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본 사이트에는
천리교회본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른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
담길 수도 있습니다.




천리교 교회본부



cond="$

그리초대회장님 11

물질은 허망한 것

 

하영선(명성포교소장) 구술

남상우 기록

 

1969년은 제3차 교회 역사(구 신전역사)로 용재뿐만 아니라 신자들도 날이 밝으면 광주리를 하나씩 들고 나와 흙나르기에 정신이 없을 때였다.

어느 날 월차제를 마치고 대전으로 올라가려는 나를 초대회장님께서 붙잡더니 하선생, 며칠만이라도 히노끼싱 좀 하고 가지라는 말씀에 생각할 것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고서 나가던 걸음을 되돌려 교회로 들어왔다.

그렇게 일주일동안 작업복도 미처 준비해 가지 않았지만 입고 갔던 나들이 옷 그대로 히노끼싱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하선생, 저기 봐라, 저 사람들 너그 신자들 아이가라는 말에 무심히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머물렀다.

더운 여름날인데도 한 무리의 부인들이 역사현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나는 대전에서 포교하고 있을 때였는데 분명 우리 포교소 신자들이었다.

나는 속으로 저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일로…….’하며 생각에 빠져 있는 데 옆에서 누가 뭐하고 있소? 신자들이 오고 있는데 빨리 마중이라도 나가 보소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교회 역사현장을 나서 반가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까닭을 몰랐던 나는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먼저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 중에 한 신자가 선생님 걱정이 되어 집에서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 없어 길을 나섰습니다.”라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재차 물었다.

말인즉 내가 고성교회 월차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 신자들이 다 함께 대전역에 다 같이 마중을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아서 내일은 오시겠지 하고 밤마다 대전역 앞에 나가 일주일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고 따로 소식도 없고 해서 걱정이 되어 교회를 찾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히노끼싱하며 잘 있었습니다.”고 말하고 신자들에게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할 새도 없이 다그치듯이 나는 그들에게 잘 됐네. 그렇지 않아도 일손이 없어 고심하던 중인데 온 김에 모래나 나르고 가소.” 하고서는 그들의 팔을 이끌고 교회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집에서도 물 하나 안 묻히는 부인네에게 모질게도 히노끼싱을 시켰다.

하지만 그때는 신자도 용재도 그야말로 사욕을 저버리고 하는 히노끼싱이었다. 그때 교회 역사라 하면 지금처럼 돈(역사성금)만 있고 신자들의 히노끼싱 없는 역사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때는 벽돌도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 사용했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자들의 잔손을 참 많이 필요로 했다. 낮에는 농사일을 하다가 오후가 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교회에 와서 다 같이 흙나르기를 했는데, 남녀노소(男女老少)가 따로 없었다.

()신전을 만들어 신님을 예전 교회(고성군 서외동 145번지)에서 이곳으로 옮겨 천좌제(遷座祭)를 지냈다. 지금은 교회 주변이 집들로 가득하지만 그때만 해도 주위가 온통 밭이었다. 그런 이유로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그믐밤이면 칠흑 같은 어둠에 고생 꽤나 했다.

저녁 근행을 보러 갈 때면 누구나 손에 촛불을 하나씩 들고 갔는데 분위기(?)는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비라도 오는 날이면 촛불도 들고 갈 수가 없어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다가 진흙탕에 빠져 여기저기서 어이쿠, 어이쿠하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었다.

그리고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신전에 켜 둔 촛불이 다 꺼져 캄캄한 어둠에서 앞만 보고 근행을 보았던 적도 참 많았다. 그러나 그런 불평불만을 초대회장님은 산하 누구에게도 토로(吐露)하신 적이 없으셨다.

참다못해 하루는 저녁근행을 마치고 나오는 초대회장님께 여쭈었다.

회장님, 언제쯤 전기가 들어옵니까.”

물질이 풍요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야. 많이 가졌다고 해서 더 너그러워지기는커녕 많이 가질수록 욕심만 더 많아지지. 옛날보다 교통, 전기가 편리해지기는 했지만 사람이 전선 하나에 의지해 사는 것이나 다름없어. 전기가 없으면 뭐 하나라도 온전히 할 수 없으니 말이야. 그만큼 물질은 허망한 것이야. 사람은 인정을 쫒아야 돼.”

나는 말씀 속에 담긴 뜻도 모르고

어쨌든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이 전깃불일 것 같습니다. 시설을 하는데 도대체 얼마가 듭니까?”

...”

이렇게 천지가 캄캄해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글쎄.”

초대회장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그날도 그러했다. 늘 고마운 일이나 기쁜 일, 언짢은 일까지도 용재들의 방종을 감내하며 묵언으로 이 길의 자식들을 가르치셨다.

 

자립 경제(?)

 

그때는 종교에 대한 믿음보다도 신상을 수호받았다는 감사함, 즉 어버이신님께 은혜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포교의 길을 많이 걸었다.

그렇다보니 지금처럼 정성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지금이야 용재나 신자들도 이치를 알고 인연 자각을 나름대로 해 자연스럽게 정성금을 내 놓아 역사가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 때만 해도 다 빚으로 역사를 했다.

그때 대부분의 신자들의 으뜸하루는 신상수호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죽기 바로 일보 직전에 이길을 알게 되어 다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의 신앙을 하였다.

그냥 두면 죽을 사람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교회에 데려와 생명을 이어두기는 했지만, 인연으로 보면 다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교리로 볼 때, 남을 도와야 비로소 자기 인연이 조금씩 끊어지는 데, 그 당시 포교라 하면 (물론, 지금과 별반 달라진 것은 없지만)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맨주먹 하나만 불끈 쥐고서 나갔다.

잘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속에서 어찌 어찌하여 신자가 생겨야 비로소 포교장소를 수호받을 수가 있었다. 먹을 데도 잘 데도 없고 하물며 옷 갈아입을 데도 없는 공중포교를 했었다.
그래서 기숙하는 누구나 포교나가는 것을 죽으러 나가는 만큼이나 두렵게 생각했었다. 아픈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포교만이 살길이라 생각하고서 나간 사람은 인연도 끊고 명줄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가정도 꾸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초대회장님은 신상으로 입신해 겨우 허리를 펴는 사람에게 포교작정을 강요할 수도, 건강이 좋아졌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빈털터리가 되어 마지막 수단으로 교회에 들어온 그들에게 정성금을 바랄 수도 없었다.

남을 도와야 제 몸 도움 받는다는 말씀으로 포교작정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이 좋아 그런지 그 분 주위에는 늘 사람으로 붐볐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있는 데는 돈이 드는 법이라 늘 돈 때문에 혼자서 애를 태우셨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자립경제(?)였다. 고성교회에 기속하는 기숙생(100명 정도)들의 먹거리만이라도 우리 스스로 해결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채소와 과실 가꾸기다.

나중에는 얼마나 많이 재배를 했는지 시장에 내다 팔 만큼이나 되었다. 기숙하는 누구나 틈만 나면 밭에 나가 히노끼싱을 했는데, 고무신을 벗을 여유조차 없었다. 근행보는 시간이 휴식시간이었다.

지금 그렇게 시키면 아마도 노동력 착취니 뭐니 해서 아무도 하지 않겠지만, 그때는 누구하나 불평불만이 없었다. 일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을 되찾았다는 것만으로도 피곤을 모르고 용솟음칠 수가 있었다.

초대회장님도 시간만 나면 밭에 나가 같이 일손을 거들었다. 멍하니 앉아 있다든지 낮잠을 자는 것을 곁에 있는 동안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참으로 부지런한 분이셨다.

하지만 한번 불어난 빚은 좀처럼 줄어들지가 않았다. 그래도 혼자 골머리를 싸매는 한이 있어도 어느 누구에게도 돈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딱 한 군데, 어버이신님, 교조님에게는 자신의 몸을 내던져 가며 매달렸다.

그래서 밤마다 어디에 가든 빠지지 않고 냉수목욕 기원을 하셨는데, 그것이 한동안 고성교회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기도 했었다.

 

그 은혜를 못 갚고 있지만

 

박미자(연진교회장) 구술

 

내 나이 19살 되던 해, 아주 많이 아팠다.

병원을 다녀야 하는데, 잘 곳이 마땅찮아, 고성 송도에 우리 집안사람인 원산리(동산)교회 초대선생우리 아버지 칠촌 아주머니가 되고, 나에게는 팔촌 할머니뻘이 된다이 살고 있었는데, 그 할머니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할머니께서는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세수도 잘 못하고 하니까, 나를 깨끗하게 씻겨서는 천리교 믿으면 좋다면서 나를 데리고 간 곳이 고성교회였다. 그러니까 그 할머니의 인도로 천리교 고성교회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조금 있다가 원남성교회 전도사로 활동했기 때문에 초대회장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초대회장님은 원남성 초대교회장으로부터 꾸중을 참 많이도 들었다. 우리가 했으면 적당히 넘어갈 일도 초대회장님께서 하시면 그렇지가 않았다. 왜 그런가 하고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광민교회장, 영도 초대교회장, 원심 초대교회장, 전부 고성교회에서 온 사람이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원남성 월차제일이었던 것 같다. 월차제를 마친 후, 원남성 초대교회장이 산하 용재들에게 너거들 거기 다 앉아봐라.”고 했다.

다들 무슨 일인가 하고 원남성 초대교회장 앞에 앉는데, 초대회장님을 보고 사람 올리나, 돈을 올리나 한번 올렸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당신이 은근히 이 사람들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되겠나. 한번 올렸으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지 미련을 가지고 있어서야.”하면서 고성교회에서 온 용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속내를 물어보았다.

나한테도 물어 보길래, 원남성 초대교회장도 계시고 초대회장님도 앉아 계시는 앞에서 저는 고성회장님에게 이날까지 쓴 담배 한 개비도 대접을 못해 봤어요.”하니까, 원남성 초대교회장께서 알았다.”고 했다.

우리가 원남성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전도사 인원만 한 30명이 있었다. 초대회장님이 앉아서 인연 판단을 해 주면, 나보고는 다른 사람보다 부모복이 참 많고, 오래 살겠다고 했다. 그리고 원남성교회에서 나를 만나면 꼭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그래서 내가 비록 원남성교회에서 신상구제를 받았다지만, 천리교를 안 것은 고성교회라 그런지 항상 어버이를 향한 그리움 같은 것이 가슴 언저리에 남아 있다. 하지만 내가 못났기 때문에 은혜를 다 갚지 못한다는 게 항상 마음에 걸릴 뿐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