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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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리에 따르다

번역글

하늘의 리()에 따르다 8

 

나가다이 간지(中臺勘治)

이호열(성천교회장)

학교가 좋은 아이

명랑한 마음, 건강한 아이

자녀는 바람의 아이라고도 한다. 어째든 부모는 자녀가 건강하고 밝게 자라기를 바란다.

다녀오겠습니다.” “잘 갔다 와

아침식사를 마치고 어머니의 배웅으로 건강하게 학교에 간다. 옛날에는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매일 아침의 행사였고 당연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부모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우물쭈물 거리고, 등교 빠듯한 시간까지 자고 있다. 그래도 학교에 간다면 그마나 다행이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좀처럼 학교에 가려고 하지 않고 완고하게 움직이기를 거부한다. 그런 아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전에 신문에서 학교가 싫은 초등학생의 기사를 본적이 있다. 아이들의 수는 아시는 바와 같이 매년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도 학교가 싫어서 연간 5일 이상 쉬는 학생의 수는 매년 확실하게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의 학교이탈현상의 확대에 학교관계자들은 위기감을 품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등교거부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으면 부모는 걱정이다. 그럴 때 마냥 아이만 나무란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은, 가지 않는 이유가 있다. 때문에 이유를 잘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을까. 그 이유의 대부분은 한마디로 말하면, 싫기 때문이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어리광 부리지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본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큰 문제인 것이다.

학교가 좋은 아이들은 대부분 활발하고 건강한 아이들이다. 부등교(不登敎)하는 아이들을 보면 무엇이든 재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웃음이 없다.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아이들이 많다. 용솟음치고 맑은 마음. 여기에 크게 갈림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친필>,

어버이의 눈에 맞는 자는 나날이

차츰차츰 마음 용솟음칠 뿐이야 15-66

지금의 아이들은 편사치 교육, 학력경쟁 속에서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다. 또 학원 보내기의 과열에서 탈락한 아이들은 수업에 따라가지 못해서 비뚤어지기 쉽다. 물론 학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마음을 키우고, 배려심을 키우며, 어버이신님의 의도에 맞는 마음으로 육성한다. 그런 가운데서 아이 본연의 명랑함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을까.

부등교(不登敎) 아이와 함께 매일 아침 빗자루를 들고 바깥 청소를 한 적이 있다. 아침청소는 실로 상쾌하기 그지없다. 집안에 틀어박히기 쉬운 아이가 조금씩 밝아져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위와 어우러져 회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부등교의 아이를 부모의 눈으로 보면 무슨 이 정도의 일도 못하는 것인가. 게으름 피우는 것도 정도껏 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 해결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을 바깥으로 향하게 한다. 내향적인 마음과 자기 멋대로의 마음을 남을 기쁘게 하는 마음으로 바꾼다.

무엇이든 괜찮다. 부모가 한마음으로 배려있는 마음을 가르쳤으면 한다. 이런 것을 실천하는 가운데 건강하고 밝고 명랑한 아이가 되면 부등교(不登敎)나 학교가 싫다는 등의 것들은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침에 일어나

벌써 40년 전의 일이지만, 대학 2학년 때의 일이었다. 전국적인 학원분쟁이 자주 발생하여 교정 곳곳에서 중핵! 혁명이라고 쓰인 홍백의 헬멧을 볼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내가 다녔던 대학에서도 개별 책상이나 의자를 쌓아 바리케이트를 만들고는 수업은 1,2개월간은 중단되었다. 수업이 없기 때문에 쉬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쉬는 것이 버릇이라는 이상한 버릇이 붙어버렸다.

버릇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수업이 재개되어 다른 학생들은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전혀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아무것도 재미가 없고 거의 학교에 가지 않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학교 교문 앞에 까지는 가지만, 거기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공부를 하려고 책을 펼치고 2,3페이지를 읽으면, 공부가 정말 싫다는 그런 기분이 들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조바심을 내어보지만, 막상 하려고 하면 몸 전체가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그런 상태가 1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가 싫다! 학교가 싫다! 는 아이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든다.

비참하고 침울한 나날을 보내는 중에, 둘째 형으로부터 무엇이든지 곤란한 일이 생기면 신님의 일을 해보면 좋을 거야.’라는 말을 듣고, 갑자기 떠 오른 신전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부터 신기하게도 마음속에 활기가 쏟기 시작해서 즐겁게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왜 그렇게 즐거워졌는지를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하나는 당연한 것이지만, 신님의 일을 했기 때문에 신님께서 수호를 해 주신 것이리라. 또 하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게끔 되었기 때문이다.

부등교(不登敎)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 교장선생님께서 학교에 오지 않는 학생은 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일찍 일어나기, 아침 일찍 일어나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적고 있다. 신전청소는 아직 바깥은 어두운 이른 아침 5시부터 시작하게 되어 있었다. 그때까지는 학교에도 가지 않고 매일 10시까지 자고 있었던 것이, 일찍 일어나기 시작함으로 해서,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침은 하루의 중심이다. 중심을 소중하게 하지 않으면 하루의 리듬이 깨져 버린다. 그런 이상이 쉬는 버릇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최근에는 초등학생이라도 11, 12시까지 일어나 있는 아이들이 많다. TV나 게임의 영향으로 혼자서 일어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아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늦게 일어나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부등교(不登敎)의 최대의 원인이 되는 것 같다.

나의 경우는 늦게 일어나 거의 학교에는 가지 않았던 대학 2학년 때에는 독신 생활을 했다. 그렇다고 해도 대교회의 오래된 사무실 작은 방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자유로워서 늦잠을 자거나, 학교에 가지 않고 결국에는 빈둥빈둥 어슬렁어슬렁 되어 버렸다. 초등학생은 대부분 부모와 생활을 함께 한다. 부모와 함께라면 본디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지 않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되지 않는가. 그것은 가정이라는 곳의 역할이 깨져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부모가 밤늦게 까지 TV를 보고 아침에 좀처럼 일어나지 않거나, 혹은 늦게 까지 일을 해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가 많다. 특히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은 엄마가 아침에 일어나지 않는 경우에는 아이가 부등교(不登敎)가 될 가능성이 당연히 높아진다.

자녀의 부등교(不登敎)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초밥집이 있었다. 부모가 함께 밤늦게 까지 일을 하고, 뒷정리까지 끝내면 새벽 1,2시쯤 된다. 당연히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 아이의 부등교(不登敎)가 시작되었다.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게 되자, 아이의 일이 걱정이 되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런 고민을 안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장 중요한 일은 아이를 키우는 것이다.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게 되면 열심히 일해서 생활이 아무리 풍요해져도, 그렇게 적막하고 쓸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길에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정직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일하자가 즐거운 삶의 근본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풍요로움만을 쫓은 나머지 자녀를 키우는 가정 본연의 모습이 삐뚤어지지는 않았는지 잘 생각해보고 반성해 보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먼저다.

 

3명의 고교 중퇴생과 함께

부등교(不登敎)라고 하면 이전에 수양과 1기 강사를 했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내가 책임지고 있던 반에 약 50명의 수양과생 중에 고등학교를 중퇴한 3명의 젊은이가 있었다. 3개월간 터전에서 매일 보살펴주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3명의 얼굴이나 성격 등이 확실하게 기억난다. 나의 견해로는 한 사람은 곧정형(直情型)으로 화를 잘 내는 타입이고, 한 사람은 굴절형(屈折型)으로 제대로 사물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 타입이며, 또 한명은 허무형(虛無型)으로 모든 것이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타입이었다. 3명 모두 아직 18세였다. 몸집은 있었지만, 소년과 같은 천진난만함과 귀여움을 간직한 청년들이었다.

곧정형은 좌우지간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타고난 성품이 나와서 다른 수양과생과 크게 싸움을 했다. 왜 싸움을 했는지 물었더니, 자신과 눈동자를 맞추었기 때문이란다.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 바로 싸움을 했기 때문에 단순하다고 해야 할지. 정말로 곤란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3개월이 끝날 무렵에는 천진난만하고 명랑한 얼굴이 되어서, 내게 곧잘 이야기를 걸어왔다. 친구들도 많이 사귄 것 같았다.

굴절형은 본심은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고 항상 기분 나쁘게 히죽 이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인생의 출발점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뒤틀린 것 같아서 불쾌감마저 느끼게 했다. 날이 갈수록 조금씩 변했지만, 2개월이 지날 때쯤 그 굴절형이 나에게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걸어왔다.

선생님, 부모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보는 것이 저의 기쁨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런 슬픈 기쁨이 있을 수 있는지 놀랐다. 며칠 후 감화시간에 그 청년이 교실의 단상에 올라 눈에는 눈물을 가득 머금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저는 불효만 일삼아 왔습니다. 지금부터 순직하게 되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말에 정말 잘 변해주었구나. 기쁨이 가슴 가득히 퍼져갔습니다. 그 당시의 광경은 항상 감격과 함께 눈시울을 적신다.

허무형은 고독하고 멍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나름의 주장이 있었다. “수학이나 영어를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대부분의 사람은 사용도 하지 않는다. 그런 노력은 의미가 없다. 이 세상은 바보스러운 것 천지다.” 그 청년에게 배움의 중요함과 살아가는 의미 등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마음을 닫은 그대로였다. 단지 동년배의 친구들의 권유로 신전 회랑 닦기나 일요 히노끼싱에 나가는 것이 작지만은 마음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전부였다. 3개월 간 그들을 보살피며 느낀 것은 각자 각자가 마음속에 특이한 성품이나 크나큰 고민거리를 안고 있다는 것이었다. 부등교(不登敎), 학교 중퇴 등의 외견만으로 저 놈은 안 돼, 그것도 안 돼 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전혀 해결책이 못 된다. 그 근본을 알지 못하고서는....,

문제는 마음에 있다. 태어나서부터 길러진 가정환경, 타고난 성품 등이 큰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바뀌질 않는다. 조금씩 마음속 티끌을 털고, 따뜻하고 순직한 마음을 육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지도말씀에

인연이라는 것. 인연 하나의 리는, 단노 외에는 받을 리가 없다. 이것 잘 분간해 들어라. 단단히 하나의 단노의 리를 다스려 다오. 다스려 다오. 1896.10.4

아이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런 아이를 점지 받은 인연을 부모가 자각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부족의 마음이 없어지고 해결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주변사람들의 따뜻한 배려 속에서 아이의 순직함이 커가는 것이다. 느려 보이지만, 가장 빠른 지름길이 아닌가 생각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