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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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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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초대회장님4

 

도깨비불

 

도천교회장 최동명 구술

남상우 기록

 

교회가 성장하는 데 있어 교회의 심()은 누가 뭐라 해도 교회장이다. 신상, 사정자들이 구름처럼 몰리는 교회를 가보면, 찾아오는 사람을 차별없이 그리고 빠짐없이 구제하고 말겠다는 교회장의 강한 의지와 성진실(정성)이 살아 숨쉬고 있다.

지금은 다르지만, 고성교회의 포교초창기만 해도 천리교가 도대체 어떤 종교이기에 신상, 사정에 괴로워하는 저들을 수호해 주나 싶어 호기심반 기대반으로 교회를 기웃거리는 사람이 참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고성교회에는 조석근행을 보러오는 사람이 많았다. 읍내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리 인근에 산다고 하더라도 걸어서 오려면 1,2시간씩은 족히 걸렸다. 새벽 일찍부터 서둘지 않으면 근행시간에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은 고성도 발전을 하여 구석구석을 가더라도 길가에 가로등이 있어 캄캄한 밤에 혼자 걸어 다녀도 전혀 불편함이 없지만 4,50년 전만해도 동지섣달 조석근행을 보러 가려면 여자 혼자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십여명 이상이 모여 각자 손에 호롱불 하나씩을 들고서 조석근행을 보러 오는 것이었다. 캄캄한 새벽, 저녁녘에 논두렁 사이를 일렬로 걸어오는 관경은 그야말로 불꽃놀이 이상 가는 장관이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도깨비불처럼 사람 걸음따라 호롱불이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지금도 겨울들녘을 보면 그때가 아른거린다. 아침, 저녁을 가리지 않고 이 광경을 흔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인지 한 때 오죽하면 고성군민 모두가 천리교 신자라는 말이 있기까지 했을 까.

하지만 그 뒤에는 상상할 수 없는 초대회장님의 남모르는 구제노력과 정성이 있었다. 어디를 가더라고 빼놓지 않는 조석근행에다 아무리 추운 한겨울이라도 냉수목욕 후 하는 밤1시 기원근행을 그분만큼이나 오랫동안 지독하게 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또 신상자가 있어 위급한 날이면 한밤에 몇 번이고 기원근행을 올렸다.

이길에서 용재라면 근행을 철저하게 보는 것이 당연하지만, 한겨울 밤에 하는 냉수목욕은 상상 이상이다. 지금은 기상이변이다 뭐다 해서 겨울이 되더라도 저녁 내 받아둔 물이 꽁꽁 어는 매서운 추위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틀면 쏴악하고 나오는 수돗물이 없었던 때라, 얼음을 깨가며 찬물을 뒤집어쓰는데 금방 머리카락에 고드름이 주르르 달렸다. 그것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안 빠지고 하셨다.

바로 이처럼 신상, 사정자들을 구제하려는 정성의 리 만들기를 출직하는 그날까지 몇 십 년이고 간에 꾸준하게 일관되게 했으며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셨다.

그래서 그때는 교회장이라는 리의 높고 무거움을 교회장 누구에게나 체득(體得)하게 했다. 그러나 요사이는 실천보다 말이 앞서다 보니 교회장이라는 리의 높고 낮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듯하지만, 정작 리의 무거움을 아는 사람은 퍽 드물다.

 

 

자식은...

 

초대회장님은 19111014(음력) () 이승윤씨와 모() 윤옥이씨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런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어머니의 자식사랑이 참으로 남달랐다. 하지만 아들이 어머니를 생각하는 그 정()도 상상 못할 정도로 대단했다.

초대회장님은 어머니보다 먼저 잠자리에 드는 날이 없었다. 어머니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찾아뵙고 불편함은 없는지 어떤지를 손수 확인한 뒤에야 잠을 청했다. 그리고 바깥 나들이를 할 때나 어디를 다녀온 뒤에도 언제나 들러 어디를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왔습니다.’하는 인사를 잊지 않으셨다.

그런 효의 근본을 신앙과 연관시키든 어떻든 간에 남달리 그렇게 한 데는 그 분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1927(당시 17), 홀어머니와 초대사모님(최필이)만을 한국에 두고서 일본에 가서 돈을 크게 벌어오겠다며 집을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 한다.

그렇다보니 초대사모님은 고사하고 늙으신 홀어머니를 고생시킨 것이 항상 마음에 맺혀 있었던 것이다. 먹고 사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하지만, 이길을 아시고 부터는 그것이 큰 불효였다고 깨달으셨던지 그 인연을 끊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쓰셨다.

언젠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자기 방의 한쪽 벽을 향해 감사합니다하고서 큰절 하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나는 처음에는 신전을 향해 절을 드리는 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수수께끼 같은 행동을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불효에 대한 깨우침이 남달랐던 초대회장님은 자식(31)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자 자신을 깨우치게 하는 스승이다라고 평소에도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아이들 방을 향해 남몰래 절을 하시며 불효의 참회를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고성교회 초창기 신자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지만, 초대회장님 부인의 잔소리는 유명했다. 그래서 용재들 사이에서는 툭하면 뎅뎅거린다하여 양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부인이 한참 긁어대기 시작하면 슬며시 교회 아래에 있는 밭으로 걸음을 옮겨 채소나 가축 키우는 데 정신을 쏟으셨다.

어느 땐가 그곳까지 따라와서 해대는 바가지에도 어디 한번 같이 말다툼을 하거나 성내신 적이 없으셨다. 언제나 유연하게 대처하셨다. 이 점만큼은 내가 여러 골백번을 다시 태어나 신 벗고 따라도 다 못 따를 것이다.

 

 

어버이 같았던....

 

이길의 선배선생들은 신상이나 사정에 휘말려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일렬형제를 위하여 단지 정성이라는 유일한 무기만을 가지고 덤벼들었다.

남을 도와야 제 몸 구제받는다는 가르침에 따라 거침없이 뛰어든 강한 의지가 오늘의 천리교를 이룩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교리가 아니라, 선배선생들을 통해 먼저 보았다. 원남성 초대교회장(최재한)을 통해서는 전도, 포교를 위한 용기를 배웠으며, 초대회장님한테서는 어버이같은 따스한 인정과 어짐을 배웠다. 그리고 충무초대교회장(김철암)절제(절약)’를 몸소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 배움도 잠시, 1976413일 향년 66세를 일기로 초대회장님은 우리들 곁을 떠나셨다.

출직 당시를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져 지금도 주체할 수가 없다. 장남인 고성 2대교회장(이병석)하고 내가 연배라 그런지 특별나게 초대회장님은 육친의 어버이 같은 따스한 정을 나에게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초대회장님 주위는 늘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언제나 들끓었다. 하지만 풍요 속에 빈곤이라 했던가. 정작 초대회장님을 다독거리고 어루만져 줘야 할 옆자리는 언제나 비어있었다.

그런 이유로 초대회장님에게는 출직할 때까지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걱정거리가 있었다. 바로 이길에 대한 것이었다. 바로 그 당시가 해방이후 처음으로 겪는 교단의 혼란기였다.

따라서 그 당시 전국에 약 250여개소의 구제장소를 거느리고 있었던 그로서는 그야말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원남성교회 역사(부산 동삼동) 시순은 리 세움, 리 나름(나르기, 다하기)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야 했던 초대회장님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초대회장님 특유의 너그러운 성격은 이런 내우외환(?)에서 오는 압박감을 오히려 밖으로 발산하지 못하게 가로막았으며, 늘 안으로 삭이게만 했다. 옛말에 사방팔방 다 막혀있어도 하늘 한쪽은 열려 있다고들 하지만 초대회장님에게는 그마저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간암이라는 신상으로 출직하셨지만, 나는 초대회장님의 출직사유가 이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 올해 입교175년은 고성교회가 포교 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입니다. 그래서 지난 5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책 오직 근행뿐이야를 조금씩 나눠 싣고 있습니다. 이영수 초대 회장님을 그리며 으뜸하루를 되새겨서 한 걸음 더 성인하기를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