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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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년09월][12] 낮아지는 연습

2012.10.14 14:58

모모 조회 수:995

명경지수 12

 

낮아지는 연습

 

                                                                                                     박 지 수

 

지난 달부터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산 속에 살 때 좋아하는 꽃이며 나무, 숲과 산, 그리고 하늘과 구름을 그리고 싶어 했다. 내가 느끼는 이 아름다운 자연과 그 빛깔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 후로 계속 언젠가는 수채화를 배우리라는 꿈을 지니고 살아왔다. 그러나 실제로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꿈이 더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20여 년 가까이 간직하고 살아왔다는 걸 깨닫고 놀랐다. 그 증거가 수채화 색연필이다. 그것을 20여 년 전에 사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이사를 다니면서도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이라곤 초등학교 때조차 그린 기억이 희미하고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단 한번도 없는 데 왜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아름다운 풍경이나 꽃과 나무를 보면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언제나 들었다.

한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구나 다 그런 것 아닐까. 그래서 꼭 그림이 아니더라도 사진으로, 글로, 혹은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을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느끼는 것을 표현하고픈 것이 본능에 가까운 모양이다.

그렇지만 말단 포교사 형편에 미술학원은 비싸 엄두도 못 내고 문화센터에서 하는 한 달에 만원하는 교양 강좌에 등록을 했다. 등록하면서도 물감이랑 화구를 사야 되니까 돈이 많이 들지 않을까 걱정하며 망설이다가 그래도 일단은 해 보자 마음먹었다. 또 미루면 언제까지나 아쉬움으로, 다만 꿈으로만 남아 있을 테니까. 고맙게도 등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떤 분이 수채화 화구를 모두 사 주는 바람에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마음이 한껏 기대로 부풀었다. ‘오랜 꿈이 이루어지려 하고 있고 어쩌면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몇 년 전에 어느 책에서 [사람들이 평생 살면서 5가지 분야 이상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고 했다. 그 논리를 읽고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든 10년을 투자하면 전문가가 되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 때부터 막연히 꿈꾸던 것에서 수채화가가 되겠다는 씨앗 하나를 간직하게 되었다.

 

그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한 첫 걸음을 디뎠다. 마침내 그렇게 부러워하던 아름다운 자연을 망설임 없이 쓱쓱 그릴 날을 꿈꾸며.

등록하고 한 주에 한번 두 시간동안 배우러 다닌다. 처음 간 날, 선생님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앞에 놓은 벽돌과 종이컵을 그리라고 했다. 어떻게 그려야 할 지 참으로 막막했다. 스케치하는 4B 연필을 어떻게 깎고,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부터 선을 어떻게 긋는지, 명암은 어떻게 넣는지, 구도나 크기는 어떻게 잡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지만 다른 분들은 그냥 척척 그린다. 어쩔 줄 몰라 당황스러웠다.

가만히 있다가 옆 사람을 보니 오른 손을 쭉 내밀고 연필을 앞세워 물체의 크기를 재는 듯 했다. 뭔지 잘 모르면서 물어보지도 않고 나도 폼을 잡아 보았다. 한 쪽 눈을 감고 윙크하듯이 재었는데 그 다음 그것을 어떻게 스케치북 위에 적용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재기는 했는데 어쩌라고?’하는 소리가 맘속에서 들린다. 폼만 재는 내가 머쓱해졌다. 혼자서 그러는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하고 하는 웃음이 나기도 했다. 남들 그림을 보니 벌써 모양과 구도가 다 잡혀 제법 그림같다. 나만 빼고는 다 그리고 있었다. ‘참 낯선 풍경이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무것도 못해서 손놓고 있는 사람이 나라니!! 내가 사는 세상은 참으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작은 우물에 불과하구나.’하는 탄식이 넘쳐흘렀다.

평소에 하는 일이나 맡은 일이 그래서이겠지만 거의 모든 일에서 앞서서 하는 나였다. 모르면 혼자 공부를 해서라도 앞장서서 일을 추진해 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제일 뒤떨어지는 경험은 거의 전무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 우물에서 벌써 10여년이 흘렀으니 초보자, 새내기 같은 경험은 옛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림 수업에서 받은 그런 경험은 정말 유쾌하지 않았다. 낯설음, 졸아 들어 존재가 없어지는 것 같은 막막함, 자괴감, 자격지심까지.....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등록만 하고 아직 회비를 안 내었는데 그만 둘까도 싶기도 하고, 정말 재능도 없는 데 하겠다고 마음으로만 뛰어든 게 용감무쌍하기도 하다 싶었다. 불혹을 넘긴 이 나이에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고이 간직한 꿈을 새삼스레 이루어보겠다고 불쑥 덤벼들다니.... 옆에 조교처럼 보이는 분에게 조심스레 그림은 재능이 있어야 하는 거죠?” 하고 물어본다. “아뇨! 재능이 있거나 마음에 열의가 있거나 하면 됩니다.”한다. 조금 마음이 놓인다. 그래, 난 열의가 있으니까!

한편 같이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내게 어려 보인다며 동생 취급을 한다. 알고 보면 내가 나이가 많은데 내 버려두기로 했다. 너무나 익숙한 교회에서는 마음이나 나이가 어린데도 남을 돕고 배려해주는 어른 같은 입장에 서야했던 경우가 많았다. 그런 탓인지 이런 낫선 곳에 와서 배려 받는 입장이 되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를 동생으로 취급하는 데로 내 버려두기로 했다. ‘그래, 지금까지와는 다른 환경에서 살아보는 거야!’

그리고, 아무것도 몰라 당황해 하는 기분, 제일 꼴지가 되어있는 상황. 이거야말로 마음을 낮추는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사람들 앞에 서서 일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잘 하지 못하면서도 잘난 척하는 교만이 붙는다. 그리고 한걸음 물러나 볼 수 있는 여유와 객관성이 떨어지게 된다. 그 교만을 털어낼 좋은 찬스! 게다가 좁은 우물 안에서 벗어나 세상 구경을 할 수 있는 기회!!! 한편 정말 잘 왔구나싶었다. ‘그래, 이 기회를 잘 이용하자!’는 마음을 정하니 기분이 나아졌다.

그리하여 일주일에 한번씩 작은 사람으로 낮아지는 상황에 적응하면서 마음 낮추기 연습을 한다. 거기서는 모두를 그림의 선배로 존경을 보내며 평소에 해 보지 않던 여러 가지 훈련을 한다. 어버이신님이 이 곳에 보낸 것은 아마도 이런 경험으로 낮아지라는 의도이시지 않을까. 정말 낮은 자세로 배우며, 그곳에서 제일 부족한 사람으로 너무나 초보적인 질문조차 부끄럼없이 해대며 몸과 마음을 낮춘다.

그림 실력은 아주 더디게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조금씩 느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젠 명암도 넣고 선 긋기도 그런대로 한다. 물론 아직도 뎃생 초보 정도밖에 안 되지만 처음에는 사과를 그려도 감 같던 것이 이젠 정말 사과 같아 보이는 게 스스로 신기하고 뿌듯하다. 아무도 칭찬하지 않아도 스스로 칭찬하거나 주변에 칭찬을 요구하기도 하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있다.

가끔은 이렇게 작고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졸아드는 것이 싫어서 가기 싫다. 그럴 때마다 내 맘 속의 교만을 생각한다. 어버이신님이 특별히 마음 낮출 기회로 주신 선물인데 그걸 마다하며 잘난 체 하고 싶어 하는 뻔한 속마음을 들여다보면서 화구를 챙겨든다.

오늘도 낮고 제일 낮은 사람으로 그림을 그리러 간다!!! 이런 경험도 마음 성인을 이루는데 또 다른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