰랐던 나는 그날 아침 근행을 마치고 초대회장님이 하셨던 남을 도와야 제 몸 도움받는다는 말씀 한마디가 이제까지 내가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보게 했다. 교리 한마디가 교회를 찾아오는 그들의 몸과 마음을 바꾸게 했던 것이다.

115세 정명(定命)

 

어느 날인가 월차제가 끝난 뒤, 초대회장님께서 신전강화 중에 이 구제 115세 정명으로 하고 싶은 한결같은 신의 마음이라는 친필구절을 이야기하셨다.

그 당시 65세까지만 살아도 장수했다 하는 세상인데, 115세 인간 정명(定命)으로 한다는 친필 구절은 솔깃했다.

자연스럽게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큰 차도가 없었다. 더구나 집에 아들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어 집안사람들이 아픈 애비 혼자 두고 천리교에 미쳐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젊을 때 한푼이라도 돈을 더 벌어 형제(16)와 병든 아버지 공양이나 해라며 다들 한마디씩 거들던 때였다.

교회에서 아침을 먹고 잠시 쉬고 있는데, 아버지가 위급하니 집으로 빨리 오라는 전갈이 왔다. 가보니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초대회장님께서 신상자들에게 전하는 수훈을 주의 깊게 본 기억이 있어 급한 마음에 그것을 흉내 내어 아버지에게 전했다. 그리고 그 길로 큰집으로 가서 큰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아무래도...”그리고 돈 가진 게 없어 그러는 데 혹시 장례비용으로 필요할지 모르니 3만원만 있으면 빌려 주십시오.”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다.

큰 아버지가 주시는 3만원을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번에는 어머니에게 아버지 장례때 사용하려고 준비해둔 삼베를 달라고 했다. 돈과 삼베를 들고 교회로 향했다.

가는 길에 포목상에 들러 삼베를 단돈 6백원에 팔았다. 저녁에야 가까스로 교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신전 상단에 36백원을 올려놓고서 기원근행을 올렸다. “천신님께서 115세를 인간 정명으로 하고 싶다고 하셨다는 데, 제 아버지는 이제 갓 쉰을 넘겼습니다. 아버지 명이 모자라면 제 명() 20년을 떼어 보태서라도 살려주세요. 살아계셔야 저도 부모에게 효도하는 날이 있을 것이고, 집안사람들에게 천신님 누명을 벗기는 날도 있을 게 아닙니까. 그리고 아버지 장례를 치룰 돈도 없습니다. 이것으로 아버지의 장례는 치룬 것으로 하겠습니다.”며 한참을 울먹였다.

그때였다. 신전 저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초대회장님이셨다. 초대회장님은 누가 신전에서 울고 있자, “거기 누고?”하고 물어보시더니, 나를 확인하셨는지 첫 말씀이 아버지 괜찮을 끼다. 울지 마라, 다 알고 있다. 집에 가 봐라.”하셨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는 안됐지만, ‘이제 괜찮을 것이다는 그 말씀 한마디만을 의지한 채 집으로 향했다.

1시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대문을 막 들어서는 데, 이제나 저제나 하며 대문간에서 애들 태우며 기다리던 어머니가 내손을 잡으며 여태 어디 갔다 이제 오노. 무슨 영문인지 아버지께서 한참 너를 찾으시다가 조금 전에 잠드셨다.”했다.

신기하게 초대회장님의 말씀대로 그 다음날부터 아버지는 뚜렷하게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기원보다도 더 많은 22년간을 건강하게 사시다가 76살이 되던 해에 출직하셨다.

 

더 이상 뭘 바라노

 

고성교회 청년근무를 하다 대한의 건아라면 누구나 간다는 군대를 갔다. 군대를 무사히 마치고 제대 인사차 초대회장님을 찾아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도 해, 흔히들 말하는 인연판단에 대해 처음으로 여쭈었다.

많은 기대를 하고서 어렵게 물었는데,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밑도 끝도 없이 지금 하는 대로 그리하면 된다.’는 말씀 뿐이셨다. 그 때 생각에 어째서 나에게만은 속 시원히 이야기 해주시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초대회장님의 인연풀이는 천리교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인근에서 사람이 찾아올 만큼 꽤 유명했다. 그래서 그런지 의학과 과학이 뒤떨어져 있던 때라, 조석근행에 수훈을 받겠다는 신상자와 인연판단을 한번이라도 들어보겠다는 사람들로 늘 넘쳐났다.

인연판단을 들은 신상, 사정자들은 각자의 인연을 깨닫고서, 생전 해본 적이 없는 냉수목욕에다 꽁보리밥과 된장국 한 그릇에도 즐거워했다. 그것이 차츰 신기한 수호와 구제로 이어졌다.

온 가족을 괴롭히던 환자 본인이 초대회장님께서 말씀하신 인연판단을 통해, 오히려 나 하나로 인해 온 가족이 욕을 본다는 사실을 진실로 자각함으로써 감사함이 저절로 우러나오고 그것이 바로 구제로 이어진 것이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서도 내 눈을 의심했던 신기한 수호를 참 많이 봤다.

그렇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현실은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질 않았다. 한창 일할 나이에 교회만 있다고 여기저기서 수군덕거리는 것도 그렇고 해서 인연판단은 못 들은 것으로 하고서 한동안 사회로 돈벌이를 하러 나갔다.

그동안 결혼도 하고 부지런히 일을 한다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26살 되던 해부터 3년간 하는 일마다 꼬이기 시작하더니, 빚도 빚이지만 결국에는 건강까지도 안 좋아지게 되었다. 29살 되던 추석날, 내 발로 초대회장님을 찾아갔다.

회장님, 지난 3년간 하는 일마다 마음대로 안 되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초대회장님께서 안 죽고 살아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더 이상 뭘 바라노.”하셨다.

처음에는 그 말뜻을 몰라, 되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묻기도 뭣하고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혼자서 생각을 했다. ‘그럼 내가 지금 죽을 운명인데, 이렇게 해서 지나가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살아있는 것만 해도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는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쯤 끝날지는 나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숙제였다. 8,9개월이 지난 어느 날, 도저히 참다못해 초대회장님을 다시 찾아뵈었다.

방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인자 가서 아무거나 다시 해 보라모.”하는 한마디 말씀뿐이었다.

그길로 사업이고 뭐고 간에 내 마음 먹은 대로 척척 되어지는 데 그동안의 빚도 모두 갚고 전답까지도 샀다. 그야말로 이렇게만 벌면 금방 부자소리를 들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초대회장님의 말씀 한 마디 한마디가 가난, 몽매한 우리들에게는 늘 크나큰 힘이 되었다.

 

포교 약속

 

고성교회에서 천리교를 먼저 알았지만, 저산(통영시 도산면)에서 생활의 터전을 잡고 있다 보니 신앙은 저산포교소에서 했다.

그때는 나뿐만 아니라, 신자 누구나 집 가까이에 있는 포교소에서 신앙을 키워나갈 때다. 그쯤 결혼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이 그렇게 급했는지 연년생으로 딸 둘을 낳았다. 그 때쯤 저산 초대 선생(한만우)이 출직했다. 그 초상을 치르고 잠시 쉬려고 집에 돌아오니, 며칠 전부터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과 초상 때문에 병원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딸 둘 모두가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지금처럼 의료시설도 흔하지 않은 때라, 급한 김에 수훈이라도 받아볼 심산으로 아픈 딸애들을 업고 초대회장님을 찾아갔다.

딸 둘을 보시고서 초대회장님의 첫마디가 난데없이 내 수훈하고 니 포교 작정하고 바꾸자.”하셨다. 포교소를 내 혼자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집사람도 도와줘야 하는데 하는 인간 생각으로 선뜻 결심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평생 화를 모르고 사시던 초대회장님께서 막무가내로 고함을 버럭 치시며 사람 목숨이 촌각을 다투는데 니 지금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하노.”하셨다. 그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어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수훈을 받았다.

수훈을 전하고 두 손을 내려놓으시면서 큰 딸은 안 될 것이다. 작은 딸은 잘 몰라도...”하셨다. 큰 딸은 그날 밤을 못 넘겼고, 작은 딸은 그 다음날 저녁에 출직을 했다. 연년생 딸(3살과 2)을 정월 초하룻날과 초이튿날 하루 간격으로 저 세상으로 보냈다. 무슨 놈의 팔자가 하나도 아니고 둘을 같이 보내나 싶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쯤, 65기 고성교회 순회강습이 있다고 해서 부부 함께 강습을 받았다.

강습을 받고서도 한동안, 초대회장님과 딸아이 때문에 얼떨결에 한 포교 약속을 모른척하고 지냈다. 젊은 나이에 고향인 저산에서 포교를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들 집안 어른들이고 누구보다도 나의 장단점을 꿰뚫고 있는 그들에게 포교, 전도를 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무리였다.

좋은 점보다는 그야말로 애로와 제약이 더 많았다. 하지만 결국에는 초대회장님한테 했던 그 약속을 차일피일 미룰 수도 저버릴 수도 없고 해서 포교를 시작했다.

사람이 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은 리의 끈으로 칭칭 동여매어져 있는 초대회장님과의 약속은 참으로 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단노는 잇는 리

 

초대회장님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 초대회장님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보통사람은 흉내도 낼 수 없는 강인한 정신력에서 비롯되는 냉수목욕과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근행일 것이다.

오랫동안 곁에서 모시지는 않았지만, 둘 다 하루라도 등한시하고 빠트리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늘 그야말로 한결 같았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여느 교회장처럼 전도를 부지런히 다니는 모습을 보인 적은 그다지 없으셨다. 오로지 순교와 인연풀이, 그리고 시간이 잇을 때마다 텃밭 가꾸는 히노끼싱에다, 조석근행과 밤1시에 하는 기원근행, 냉수목욕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이것만으로 지금의 고성교회가 이룩될 수 있었을까?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나의 답은 글쎄요?”를 벗어날 수가 없다. 초대회장님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셨다.

항상 자신에게 닥친 일들을 순직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자세인 단노였다. 항상 부족은 끊는 리, 단노는 잇는 리라 말씀하시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셨다.

어느 땐가 철성 이씨 집안 사람들이 고성교회로 쳐들어온(?) 적이 있었다. 이유인즉슨, 옥골은 예부터 철성이씨가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는데, 고성교회가 195310월 고성군, 고성읍 서외동(일명 옥골)에 초가집을 매입, 10년 만에 교회역사를 두 번이나 해가며 나날이 번창하자, 천리교를 이렇게 놔두었다가는 자신들이 옥골을 내주고 나가야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천리교가 불티일 듯 일어나자 시샘이 났는지, 이사 갈 것을 종용하러 떼로 몰려 왔던 것이다.

몇날 며칠을 그들이 죽치고 앉아서 시비를 걸었지만, 초대회장님은 눈만 지그시 감고 묵묵히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보통의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10년 전에 내가 돈을 얼마를 주고 샀는데, 세월이 이만큼이나 흘러 지금 와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하소연이라도 할 법한데, 그 수난(?)을 혼자서 감당하셨다.

그리고 산하 누구에게도 생전에 , 그러면 안 돼. 이렇게 해.’하고 몰아세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셨다. 누구야. 이렇게 한번 해 보지하고 언제나 권유를 하셨다. 그 말씀이 그때 그 당시에는 인간생각으로는 도저히 맞지가 않았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을 해 볼 때, 산하 선생 누구나 초대회장님의 말씀이 천번 만번 옳았다고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초대회장님이 출직하신지 겨우 26, 과연 우리들은 얼마만큼이나 초대회장님의 본보기를 쫓으려 했는지, 그리고 신자들에게 얼마나 정성을 다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길을 걷는 누구든지 초대회장님의 발자취를 흉내내고 뛰어넘은 신앙인이 되려고 해야지, 초대회장님의 본보기(햇빛)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신자들에게 단순히 비춰주기만 하는 거울 같은 신앙이 되었다가는 그 교회의 명()은 끝났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교회의 심()이 되는 교회장은 그래서 리()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든 아흔 먹은 늙은이도 손자뻘되는 젊은 교회장에게조차도 회장님하며 절하고 따르는 것이 아닐까.

 

 

 

 

* 올해 입교175년은 고성교회가 포교 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입니다. 그래서 지난 5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책 오직 근행뿐이야를 조금씩 나눠서 다시 싣습니다. 초대회장님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