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47호
입교187년(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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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나의 어머니

 

최향자(명진교회장)

 

제가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순천시 저전동 318번지입니다.

어머니 고향은 경기도 평택, 아버지는 전라남도 강진입니다. 할아버지는 한량이라서 전국을 다니실 때 어머니를 보고 며느리를 삼으셨지요. 그때 어머니 나이 18. 경기도에서 전라도로 맏며느리로 시집오던 날 오빠(나에게는 외삼촌)는 동생에게 여자는 시집 한번가면 뼈를 그 집에 묻어야 한다는 유산 같은 말씀 한마디를 남겼답니다.

시집오던 첫날밤부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매질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조실부모하고 오빠 밑에서 자랐고, ‘시집가면 뼈를 그 가문에 묻어야 한다는 오빠 말씀 때문에 참고 견디며 살아오신 세월이 어언 60. 그 동안 자녀를 10남매(정도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웃음)를 낳아 기르셨습니다. 저는 그 중에 막내입니다.

어느 날 어머니와 할머니가 함께 목욕을 가셨는데, 퍼렇게 멍이 든 며느리 몸을 보시고 할머니께서는 내 아들이지만 인간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어머니 몸은 항상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처지가 안돼 보였는지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담배를 가르쳤답니다. ‘효자 자식보다 담배가 때론 나을 수 있다하시면서.

부인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고 헌신짝보다 더 못한 대접을 하니, 생활은 형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 오사카로 온 식구가 이민을 가서 성냥공장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해방 후 돈을 가마니에 넣어 전남 순천에 오셔서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항상 술독이 비도록 술을 드셨고, 술을 드시면 항상 어머니에게 매질을 하셨습니다. 이런 생활속에 할머니는 화병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그 후 재산은 슬슬 삼베 잠뱅이 방귀 빠지듯 좋은 일 한번 못해 보고 다 없어졌습니다. 결국에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산골짜기 오두막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런 생활속에 어머니는 병주머니를 달고 사셨습니다. 소화를 못시켜 밥을 못 드시고, 허구한 날 매질로 생활하니 온 삭신이 쑤셔 견딜 수가 없고, 두통이 심하고, 가슴이 차오르는 홧병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생활이 찢어지도록 가난하고 자식들 먹을 것이 없어 시골 깊은 골짜기를 양은그릇 이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셨는데, 한번 나가시면 열흘씩, 보름씩 걸리니 오실 때는 기다리는 자식들이 눈에 밟혀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지금처럼 신발이 좋은 것도 아니고, 교통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걸으셨습니다. 키는 조그마한 할머니가 양은 그릇을 머리에 이고 이 골짝, 저 골짝으로 구슬같은 땀을 흘리시면서 고생하시다가 몸에 진기가 다 빠져 장사도 더 이상 할 수 없도록 쇠약해져 계실 때 누가 천리교 포교소를 차린다고 저희 친정집에 방을 구하러 오셨답니다.

고성교회-충무교회-삼천포교회에서 어느 선생님이 포교를 하러 오셨을 때 이삿짐이라고는 박자목 하나, 수 하나, 냄비, 수저가 다였답니다. 어머니는 때 묻지 않은 순박한 아주머니에게 그 자리에서 방을 내어주고 그 날 밤부터 근행이 시작이 되었는데, 첫날부터 우리 어머니와 언니(지금 명림포교소 소장님)가 첫 신자가 되었지요. 그때 언니는 22살 때쯤으로 머리가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장출혈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악한 것 제거하고 도와주소서 나무천리왕님이시여하고 부르는 조석근행 일주일 만에 아프던 머리는 깨끗이 좋아지고 장출혈로 물도 한 모금 못 넘겼는데 밥을 먹게 되고 어머니도 몸이 좋아지셔서 동네방네 천리교 와서 이런 도움을 받았다고 자랑 겸 전도를 해서 신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소장님은 맨 날 밥을 굶고 살더라는 말씀을 들었고 그러다 포교소가 여기 저기 이사를 다녔는데 겨울에는 냉방에 소장님이 주무신다고 어머니는 실천하신다고 돌을 구워 수건으로 싸서 저녁 근행때 가져가시고 아침 근행에는 그것을 되받아 오셨습니다. 30리가 넘는 곳에 옥수를 떠서 들고 가시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온몸에 타박상을 입으셨던 때도 있었습니다. 천리교 소장님 말씀 듣고 처음 작정한 것이 10남매 중 저를 위해 냉수목욕 작정을 하셨다고 합니다. 다른 자식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유독 나만 성격이 남자보다 과격하고 말을 따르지 않을 것 같아서 막내딸인 나를 위해 새벽 2시에 일어나서 40여년 간 돌아가실 때 까지 마당에서 얼음을 깨 가면서 냉수욕을 하셨다는 말씀을 돌아가실 때쯤에야 들었습니다. 그 때는 추위가 대단했지요.

아침 근행에는 빈손으로 가 보신 적이 없었습니다. 밭에 가꾸어 놓으신 야채 하나라도 바구니에 넣어 신님 전에 보답하시고, 오시는 길에는 가게 앞에 내어 놓은 빈 술병을 바구니에 모아 팔아서 신님 전에 은혜보답하셨다고 합니다. 어느 날 새벽근행 가시는 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기사 분이 병원에 가셔야 된다고 해도 근행보러 가야 한다며 기어이 교회 문 앞까지 오셔서 정신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갔지만 기사 분이 다치면 안 된다고 이내 퇴원하셨고, 사경을 헤매는 가운데도 자식들 걱정한다고 교통사고 말씀은 안 하시고 그냥 넘어졌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교회 독치성을 올리고 나니 눈을 뜨고 식사를 하시는 신기함도 보았지요.

신앙하시던 중에 고성초대회장님께서 영감님한테 큰절을 하라고 하셨다며 너무나 허탈해 하신 때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영감이 나한테 절을 해야지하는 마음이 꿀떡같았기 때문이죠.

다른 언니들은 말을 잘 듣고 천리교 신앙을 하였는데 나만 유독 어머니 가슴을 많이 아프게도 했던 것이 지금에야 생각이 납니다. “무엇 때문에 거지처럼 쓰레기통에서 빈 병을 줍고 다니냐고 근행보러 따라 가면서 불만을 품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 눈물이 납니다. 어머니께서 막내딸을 위해 소리없이 갖은 고생, 갖은 수모를 겪으신 덕분에 제일 먼저 신님을 모시게 되었는데···. 포교하고도 아직 어머니의 노고를 알지 못할 때인 83세로 어머니는 출직을 하셨습니다.

고성교회에서 제15회 특별수련회에 감화 요청을 받았습니다. 감화를 하면서도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 그동안 내가 살아온 생활에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인연과 무거운 액운과 싸운 이야기만 잔뜩 한 것 같습니다. 감화를 마치고 돌아가려고 신전에 참배를 하는 데 내가 잘한 것처럼 무슨 얘기를 하고 나온 거야. 어머니 노고는 생각도 못하고.’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랬습니다. 정말 어머니의 노고는 한번도 생각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발길이 돌려지지를 않았습니다. 신앙을 한다고 해도 너무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에 고성교회 마당을 나서면서 반성이 물밀 듯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교회보 편집실장님이 원고를 부탁하길래 나는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고 아예 안 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잊고 지냈던 그리운 어머니 생각이 나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친필에서는 근본에 대한 말씀이 수없이 나오는데, 그 중에 몇 구절이 생각이 나서 옮겨 적습니다.

이 근본을 자세히 알게 되면

질병이 생길 리는 없을 텐데 (3-93)

근본 되는 것은 작은 듯 하나 뿌리가 소중해

무슨 일이든 근본을 알라 (5-43)

이제까지는 달과 해를 모르는 자는 없다

그러나 근본을 아는 자 없다 (10-14)

인간은 어리석어서 보이는 것만 이야기한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어버이신님, 교조님을 통해 우리가 이 길을 알게 되었지만, 그 통로 역할을 해 주신 어머니가 이토록 애쓰며 고생하신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기면서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고성교회 와서 감화를 하고 나가는 나에게 어머니를 되새기게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간이 없었더라면 언제까지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을 겁니다.

어머니,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고 명진 교회가 있는 것은 묵묵하게 실천하신 어머니 덕분이거늘 기나긴 세월 어머니의 노고를 잊고 내가 잘한 것처럼 살아온 이 어리석은 불효자를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는 어머니가 계셨기에 천리교를 알았고 어머니 노고로 지금까지 이어 온 은혜 정말 잊지 않으렵니다.

지금도 어머니께서는 저 세상에서 막내딸 걱정하고 계시겠지요? 이제는 걱정 그만 하세요. 그 짐도 너무 무거우니 내려놓으시고 좋은 곳으로 태어 나셔서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너무나 많은 불효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어머니를 외쳐 불러봅니다.

그리운 나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