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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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마당

 

본부포교의 집, 나고야기숙사에서 일년

 

노기현(내성교회)

 

저는 천일교회 산하 내성교회 노기현입니다. 지금 부산에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만 교회에서 활동하기 전인 지난 몇 년 간에 걸쳐 터전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본부직속포교의 집이라고 하는 곳에서 일년간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가게 된 것을 미흡하나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망설임과 여러가지 가르침도 있던 차라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천리교어학원에 입학하게 되었고 터전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2년차 오야사또 후세코미과에 들어가던 시기부터 이상하게도 귀가 아파서 병원에 다니게 되었고 알 수 없는 터전생활의 회의와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시작하신 천리교에 대해서 제 자신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인류의 본고장인 터전이라는 곳에서였지만 괴롭고 힘든 나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다 집어치우고 한국으로 돌아갈까돌아가서 이 괴로운 신앙으로부터 벗어나 평범한 삶을 살수 없을까라고 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고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힘들고 괴로운 날들 속에서 벗어나게끔 해 주신 건 역시나 부모님과 주위의 동료들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한국의 교회에서 약과 함께 편지로 위로해 주시며 "이 괴로움과 시련은 신님이 주신 마디이며 이것을 단노와 히노끼싱, 그리고 주위의 몸이 아픈 사람들에게 수훈을 전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전 반신반의의 마음으로 나름대로 수훈을 전하게 되었고 제 몸이 아픈 상태에서도 다른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제 마음은 우울한 날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거의 일년간을 지치고 힘든 날들이 흘러갔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본부생활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같이 들어간 동기였던 배성상씨 -현재 한국청년회 위원장-한테서포교의 집이라는 곳이 있다는 걸 듣게 되었고 같이 도전해 보자는 제의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때까진 외국인이 터전이 아닌 다른 지방에 있는 포교의 집에 들어간 적이 없었습니다. 일년간 젊은이들이 오직 포교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이전에는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나같이 마음 약하고 신앙심 없는 사람도 포교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구나" 그리고 이 괴로움으로부터 우선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걸어오신 이십 수 년 간의 포교생활이 왜 그리 당신들에게는 중요한가라는 걸 느끼고 싶었습니다. 망설임의 연속 속에어디까지가 내 의지이며, 어느 것이 최선일까에 대해서 고민해가면서도 입소서류를 작성하고 면접을 준비하면서 상급회장님들 그리고 부모님으로부터 그 당시 많이 조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3년차 나고야에 있는 아이치교구 내 포교의 집을 향해 본부근행을 보고 많은 사람(터전에 계시는 분들)들의 환송을 받으며 미지의 땅 나고야로 출발했습니다. 나고야 도심 중심부에 위치한 아이치 교구는 53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포교의 집입니다. -참고로 데라다 전도청장님도 제2기 졸업생이십니다. 나고야의 중심에 있는 쇼와구에 위치한 아이치교구는 1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며 관내에 800여 곳의 교회와 1300여개소의 포교소가 있으며 그 교구는 그 지역의 명소로 지정될 만큼 지역사회에 공헌하며 휴일없이 365일을 신님의 일인 전도구제에 매진하며 마음을 닦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가까이에 있는 프로야구팀 주니치드래곤즈 돔구장은 1998년에 선동렬선수와 이종범이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한국사람이 온 적은 있지만 포교의 집에 일년간 들어온 것은 포교의 집 53년 역사이래 처음이었다고 포교의 집 주임선생님께서 감격하듯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선생의 부친 또한 태평양 전쟁 당시 한국인들과의 친하게 지내고 차별없이 지냈다는 말씀으로 기숙사생 13명중에 유일한 한국인으로써 행여나 소외감을 느낄지 모른다는 노파심에서 인지 따뜻한 마음으로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정말로 따뜻하고 너그러운 분이셨습니다.

입학생 모두가 먼저 포교의 집 신전에 들어서는 순간 그 선생님에게서 배운 건 머리를 숙이는 일이었습니다. 참배를 할 때도 정좌를 하고 이마와 코를 다다미에 붙이며 깊숙이 참배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여기의 전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머리를 낮게 하라 그러다 보면 마음도 낮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낮추는 일은 어렵지만 이렇게 머리를 낮추고 참배를 하고 절을 하면 그러한 마음이 익혀진다는 원리인 듯 싶었고, 처음엔 배가 당기고 숨이 차고 허리가 너무 휘어져서 통증이 왔지만 익숙해질 때까지 고통은 따르는 법이라 시키는 대로 매일을 그렇게 참배하고 근행을 보며 서로 큰절을 했습니다. 피곤할 땐 근행을 보다 그런 자세로 지쳐 잠잘 때로 있었습니다. 처음엔 힘이 들었습니다.

그곳의 일과는 이렇습니다. 매일 아침 5시 기상 교구 신전과 교구 내 청소, 헌찬, 그리고 교구 주변 청소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 동네엔 고양이가 많아서 고양이 배설물을 치우는 것도 빠뜨릴 수 없는 일과였습니다. 청소 후엔 6시 근행을 봅니다. 근행이 끝나면 근처 분식집이나 다방에서 샌드위치를 만들 때 쓰다 남은 식빵테두리를 얻어 와서 찌거나 구워서 된장국에 먹는 아침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포교 나갈 준비를 하고 출발식을 하기 위해서 신전으로 8시에 집합을 하고 좌근 근행과 청년회가 제창, 주임선생님으로부터 자신의 포교경험담을 듣고 아침말씀을 듣습니다. 다시 교구 앞마당에 모여서 팔수를 힘차게 추며 드디어 출발을 하게 됩니다. 돌아오는 시간은 오후 4시인데 사정에 따라 각자 돌아옵니다. 돌아오면 유일한 쌀밥을 먹을 수 있는 저녁식사 그리고 저녁근행, 그리고 저녁신명전하기와 교구와 가까운 곳에 있는 JR쯔루마이역에 공중화장실 청소를 하러 나갑니다. 청소가 끝이 나면 하루의 정리인 토론시간(내리아이)을 가집니다.‘오늘 몇 집을 돌았다, 어떤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있었다라고 서로 돌아가며 진지한 시간을 가집니다. 이것이 포교의 집 생활입니다. 그리고 반복입니다.

포교라는 걸 처음 하는 저였고 더군다나 일본에서 혼자 하는 방문전도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했습니다. 초기에는 그냥 며칠을 걷기만 했고, 초인종을 누르기까지가 너무나도 가슴이 뛰어서 망설이다 누르곤 했는데 어쩔 땐 눌러도 사람이 잘 안 나올 것 같은 집만 골라서 누르기도 했고 의무적으로 눌렀을 때도 있습니다. 정말 하기 싫을 때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녁 토론시간에 모두에게 오늘 내가 몇 집을 돌았다는 걸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도를 나가도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걸었고 벨을 눌렀고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거절당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러한 행위 속에서 전 감사함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감사함보단 교조님이 기뻐하실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전의 불안감도 괴로움도 사라졌으며 정말로 신기하게도 귀가 아팠던 것도 은연중에 없어져 버렸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귀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괴로워했던 날들이 이제는 편안한 잠을 잘 수 있고 감사한 식사를 하고 웃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의 날들로 변해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는 나고야의 도심과 주택가들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비록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나고야의 여름은 습하고 더웠습니다. 땀이 비 오듯 했고, 길을 잃어버리거나 방문한 집에서 성난 목소리로 퍼부어 댈 때도 있었고, 어떨 땐 사납고 큰 개에게 물릴 뻔하기도 하고, 돈을 쓸 수 없기 때문에-하루에 100엔만을 쓸 수가 있습니다- 물을 마시고 싶어도 공원에 식수를 잘 찾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물 한 모금에 대한 감사, 밥 한 공기에 대한 감사가 절로 나오는 나날이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런 감사를 알지도 못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러한 감사와 감동이 더욱 값진 발견이었을 지 모릅니다. 일년이란 시간 속에서 비록 많은 전도가 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6명을 터전으로 데리고 갈 수 있었고 한 쌍의 부부와 아이 둘, 그리고 알코올중독자 아저씨를 별석을 받을 수 있는 수호도 받았습니다. 물론 제가 이룩한 것이 아니고 신님이 보여주시는 것이며 희망을 보여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나고야 근처로 순교를 나오신 전 진주님으로부터 포교에 임하는 자세와 마음에 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전도구제란 자신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대로 신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거짓의 씨앗을 심지말라. 진실의 씨앗을 심어라. 그리고 지금의 이 '포교의 집' 생활은 장래의 길을 이을 수 있는 경험으로써 있다. 그리고 헛된 경험은 쓸모가 없다. 진실의 씨앗을 심으면 어디에서든 피어난다. 일본에서 심어도 한국에서 피어날 수 있고 미국에서 피어날 수도 있다. 그것은 어디를 가지 않는다]라고 일러주시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모두가 포교가 어렵다는 말을 합니다. 어떨 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 길은 실천만이 살 길이며 그 속에 모든 수호와 감사와 기쁨과 용솟음이 있다고도 합니다. 전 진주님의 말씀처럼 진실한 마음의 씨앗을 심는 것이 포교사의 본업이며 자신의 생각이 아닌 신님의 말씀을 모두에게 전하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이 땅의 젊은 포교사에게 필요로 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버이신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리고 교조님에게 의지하며 흠모하는 마음이야말로 실천의 기본이 된다고 마음깊이 생각해 봅니다.

포교의 집의 다녀온 지 벌써 4년이 지났습니다. 지금도 포교를 하고 있습니다만 좀처럼 감사함을 잊어버리기 쉬우며 일상생활에서 신님의 수호와 신앙의 고마움을 망각해갑니다. 아침에 일어날 수 있는 고마움, 아침밥을 먹을 수 있는 고마움을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다시 어두워지고 지치고 천리교가 부끄러워지고 하루가 지옥처럼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다시금 힘을 내어서 신님과의 약속을 지키도록 노력하며 나아가야지, 걷고 이야기하고 근행하며 나누어야지 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저로 하여금 용솟음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 해보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되어지지는 않습니다. 역시나 이 용솟음치는 마음이라는 것도 자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님으로부터 수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고생은 안 시킬 테니 도움한줄기에 여기 이곳은 신악가 5장 일곱에

고생을 하는 것도 마음속에서 자신을 원망해야 할 것이니라 신악가 10장 일곱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