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고성교회

"고성" 통권 350호
입교187년(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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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회 기초교리 강좌 강의록

 

정 성 1

이상봉(고성교회장)

 

정성은 진짜, , 사실

오늘 정성이란 주제로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원전에 나와 있는 정성에 대한 인용문들을 여러분께 자료로 드렸습니다. 한마디로 정성이라고 나와 있지마는 원어로 하면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일단 정성에 대해서는 원어로 마코토라고 합니다. 마코토()는 말씀언 변에 이룰 성자를 씁니다. 그래서 직관적으로 마코토 하면 진짜다라는 말입니다. 진짜냐 가짜냐의 구분으로 많이 쓰는 데 그것이 정성이다. 그래서 정성스런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진짜배기 사람이다. 이런 의미로 현지 사람들이 쓰고 있습니다. 반대는 가짜 신앙을 하는 사람입니다. ‘너 하는 말이 마코토냐?’ 하는 말은 진짜냐 진심이냐 이런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전에도 보면 정성이란 말을 해설해 놓은 것이 많습니다. 우리 국어사전에는 온갖 성의를 다하려는 참되고 거짓이 없는 마음이라고 나와 있고, 일본에서는 다른 것이 섞여 있지 않는 성의. 잡스런 것들이 섞여 있지 않는 순수한 성의를 정성이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진짜, , 사실 이런 것들이 정성이라고 합니다. 조금 전에 말했지만 정성의 반대말은 건성입니다. 어떤 일을 성의 없이 겉으로만 하고 진지한 자세나 성의 없이 대충하는 태도를 건성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친필에 보면 세 가지 부분이 정성이란 부분에서 인용이 되어있습니다.

입으로만 아첨하는 것 쓸데없어

마음 가운데 정성만 있다면 (3-39)

입으로만 아첨하는 것 쓸데없다는 것은 말 잘하는 것이 꼭 정성이 아니다, 그런 이야깁니다.

술이나 법이 훌륭하다 생각 말라

마음의 정성 이것이 진실 (5-44)

술이나 법이라고 하는 것은 신기한 기술, 의술도 여기에 포함 되는 것이고, 점을 치는 일이라든지 보통 사람으로서 행할 수 없는 신기한 것들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것이 훌륭한 것이 아니고 각자 마음의 정성이 진실로 훌륭한 것이다. 그러한 술이나 법보다도 내 마음에 있는 정성이 더 훌륭한 수호를 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길을 신앙하는 분들 중에는 용한 점쟁이가 있다 해서 그 사람 말만 믿고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거죠. 물어보고 의논하지 않더라도 자기 마음에서 정성을 내면 점쟁이 말보다 훨씬 더 훌륭한 수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진실로 마음에 정성이 있으면

어떤 구제도 틀림이 없다 (13-71)

구제를 받고 수호를 받는 것도 정성이 있어야 받는다. 이런 말씀입니다.

 

별석말씀에 보면

과연 훌륭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만 어버이신님은 어떤 자유자재한 수호를 보여 주십니다. 또한 사람들도 기쁘게 이야기를 듣고 납득합니다. 어떠한 괴로운 길을 지나 갈 수 있는 것도 어떠한 구제를 해주시는 것도 자신의 마음의 정성, 실천에서 맺는 열 매 외는 없기 때문에 우리마음에 정성의 마음을 굳게 담아서 수훈의 리를 받아 이 길 을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 별석 받을 때 이러한 말을 들은 기억이 나십니까?

 

정성의 기준

정성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하면 정성이고 어떤 일을 안 하면 정성이 없는 것일까? 그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 “고성초대회장은 수훈 전할 때마다 냉수목욕을 하셨다구요. 그 냉수목욕이 정성인데 그럼 냉수목욕 안하면 정성이 없는 거냐?’하는 겁니다. 그 기준이 뭐냐는 거죠. 냉수목욕 했다고 해서 무조건 정성이 있는 것이고 또 그에 맞는 공식처럼 어떤 수호가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스런 것은 남들이 볼 때도 그렇게 인정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성스런 사람이란 어떤 기준은 없지만 남들이 볼 때 참 정성스런 사람이라고 무언중에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인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훈이라고 하는 것은 나날이 항상 다하고 나르기, 정성을 보고 어버이신님께서

구제한줄기를 위해서 효능의 리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수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매일 같이 나르기 다하기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거기에 어버이신님이 수호를 받을 수 있도록 효능을 내려 주셨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다하기는 남을 구제하는 데 정성을 다 하는 것이고, 또 나르기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 참배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매일 같이 교회에 참배하고 남을 구제하는데 노력을 다 하면서 나날이 정성을 쌓아갔을 때, 수훈을 전하면 어버이신님께서 효능의 리를 내려주셔서 수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정성은 삼가는 마음

그 다음에 인용된 글을 보겠습니다.

몸도 마음도 활발하게 움직여 인색한 마음을 쓰지 않도록, 화는 내지 않도록, 욕심은 부리지 않도록, 두둔하고 감싸는(편애) 것은 하지 않도록, 여자에 현혹되고, 남자에 빠지지 않도록, 술을 많이 마시지 않도록, 욕심과 교만은 쓰지 않도록, 거짓과 아첨은 말하지 않도록, 마음을 삼가고 몸을 삼가는 것이 정성.

 

별석말씀에 정성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여덟가지 티끌에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 정성이다. 마음을 삼가고, 몸을 삼가는 것이 정성이라고 합니다. 마음도 내가 타고난 성질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정성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티끌을 안 쌓는 사람은 없겠습니다만, 특히 타고난 성질대로, 마음껏 마음을 쓰는 것은 티끌을 쌓는 근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조님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삼가면 인연을 끊을 수 있다고 하셨는데 자기가 제일 잘 쓰는 마음을 마음대로 써버리는 것은 정성하고 반대되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단노(납득)의 리는 참된 정성

인간의 몸에는 부족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생의 티끌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과연 그렇구나, 듣고서는 과연 그렇구나라고 충분히 단노(납득)하는 리를 다스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단노(납득)의 리는 참된 정성입니다.

정성이라는 것은 단노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단노라는 말을 저는 납득이라는 말로 괄호를 넣어서 만들어 놓았습니다. 납득이라는 것은 앞에 문장하고 연결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부족이지 않습니까? 부족!

예를 들면, 자기 가족에 신상이 온다든지, 사정이 온다든지 마음에 들지 않고, 맞지 않는 일들이 보여지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내가 정말 이런 일을 당할 당연한 일을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보게 되는 거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납득이지 않습니까? 다른 곳에서 오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내가 써온 마음씨대로 이런 것이 오기 때문에 당연하구나, 그럴만하구나생각하는 것이 납득이고, 그래야 단노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차라리 단노라는 말보다 납득이라는 말이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남이 나한테 나쁜 말을 하고 험담을 하면 기분 안 좋습니다. 그런데, ‘내가 뭔가 이런 말을 들을 만한 일을 했구나라는 납득이 되면 기분 나쁘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납득해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정성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납득을 하지 못하고 인간생각으로 거기에 되받아치고, 자기 리를 세우기 위해 할 수 있는 대로 다하는 것은 단노도 아니고 정성도 아니고 반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정성은 구제

마디에서 좋은 싹이 트고,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길이 나타납니다. 괴로움은 재난을 면할 수 있는 토대입니다. 그래서 남의 어려움을 보고 도와주고 싶다, 부자유(신상)는 구제해 주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정성은 어버이신님의 마음에 합당한 것입니다. 하늘의 리입니다. 또한 남을 구제한다고 말을 해봤자 정성이 없으면 구제할 수 없습니다.

 

여기도 정성의 중요한 뜻에 대해서 말씀 해 주시고 있습니다. 정성이라는 것은 남을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이 정성입니다. 내가 도움 받고자 하는 것은 정성이 아닙니다. 자기 몸 도움 받고자 애쓰는 것은 정성이 아닙니다. 신님의 마음에 맞는 정성이 아닙니다.

뒷부분에 나옵니다만 아주 조그만 하나의 티끌 하나를 주워도 그것이 정성이 될 수도 있고, 엄청난 나무를 치우는 큰일을 해내도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남을 도우려고 했느냐, 자기 잘 되려고 했느냐거기서 명확하게 구분이 되어집니다.

이것을 크게 깊이 생각해 보면 이 길의 역사에서도 이런 일들이 많이 보입니다. 천리교에는 16,000군데 넘는 교회가 있고 그 중에 상당수가 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도 그 중에 보면 사정없이 순탄하게 흘러온 교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여러 가지 사정이 휩싸여온 것을 잘 살펴보면 역시 교회장의 마음에 이런 것이 깔려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아무리 남을 구제하는데 열심히 하고 공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담긴 진실은 내 몸이나 내 집안의 일신양면을 위해서 하면 신님이 안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진심이 담겨있는 사람들은 그대로 칠대 팔대까지 가도 진짜 순직하게 내려오는 모습이 역사로서 증명을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듭니다.

한 순간에 대단한 구제를 하면 그것이 과연 한 만큼 다한 리는 있겠지만 정성의 마음과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는가, 어떤가는 역시 남을 구제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하느냐와 또 그 마음이 변하지 않고 이어지느냐에 따라서 상항은 얼마든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한번 해 놓았다고 자손 영원토록 계속 이어가는 그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남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심에 박혀있지 않으면 그것은 언제라도 없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남을 구제하려고 아무리 생각해도 정성이 없으면 신님이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남을 구제하려는 진실한 정성이 없으면 구제 받지 못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 지난 519일에 있었던 제46회 기초교리강좌 이상봉고성교회장님의 정성이란 주제로

강의하셨던 것을 여러분들의 요청에 의해 강의 녹취록을 풀어서 올립니다.

풀어주신 김상용선생께 감사드립니다. (편집부)